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4년 궁예의 포악함이 날로 심해지자, 왕건은 전방 근무를 원하게 되지요.
당시 태봉 수군은 서해를 완전히 장악해 개경의 코앞인 정주와 목포 사이를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10년 동안 나주를 잃은 견훤은 틈만 나면 육군과 수군을 통해 나주를 회복하려 하였으나
왕건이 수군을 재정비해 돌아오자 감히 어떻게 하질 못 합니다.
903년부터 서해의 제해권을 잃어버린 견훤은 927년 말에 이르러서야 고려 수군을 격파하고 나주를 되찾게 됩니다.
이후 서해의 제해권을 되찾은 백제는 932년 개경의 코앞인 정주 등을 습격하여 고려 선박 100여 척을 불사르게 됩니다.
이후 935년까지 고려의 수군의 움직임이 전혀 없게 됩니다.
935년이 되어서야 유금필이 이끄는 수군이 나주를 되찾게 되고, 이를 통해 견훤을 고려로 데려올 수도 있었지요.
제 생각에는요, 903년 당시 양길을 격파하고 갓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 세력을 펼친 궁예에게
수군은 획기적인 전략이었을 듯싶네요. 돈이야 서해 연안 패서 호족들에게 물리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ㅎㅎ
창업 군주란게 이리저리 재기보단 막 나가는 경향이 있잖아요.
호족들의 힘도 약화시키고, 중앙군은 증가시키고.
일단 수군 결성에는 개성 호족 왕건과 정주 호족 유천궁이 주가 되었던 듯싶네요.
고려사에도 유천궁이 엄청난 부자였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또 배가 고장 나면 틈만 나면 정주에 가서 수리해 옵니다.
1백 척 가량을 수리할 수 있는 포구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왕건의 첫 번째 부인이 유천궁의 딸입니다. 기브앤테이크?
또 수군을 만들면 왕건에게도 이익이 되지요.
수군이야 거의 왕건의 사병들 아닙니까?
삼국사절요 914년 3월 기사中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을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아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니, 견훤 및 바다 위에 있는 여러 해적(海賊)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발동(發動)하지 못하였다. 왕건이 돌아와 궁예에게 주즙(舟楫)의 이로움과 응변(應變)의 방법으로써 고(告)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우리 여러 장수(將帥) 가운데에서 누가 왕장군(王將軍)과 견줄 사람이 있겠는가?"
하였다.
동사강목 914년 3월 기사中
춘3월 궁예가 다시 왕건을 보내어 나주를 진무하였다.
예는 수군의 장수가 천하여 족히 적을 위협할 수 없다고 하여, 건을 시중에서 해임하고 다시 수군을 거느리게 하여 정주(貞州) 포구에 나아가 전함 70척을 수리하여 병사 2천을 싣고 나주로 가게 하니, 백제 및 바다 위의 도적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감히 망동하지 못하였다. 건이 돌아와 주즙(舟楫)의 이로움과 변에 대응하는 방법을 아뢰니, 예가 기뻐하여 좌우에게 이르기를,
“나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구를 왕 장군에게 견줄 수 있겠는가?”
하고, 건을 백선장군(百船將軍)으로 삼았다.
삼국사절요 903년 기사中
○궁예(弓裔)가 왕건(王建)으로서 정기대감(精騎大監)을 삼아 수군[舟師]을 이끌고 서해(西海)에서 광주(光州) 지경(地境)에 이르러 금성(錦城) 등 10여 고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인하여 금성을 고쳐 나주(羅州)로 삼았으며, 군사를 나누어 방수(防戍)하게 하고 돌아왔다.
고려사절요 932년 9월~10월 기사中
○ 9월에 후백제에서 일길찬(一吉飡) 상귀(相貴)를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禮成江)에 들어와서 염주(鹽州 연안(延安))ㆍ백주(白州 배천(白川))ㆍ정주(貞州 풍덕(豊德)) 세 고을의 배 1백 척을 불사르고, 저산도(猪山島)의 목마(牧馬) 3백 필을 빼앗아 돌아갔다.
○ 겨울 10월에 후백제의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 등이 대우도(大牛島)를 공격하여 약탈하였으므로 왕이 대광 만세(萬歲) 등을 보내어 이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이기지 못하니 왕이 이를 근심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이 곡도(鵠島)에서 글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으나 후백제가 우리의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장정을 뽑고 전함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니 임금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왕이 글을 보고 울면서 이르기를,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내가 밝지 못한 탓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어 불러와서 위로하기를, “경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원망한 적 없이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워 뉘우치고 있다. 그대의 후손 대대로 상이 내려지도록 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하겠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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