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가존(折可存)은 저번에도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요, 북송 말의 무장 가문
절가(折家) 출신의 무장입니다.
지난 1939년에 묘지명이 발견되어, 북송 말 당시 단순히 도적으로만 기록되어
조정에 투항한 것으로 기록된 송강이
소설 수호지와 같이 조정에 투항한 후 방랍의 난 평정에 참전하였으며,
방랍을 사로잡은 동관이 중앙군을 이끌고 개봉성에 입성할 당시에
휘종의 친필 조서를 받은 절가존이 즉각 군을 돌려 송강을 잡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난리?가 난 모양이더군요.
묘지명의 일부 번역은
수호지 송강(宋江) 토사구팽설 [동명이인설 반박도 포함됨] http://cafe.naver.com/booheong/87138
묘지명 원문 송고무공대부하동제이장절공묘지명 http://tc.wangchao.net.cn/baike/detail_905918.html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절가존은 아직 제가 송사에서는 보질 못하였습니다.
다만 정강패사전증과 삼조북맹회편에는 몇몇 기록이 있어 번역해 보았습니다.
더불어 2차 개봉 포위전에서 금이 윤 11월 중에 요구한 인질과,
실제 송이 보낸 인질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더군요.
절가존은 가족을 인질로 내놓는 선에서 해결되었더군요.
이미 절씨 가문에서 절언실(折彥實), 절가구(折可求)가
일명 나쁜놈? 으로 지목돼 인질로 끌려가게 되어, 절가존은 면죄?를 받은 게 아닌가 싶네요.
이미 절가존은 이해 가을 전쟁에서 금에 사로잡혔다가 탈출한 전력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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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패사전증(靖康稗史箋證) 1126년 윤11월 13일 기사中
靖康元年閏十一月十三日與宋主書後有取干戾人劄子,錄於下:
정강(靖康) 원년(元年) (1126년) 윤(閏) 11월 13일에 송주(宋主/흠종)가 (금이) 요구한 여인(戾人/어그러진 자, 나쁜 사람)을
유취(有取)한 후에 서신과 함께 차자(劄子/상소, 공문서)하니, 아래와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었다.
取干戾人劄子
취간(取干/요구하여 취한) 여인(戾人/나쁜 놈)의 차자(劄子/문서)
童貫(有子師楊、師孔等)
蔡京、蔡攸
王黼
李綱
李彌大
劉韐
王安中
馬擴
詹度
陳遘
吳敏
徐處仁
折彥實
折可求
呂仲
張孝純
王稟
已上干戾人數。
동관(童貫) [아들이 있는데 사양(師楊)과 사공(師孔) 등이다]
채경(蔡京)과 채유(蔡攸)
왕보(王黼)
이강(李綱)
이미대(李彌大)
유겹(劉韐)
왕안중(王安中)
마확(馬擴)
첨도(詹度)
진구(陳遘)
오민(吳敏)
서처인(徐處仁)
절언실(折彥實)
절가구(折可求)
여중(呂仲)
장효순(張孝純)
왕품(王稟)
이상(已上)은 요구한 여인(戾人/나쁜놈)의 수(數)다.
滕茂實
范直方
李嗣本
蔡靖
高世由
已上本身或有兄弟在本朝,取家屬團聚。
등무실(滕茂實)
범직방(范直方)
이사본(李嗣本)
채정(蔡靖)
고세유(高世由)
이상(已上)은 본신(本身/본인)이나 혹(或)은 형제(兄弟)가 본조(本朝/금나라)에 있어,
가속(家屬)을 취(取)하여 단취(團聚/하나로 모음)한다.
趙良嗣(并眾房伯叔兄弟,元係北人)
折可存(係歸降逃走)
又右班殿直張觀、東頭供奉官楊忠敏(自身)、張謙、張冀、將領長行軍二十餘人、八月內走。(係忠順軍)
조양사(趙良嗣) [집안의 백숙(伯叔/백부와 숙부)과 형제(兄弟)의 무리를 모았는데, 원래 국적은 북인(北人)이다.]
절가존(折可存) [귀항(歸降/항복하여 귀순함)하여 묶여 있었는데 도주(逃走)하였다.]
또 우반전직(右班殿直) 장관(張觀)과 동두공봉관(東頭供奉官) 양충민(楊忠敏[자신(自身/문서를 올리는 자기자신)]과
장겸(張謙) 및 장기(張冀)와 장행군(長行軍)의 장령(將領/장수) 20여인과 8월 내에 도주한 자들이다.
