강훤(康萱) 기주(경북 영주)호족
기주(基州, 현재의 경북 영주 풍기) 호족으로, 909년 대경대사 여엄(大鏡大師 麗嚴)이 귀국하여 소백산에 은거하자 고려 태조에게 이를 알렸다. 태조는 여엄을 지평(砥平:양평군) 보리사(菩提寺)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강훤은 기주(基州) 제군사(諸軍事) 상국(上國)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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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훤(公萱) 고려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장군. 927년(태조 10)신라가 후백제의 공격으로 위급하여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시중(侍中)으로 군사 1만 여인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그리고 929년 견훤(甄萱)이 고창군(古昌郡:지금의 安東)을 포위하자 대상으로서 태조 및 홍유(洪儒)·유금필(庾黔弼) 등과 함께 이를 구원하였고, 936년 태조가 삼군(三軍)으로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상으로 대장군이 되어 원윤 능필(能弼), 장군 왕함윤(王含允) 등과 함께 삼군의 원병을 구성하여 일리천에서 신검(神劒)을 격파하였다. 이 전투로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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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저는 강훤이 상국, 공훤이 시중이고 영주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두 인물의 동일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일단 두 사람으로 열전을 각각 작성하였는데요,
강훤은 기주, 현 경북 영주의 호족으로 작성하였는데, 이유는 당시의 비문 보리사대경대사탑비를 국역한
문화재청 산하의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시스템의 국역만을 접했기 때문입니다.
헌데 자세히 원문 비문을 살펴보니, 국역에 공(公)자를 빠트리고 국역하였더군요.
정확히 강공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보리사대경대사탑비(菩提寺大鏡大師塔碑)
건립 : 939년
음서 : 942년
장소 :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지
링크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3
보리사대경대사탑비中
近煙塵路出奈靈行臻佳境望彌峯而隱霧投小伯以栖霞爰有知基州諸軍事上國康公萱寶樹飮風禪林慕道承 大師遠辭危國來到樂郊因」
보리사대경대사탑비 음기中
在家弟子」
佐丞公萱 元甫貞順 元尹里仁」
기주제군사라 함은
일단 기주는 경북 영주 풍기지역을 말하며, 신라 말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리다가 통일 후
939년 기주로 이름이 바뀌었더군요.
제군사(諸軍事)라는 것이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가 지방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인근 호족들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그 군을 통솔하는 자리입니다.
918년 고려가 세워졌을 당시에도 시중 김행도가 충청도 호족들의 배반을 토벌하기 위해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어 아주(牙州 현 아산)에 내려간적도 있었지요. 상국(上國)이란 나라의 재상을 뜻하고요,.
즉, 기주 제군사 상국이란 말은 기주 인근의 지방호족들의 군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중앙에서 임명된 재상이란 뜻이지요.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 상국(上國) 강공훤(康公萱)
좌승(佐丞) 공훤(公萱)
고려사 등의 사서에 성을 빠트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보통 처음에는 성+명 을 모두 기록하다가, 이후에는 명만 기록하는 것이 사서 편찬의 기록 방식이지요.
아마 공훤의 성이 누락된 이유는, 황주량 등의 7대 실록 이전의 기록에는 아마 강공훤의 기록과 이후 기사에 공훤도 기록이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허나 강공훤이란 부분에서 누락, 분실되었고 아마 이후 기사만 찾아내어
술이부작의 원칙대로 공훤이라고 실록을 편찬한 듯싶습니다.
일전의 강공훤에 관련된 글에서 저는 강공훤을 신천강씨인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이번에 나온 네이버 국역 고려사의 공훤의 각주에도 역시 신천강씨로 주석을 달아놨더라고요.
견훤님께서 문의하신 강공훤(康公萱),공훤(公萱),강훤(康萱) http://cafe.naver.com/goryeosa/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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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님께서 문의하신 강공훤(康公萱)과 공훤(公萱) 중 강공훤은 제가 조사한 900여 명 열전엔 강훤(康萱)으로 조사되었더군요.
일단 기주는 경북 영주 풍기지역을 말하며, 신라 말에는 기목진(基木鎭)이라 불리다가 940년 통일 후 기주로 이름이 바뀌었더군요. 하여 강훤이 제수 받은 기주 제군사 상국은 통일후 제수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제군사(諸軍事)라는 것이 중앙에서 파견된 고위 관리가 지방에 주둔하면서 유사시 인근 호족들의 군사들을 끌어모아
그 군을 통솔하는 자리입니다.
