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가 간합니다. 이 반동질 하는 간나 땡중!!

 고려 말에 귀족들의 서신을 받아 땡중과 무뢰배들이 민가를 돌아다니며,

<귀족님께서 쌀 좀 빌려 간다> 며, 
쌀 한말을 빌린다고 해놓고 쌀 한섬, 즉 한가마니를 통째로 가져간다고 합니다.
이걸 반동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동북면 군대의 군량은 조정에서 대주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로 있던 
1383년 경에는 함경도에서 자체적으로 조세를 거둬 군량으로 삼았나 봅니다.
헌데, 백성들이 가난한데다 땡중들이 권세가의 힘을 빌려 더욱 쥐어짜니 
군량이 나올 데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여 이성계가 조정에 여러 가지 방책을 건의하게 됩니다.


고려사절요 1383년 8월 기사中
군사의 생명은 양식에 달려 있으니, 비록 백만 군사가 있다 할지라도 하루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하루의 군사가 될 수 있고, 한 달 동안의 식량이 있어야 한 달의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하루도 먹는 것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도의 군사에게는 과거에는 경상ㆍ강릉ㆍ교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공급하였는데, 지금은 도내의 지세(地稅)로 이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근래에 수재ㆍ한재로 인하여 관청과 민간이 모두 텅 비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과 무뢰배들이 불사를 칭탁하여 함부로 권세가의 편지를 받아서, 각 고을에 간청하여 백성에게 쌀 한 말과 베 한 자를 꾼다고 하고는 섬곡식과 10여 자의 베를 거두는데, 명목을 '반동(反同)'이라 하여 징수하기를 빚받아 내는 것처럼 하니, 백성들이 이때문에 기한에 시달리고, 또 여러 관청과 여러 원수(元帥)가 보낸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이집저집에서 돌려 가며 먹어서 살을 깎아 내고 뼈를 망치질하듯 하니, 백성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흩어지고 도망치는 자가 열에 여덟, 아홉입니다. 그리하여 군사의 식량이 나올 데가 없으니, 모두 금하여 없애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옵소서.
또 도내의 고을들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서 땅이 좁고 또 척박한데, 지금 그 세를 거두는 것이 경작하는 토지가 많고 적은 것은 묻지 않고, 오직 호구가 크고 작은 것만을 보아서 책정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넓고 풍요한데, 모두 아전들의 녹전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거두지 못하므로, 백성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은 족하지 못하오니, 금후로는 도내 여러 고을과 화령을 모두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준하여 과세함으로써 관청이나 민간이 다 편하게 하옵소서.


동사강목 1383년 8월 기사中
군사의 명맥(命脈)은 군량에 달려 있습니다. 본도(本道)의 군사는 전에 경상도(慶尙道)와 강릉(江陵)ㆍ교주(交州)의 곡식을 운반해서 주었으나 지금은 도내의 지세(地稅)로 대체하였는데, 근래의 수재와 한발로 인하여 공사(公私)의 곡식이 모두 바닥이 났습니다. 거기다가 놀고 먹는 중[僧]들이 불사(佛事)를 칭탁하고 권세가의 서장(書狀)을 외람되게 받아서 주군에 청(請)하여 백성들에게서 쌀과 베를 빌면서 ‘반동(反同)’이라 부르는데, 거두기를 마치 포흠(逋欠)이나 빚 받듯이 합니다.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가 파견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다니면서 밥을 먹고 있어 백성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흩어져 도망하니, 군량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일체 엄금하소서.
도내의 주군이 산과 바다에 끼어 있어 땅은 좁고 또 메마릅니다. 이제 그 조세를 농지의 다소를 따지지 않고 호구(戶口)의 크고 적음만 보고 매깁니다. 화령(和寧)은 도내에서 땅이 가장 넓어 부요(富饒)한데 모두 이민(吏民)의 녹전(祿田)이어서 그곳의 지세는 관청에서 받아들이지 못하여, 백성들에게서 받아들이는 것이 고르지 못하며 군사를 먹이기에 부족합니다. 이후부터는 한결같이 경작하는 토지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세금을 매겨 공사(公私)에 편리하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中
1. 군사[師旅]의 생명은 군량에 매여 있으니, 비록 백만의 군사라도 하루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하루의 군사가 되고, 한 달의 양식이 있어야만 그제야 한 달의 군사가 되니, 이는 하루라도 식량이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도(道)의 군사는 예전에는 경상도(慶尙道)·강릉도(江陵道)·교주도(交州道)의 곡식을 운반하여 공급하였으나, 지금은 도내(道內)의 지세(地稅)로써 이를 대체시켰는데, 근년에는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로 인하여 공사(公私)가 모두 고갈되었고, 게다가 놀고 먹는 중[僧]과 무뢰인(無賴人)이 불사(佛事)를 핑계하고서 함부로 권세 있는 사람의 서장(書狀)을 받아서 주군(州郡)에 청탁하여, 백성들의 한 말[斗]의 쌀과 한 자[尺]의 베를 빌린다고 하고는, 섬[甔石]이나 심장(尋丈)으로써 거둬들이면서 이를 반동(反同)이라 명칭하며 바치지 아니한 빚[逋債]처럼 징수하여, 백성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게 되었으며, 또 여러 아문(衙門)과 여러 원수(元帥)들의 보낸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며 기식(寄食)하여 백성의 피부를 벗기고 골수를 쳐부수니, 백성이 고통을 참지 못하여 처소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십상팔구(十常八九)이니, 군량(軍糧)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 원컨대, 모두 이를 금단(禁斷)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소서. 또 도내(道內)의 주군(州郡)은 산과 바다 사이에 끼여서 땅이 좁고도 척박한데, 지금 그 지세(地稅)를 징수하는 것이 경지(耕地)의 많고 적은 것은 묻지고 않고 다만 호(戶)의 크고 작은 것만 보게 됩니다. 화령(和寧)은 도내(道內)에서도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모두 이민(吏民)의 지록(地祿)인데도, 그 지세(地稅)는 관청에서 거둘 수가 없게 되어,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균등하지 못하고, 군사를 먹이는 것이 넉넉하지 못하니, 금후(今後)로는 도내(道內)의 여러 주(州)와 화령(和寧)에 한결같이 경지의 많고 적은 것으로써 세(稅)를 부과하여 관청과 민간에 편리하게 하소서.


이성계 曰 <이 반동이나 걷는 땡중 간나 새끼 때문에서리 그기 군량도 없지않슴둥>

한줄요약하시는 짝다리 동관님의 말씀!



p.s) 지금의 함경도 사투리라는 것이 조선의 4군 6진 개척 당시 경상, 강원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경상+강원+여진 사투리가 혼합되었다고 하던데요. 특히나 경상도 사투리가 많이 섞였다고 하더군요.
     헌데 공민왕 이후, 당시 동북면은 갓 함락한 함주 즉 함흥 일대를 중심으로 최대 북청까지 수복하였는데
     그렇다면 당시 함흥에 있던 고려 주민들의 방언은
     강원도 북부(원산~의주) 사투리 + 함흥에 거주하던 고려인 사투리 + 여진 사투리일 듯싶은데,
     그렇다면 고려 말 진짜 함경도, 실상 함흥 사투리는 지금과 많이 달랐을 듯싶네요. 아님 말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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