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 홧김에 6400명을 죽이고 1년 동안 진주를 지배한 정방의

 이성계의 조상과 관련되어, 호족이 관과 충돌하였다고 1백 호가 넘는 백성이 따라서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길 수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아, 고려조에 지방호족과 관이 충돌하여 대규모 유혈사태를 일으킨 일화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고려조에는 어느 한 가문을 멸족시킬때 주변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받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의민의 경우도 그렇고요.

고려 무신 정권하에 진주의 호족 정방의가 관과 충돌하여 백성 6400명을 죽이고
1년 동안 진주를 지배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건 개요

1. 1200년 4월 진주에서 노비 반란 발생 
   → 노비들 지역 관리, 호족 가옥 50 채 파손, 화재
   → 향직인 창정(倉正) 벼슬의 정방의(鄭方義) 집도 이때 화재로 소실, 
      창정은 중앙군의 9품 교위 정도, 현재로 따지면 중위급 계급임

2. 정방의 노비들을 진압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관에 들어감

3. 관아의 8품의 관리인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만남

4. 전수룡이 무기를 휴대한 정방의를 의심하여 옥에 가두고 고문함

5. 정방의가 결백을 호소하자 전수룡이 풀어줌

6. 3품 지방장관인 진주 목사(牧使) 이순중(李淳中)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정방의를 옥에 가두고 고문하려 함

7. 정방의의 동생 정창대(鄭昌大)가 옥에 난입해서 정방의를 데리고 나감

8. 정방의+정창대 불량배를 모아 고을을 돌아다니며 주변 백성 6400명을 학살함

9. 목사 이순중 이 소식을 듣고 무서워 관아문을 잠금

10. 정방의 고을의 은병을 모아 개경의 무신정권 실력자들에게 뇌물을 보냄

11.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 진주 순시 중 이번 사태 발견

12. 진주 관리들 정방의가 무서워 죄를 진주목사 이순중에게 돌림

13. 이순중 파면, 섬으로 귀양

14. 4개월 후 조정에서 파견된 소부감 조통(趙通)과 중랑장 이당적(李唐績)이 진주에 도착

15. 정방의 사병 훈련, 조통과 이당적에게 절도 하지 않음

16. 조통, 이당적 아무것도 못하고 돌아감

17. 정방의에 피해를 당한 진주인 20명이 협주(陜州/합천)의 강성한 도적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의 본거지
    노올부곡(奴兀部曲)에게 의탐함

18. 광명, 계발 군사를 동원해 정방의를 공격할 계획 수립

19. 정방의 사병을 동원해 광명, 계발을 선제공격하여 노올부곡 도적을 모두 죽임

20. 다음 해 1201년 3월 진주성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정방의를 죽임

21. 정창대가 200 명을 데리고 성을 공성함

22. 진주인이 반격하니 정창대 도주


고려사절요 신종 3년 1200년 4월 기사中
○ 진주의 공사(公私) 노예가 떼를 지어 난리를 일으켜서 주리(州吏)의 집 50여 호를 무찔러 불사르고, 불이 번져 창정(倉正) 정방의(鄭方義)의 집까지 태웠다. 주리가 목관(牧官)에게 알려서 뒤쫓아 잡으니, 방의가 손에 활과 화살을 쥐고 들어와서 사록(司錄) 전수룡(全守龍)을 보았다. 수룡이 힐문(詰問)하기를, “어째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절하느냐. 네가 반드시 난리를 일으킬 것이로구나.” 하면서 곧 고문을 가하니, 방의가 다른 뜻이 없다고 자백하므로 놓아 주었다. 목사(牧使) 이순중(李淳中)이 이 소식을 듣고, 방의에게 착고를 채워 옥에 가두었다가 그 이튿날 다시 국문하려고 하는데, 방의의 아우 창대(昌大)가 갑자기 뜰에 뛰어들어와서 방의에게 채운 착고를 벗겨 버리고 부축하여 나갔다. 이어 불령배(不逞輩)를 불러 모아 고을에 마구 뛰어다니면서, 평소에 원수진 자 6천 4백 명을 죽였다. 이에 순중 등이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나오지 않으니, 방의가 영(令)을 위협하여 사무를 보게 하였다. 조금 후에 방의가 고을 안의 은병(銀甁)을 많이 거두어서, 서울의 세력있는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그 죄를 면하려 하였다. 안찰부사 손공례(孫公禮)가 관내를 순시 하다가 진주에 와서 안문(按問)하니, 이민(吏民) 가운데 방의를 두려워하는 자가 많아서 모두 말하기를, “방의는 죄가 없습니다.” 하므로, 순중이 마침내 죄를 받아 초도(草島)로 귀양갔다.

