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스스로 후고려라고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기록

 통상적으로 후고려(後高麗)는 평양의 고구려(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가 처음 세운 철원의 후고구려(後高句麗 901~904)를 뜻합니다.

특히나 고려에서는 [고려]와 [궁예의 후고구려]를 동일시 하지 않을려고 하였는지, 
대부분의 기록에서 궁예의 후고구려라고 표현하였지요.

간혹 특이한 기록이 있긴한데, 삼국유사에서는 후고려 궁예 後高麗 弓裔 라고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유사中
후고려(後高麗) 궁예(弓裔)가 대순(大順) 경술(庚戌)에 처음엔 북원(北原)의 적(賊) 양길(良吉)의 진영에 투항하였다


이후 후고려(後高麗)의 기록은 조선조에 간혹 보입니다.

동국여지승람 서문 中 
궁예(弓裔)는 철원(鐵原)에 웅거하여 후고려(後高麗)라 칭하고


일본은 개경의 고려를 후고려라고 칭하기도 하였습니다.

해동역사 中 일본기록 소개
양안상순(良安尙順)이 말하기를, “왕씨(王氏)는 제호천황(醍醐天皇) 연희(延喜) 18년(918, 태조1)에 왕이 되어서 태조라고 칭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후고려(後高麗)라고 하였다. 삼한을 통일한 뒤로는 모두 조공을 끊었다.
[고려마저도 조공을 해왔다고 하는 일본기록 -_-;]

헌데 고려초 광종조에 고려를 후고려라고 기록한 금석문이 있어 깜짝 놀랐습니다.


비문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 中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있는 일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여러 달이 지났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후고려(後高麗)가 사군(四郡)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이 정정(鼎正)됨에 이르러서 현덕(顯德) 원년(元年) 7월 15일에 태자산(太子山)에 이 큰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후고려가 사군을 평정하고

이 탑비는 917년에 지어졌으나 후삼국의 혼란상황에서 비문을 건립하지 못하다가 
954년 고려 광종의 명으로 태자사(경북 봉화군 태자산)에 건립되게 됩니다. 
윗부분은 이런 상황을 음기에 묘사한 글이지요.

고려를 스스로 후고려로 묘사한 고려의 유일한 기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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