[충순군(忠順軍)에 묶여있다.]
→ 금이 나쁜놈 동관, 채경 등 18인을 요구, 또한 등무실 등 5명은 가족을 인질로 내놓을 것을 요구
또한 요에서 넘어간 조양사와
전쟁에서 사로잡혀 귀순하였다가 다시 도주한 절가존
그리고 지난 8월에 도주한 장관, 양충민 등 20여인을 요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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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패사전증(靖康稗史箋證) 1126년 윤11월 28일 기사中
靖康元年閏十一月二十八日,宋遣秦檜、李若水求和,二帥諭須上皇、皇子出質,
別差近上官,與已畫定州、府、軍、縣長官血屬各一人,往同交割,
并將干戾人童貫、蔡京、蔡攸、王黼、李綱、李彌大、劉韐、王安中、馬擴、詹度、陳遘、吳敏、徐處仁、折彥實、折可求、
呂紳、張孝純、王稟,及歸朝人滕茂實、范直方、李嗣本、蔡靖、高世由、趙良嗣、折可存、張觀、楊忠敏、張謙、
張翼等家屬交出。
정강(靖康) 원년(元年) (1126년) 윤(閏) 11월 28일에, 송(宋)이 진회(秦檜)와 이약수(李若水)를 보내 화친(和親)을 구(求)하니,
두 장수를 타일러 결국 상황(上皇/휘종)과 황자(皇子)를 출질(出質/인질로 내놈)하였고,
따로 가까운 상관(上官/대신)에 차이를 두어, 이미 획정(畫定)한 주(州)와 부(府) 및 군(軍)과 현(縣)의 장관(長官)의
혈속(血屬/가족) 각 1인과 함께, 교찰(交割/인계)하여 (인질로) 왕동(往同/함께 감)하였고,
아울러 장차 여인(戾人/어그러진 자/나쁜 놈)
동관(童貫), 채경(蔡京), 채유(蔡攸), 왕보(王黼), 이강(李綱), 이미대(李彌大), 유겹(劉韐), 왕안중(王安中), 마확(馬擴),
첨도(詹度), 진구(陳遘), 오민(吳敏), 서처인(徐處仁), 절언실(折彥實), 절가구(折可求), 여신(呂紳), 장효순(張孝純),
왕품(王稟)을 요구하였고,
더불어 귀조(歸朝/귀국)한 사람인 등무실(滕茂實), 범직방(范直方), 이사본(李嗣本), 채정(蔡靖), 고세유(高世由),
조양사(趙良嗣), 절가존(折可存), 장관(張觀), 양충민(楊忠敏), 장겸(張謙), 장익(張翼) 등이
가속(家屬)을 교출(交出/내놓음)하였다.
→ 금에서 화친 협상을 온 진회와 이약수에게 휘종과 황자들을 인질로 끌고 가기로 강압적으로
확정하였고, 금에서 보았을 때 나쁜 놈들인 동관, 채경 등 18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며,
등무실 등 11인은 가족 중에 인질을 1명씩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네요.
관련된 절(折)씨는 절언실(折彥實), 절가구(折可求), 절가존(折可存)이네요.
절가존은 인질만 내놓고 금에 끌려가는 명단에는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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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기사中
(중략)不從但轉頭南向呼官家者數聲曰
臣力弱不能翦滅此賊以報國恩至死聲始絕餘官吏俱被害
獨折可存路志行得免其家沒入於虜(改作敵)後詔述公忠烈付史館。
따르지 않고 오직 남쪽을 향하여 전두(轉頭/고개를 돌림)하여 관가(官家/관리) 수 명이 부르짖으며 소리치며 말하기를
신(臣)의 힘이 약하여 이에 적(賊)을 전멸(翦滅/제거하고 멸함)이 불능(不能)하니
국은(國恩/나라의 은혜)에 보답(報答)하고자 합니다.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목숨이 남아 있는 관리(官吏)들이 소리치고 모두 피해(被害)를 당하였다.
홀로 절가존(折可存)만이 지행(志行/품은 뜻과 행실)하니 그 가문(家門)이 포로(捕虜)에서
몰입(沒入/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속은 종으로 사로잡힘)을 득면(得免)하였다. [적(敵)이 개작(改作/바꿔 지음)하였다]
후조(後詔)하여 공(公)을 충렬부사관(忠烈付史館)으로 서술(敍述)하였다.
→ 절가존이 항복하는 장면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후 항복하였다가 탈출하고 2차 개봉 포위전에서
개봉성에 있으면서 가족을 금에 인질로 보내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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