고려사절요 신종 3년 1200년 8월 기사中
○조통 등이 진주에 이르니 방의의 포학한 기세가 매우 성하므로, 조통 등이 어찌할 줄 모르고 다만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합주(陜州 경남 합천)에 광명계발(光明計勃)이란 적(賊)이 있었는데, 또한 세력을 부리어 한 지방의 큰 해가 되었다. 방의와 원수가 된 진주 사람 20여 명이 합주(陜州)의 적(賊)에게 가서 의탁하고, 군사를 청하여 방의를 치고자 하니 적이 그 말을 따랐다. 그들이 진주에 이르니 방의가 나가 쳐서 이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올부곡(兀部曲)까지 이르러 그 무리들을 다 죽였다.

고려사절요 신종 4년 1201년 3월 기사中
○ 진주 사람이 정방의를 목베었는데, 그 아우 창대(昌大)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성에 오르므로 고을 사람이 이를 치니, 창대가 도망가고 그 무리들도 흩어졌다.


고려사 반역열전 정방의 中
정방의는 진주 사람이다. 신종(神宗) 3년에 진주의 전체 공(公), 사(私), 노예들이 성군 작당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그 고을 아전의 집 50여 호를 불 태웠는데 정방의의 집도 연소되었다. 그래서 고을 아전이 목관(牧官)에게 고하고 추격해서 반란자들을 체포했다. 그때 정방의는 손에 활과 살을 가지고 관아에 들어가서 사록 전수룡(全守龍)에게 현신하니 전수룡이 힐문하여 말하기를
󰡒무슨 까닭에 활과 살을 가지고 와서 절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제가 적의 괴수를 생포하려 하였더니 다른 사람이 이미 생포하였으므로 들어와서 축하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전수룡은 말하기를
󰡒아니다! 네가 활과 살을 가졌으니 역시 틀림없이 반란하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 즉시 고문하였으나 별반 혐의가 없으므로 석방하였더니 태수 이순중(李淳中)이 말하기를
󰡒정방의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 것이 틀림없는데 사록이 석방한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고 드디어 항쇄 족쇄를 채워서 옥에 가두고 그 다음날 다시 국문하려 하였더니 정방의의 아우 정창대(昌大)가 돌입하여 항쇄 족쇄를 벗기고 부축하여 나갔다. 이를 계기로 하여 뭇 불평분자들을 모아서 주 내의 마을들을 습격하고 평소에 원한을 품고 있었던 자들을 죽였는데 이와 관련되어 살해당한 총수가 무려 6천 4백 명에 달했다. 그래서 이순중 등이 무서워서 문을 걷어 닫고 나오지 않았으나 정방의가 협박하여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정방의는 읍내(邑內)에서 은병을 많이 거두어 들여 조정의 권세 있는 고관에게 뇌물을 주고 죄책을 모면하고 있었다.
안찰 부사(按察副使) 손공례(孫公禮)가 순찰하다가 진주에 이르러 이에 대하여 조사하였는데 고을 아전과 주민들은 정방의가 무서워서 모두 그에게는 죄가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결국엔 이순중이 죄를 지고 초도(草島)로 귀양 갔다.
왕이 소부감 조통(趙通)과 중랑장 당적(唐績)을 파견하여 진주를 안무하게 했는데 그때 정방의는 병정을 훈련하고 생살을 마음대로 하여서 그 포악한 기염이 대단히 성하였는데 조통 등이 와도 절하지 않고 다만 공수(拱手)할 따름이었다.
당시 협주(陜州)의 적 광명(光明)과 계발(計勃)이도 또한 크게 성하여 한 지방의 큰 해독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주 사람으로 정방의와 사이가 나쁜 자 20여 명이 협주로 가서 도적 무리들 속에 들어 노올 부곡(奴兀部曲)에 거주하였다. 그들의 군사를 빌어서 정방의를 공격코자 하니 적이 허락하였다. 정방의가 나가서 그들을 격퇴하고 그 승리를 이용하여 노올부곡까지 가서 그 무리를 모두 다 죽여 버렸다.
다음해에 진주 사람들이 정방의를 토벌해서 죽였으며 정창대가 2백여 명을 인솔하고 성(城)으로 올라간 것을 진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므로 정창대는 도망 갔고 그 무리는 흩어져서 진주가 평온해졌다.

고려판 수호지? 
(10년 전에 제가 인터넷상에 이 일화를 소개해 드리면서 썼던 제목이 [고려판 수호지 정방의]였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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