918년 고려가 세워졌을 당시에도 시중 김행도가 충청도 호족들의 배반을 토벌하기 위해 지아주제군사(知牙州諸軍事)가 되어 아주(牙州 현 아산)에 내려간적도 있었지요. 상국(上國)이란 나라의 재상을 뜻하고요,.
즉, 기주 제군사 상국이란 말은 기주 인근의 지방호족들의 군사들을 총괄 지휘하는, 중앙에서 임명된 재상이란 뜻이지요.
한편 공훤이 사적에 나온 바로는 927년에 시중(侍中), 929년에는 대상(大相), 935년에는 대상 겸 대장군으로, 특히나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는 지방호족 연합군 1만 5천을 지휘하기도 하였고요.
하여 제가 추측한 바로는 일단 공훤과 강공훤, 강훤은 동일인물로 보이며 여엄이 귀국한 해가 909년이고, 귀국 장소가 나주였습니다. 당시에 나주를 수비하던 마진국 수군장은 바로 왕건이었지요. 공훤이 경북 영주에 있었다면 이런 사실을 왕건에게 알릴 이유가 없을듯싶습니다. 하여 공훤 또한 이 당시에는 왕건 휘하에 소속되어 나주에 있었던 듯싶습니다.
후에 공훤은 후삼국 말기에 고려의 재상에 올랐으며 여러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일리천 전투 직전에는 호족 연합군을 꾸리기 위해 경북 영주에 제군사로 파견된듯싶고요. 통일 후에도 적어도 940년까지는 영주에 계속 주둔했던듯싶습니다.^^
강훤이 고려, 특히 왕건의 휘하에 있기 전에도 경북 영주 풍기의 지방호족 출신이었는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제가 추측키로는 패서 호족 세력이었으며, 궁예의 왕후 강씨의 집안이고,
왕건 조부 작제건의 외가이기도 한 신주강씨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결론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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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태조 19년 936년 각주中
12 공훤(?~?) : 강공훤(康公萱)이라고도 하며,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신라 효공왕 때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가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시중(侍中)·대장군·대상(大相)·좌승(佐丞)·대광(大匡)을 역임한 무신관료이다. 그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92, 열전5, 유금필전(庾黔弼傳) 참조.
국역 고려사 유금필 열전中
공훤(?~?) : 신천 강씨(信川康氏)로 강공훤(康公萱)이라고도 하며, 신라 효공왕 때 지기주제군사(知基州諸軍事)가 되었다가 고려 태조 때 시중(侍中)·대장군·좌승(佐丞)·대광(大匡)을 역임하였다. 태조 12년(929)에는 고창(古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전투에 참전하였고, 같은 왕 19년 9월에는 태조와 함께 일리천(一利川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전투에 참전하여 삼군 원병을 지휘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그의 부인 박씨(朴氏)와 함께 성주산문(聖住山門)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및 오룡사(五龍寺)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의 재가·재학제자로 활동하는 등 불교계에도 영향력을 미쳤다. 한편 태조의 비인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의 아버지 강기주(康起珠) 및 일리천 전투에 참전한 원윤(元尹) 강유영(康柔英) 등도 그의 일족이었다.
고려사절요 936년 9월 기사中
또 대장군 대상 공훤(公萱)ㆍ원윤 능필(能弼)ㆍ장군 왕함윤(王含允) 등이 기병 3백 명과 여러 성의 군사 1만 4천 7백 명을 거느리어 삼군(三軍)의 원병(援兵)이 되었다.
고려사 유금필 열전中
홍유(洪儒)·박술희(朴述熙) 등이 “신들이 비록 용맹은 없지만 진무하는 장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요청하였다. 태조가 “무릇 장수가 되려면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귀중하오.”라고 하자, 공훤(公萱)과 대광(大匡) 제궁(悌弓) 등이 유금필이 적임자라고 천거하였다.
(중략)
태조 12년(929)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을 포위하자 유금필이 구원군으로 태조를 따라 예안진(禮安鎭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까지 갔다. 태조가 여러 장수에게 “전투가 불리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이오?”라고 의논하니, 대상(大相) 공훤(公萱)과 홍유(洪儒)는,
“전세가 불리하게 될 경우 죽령(竹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이의 고개)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니, 미리 사잇길을 마련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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