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최강의 강대국 초나라

 춘추전국시대라고 하면 분열의 시기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팽창의 시기라고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전까지 한정되어 있던 세상이 마치 계속 넒어지는 우주처럼 사방으로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은나라는 끔찍한 인신공양을 했던것으로 알려져있지만, 강(羌)족을 잡아 죽였다는 기록은 갑골 복사에 많이 있지만 만(蠻)족을 잡아서 인신공양에 썻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만족이 워낙 억세서 잡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남쪽까진 영향력이 안 닿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주나라(그러니까 서주西周)는 전성기였던 성왕과 강왕의 치세에 왕과 제후들이 적극적으로 팽창정책을 벌였다고 합니다. 은나라때는 사람을 잡아오려고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주나라는 땅이 가장 필요한 나라였습니다. 공신들에게 땅을 나눠주어야 했습니다.



활발한 정복 전쟁이 계속 벌어지면서 세상은 넒어졌고, 이제 주나라는 소왕 대에 이르러서 아직 땅이 넉넉한 남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남방 정책을 벌인 것이었는데, 동양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인 사마천의 사기에서 보면,
 
 
 
소왕은 남쪽으로 순수(巡狩)를 떠나다가 강위에서 죽었다. 그의 죽음을 꺼려 알리지 않았다.
 
 
 
순수라는 것은 주나라 천자가 틈이 나면 봉지를 둘러보면서 현지 사정을 보고 제후들에게 무력 시위도 병행하는것을 말합니다. 순수에 나섰던 소왕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소리인데, 정황을 보면 남쪽 정벌을 하다가 돌아오지 못했다는 느낌이 납니다. BC 977년입니다.
 
 
근거로 댈만한것은 훗날 BC 656년 소릉(召陵) 회맹이 벌어지기전 제나라와 초나라가 대립할때, 초나라의 대부 굴완(屈完)은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管仲)과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제나라는 북해에, 초나라는 남해에. 두 나라가 이리도 멀리 떨어져있어 말이나 소도 오가기 힘든데, 어찌 제나라의 군대가 여기까지 왔단 말이오?"
(여기서 유래된 말이, 서로 멀리 떨어져 관계가 없다는 뜻인 풍마우불상급(風馬牛不相及) 입니다.)
 
"주무왕의 아드님, 성왕께서 우리의 선군 강태공에게 말씀하시기를, '중국 전체의 제후들이여, 누구라도 왕실에 항거하는 자가 있으면 누구를 막론하고 너희 나라가 전담하여 물리쳐라' 고 하셨소이다. 당신네 초나라에서는 본래 남쪽 지방에서 나오는 포모를 조공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이를 수행하지 않았소. 또 있소이다. 성왕의 손자이신 소왕께서 물에 빠져 돌아가셨는데 이는 초나라의 잘못이오. 어떻게 답하겠소?"
 
"주 왕실이 쇠약해져 모두들 조공을 바치지 않은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초나라만의 잘못이겠소. 어찌되었건 잘못한 일이니 우리 주군께서도 그것은 알고 계시오. 그리고 주소왕의 일 말인데, 그 문제를 따지려면 한수 강가에나 물어봐야지 우리 주군에게 물을 일은 아닌듯 싶소."
 
 
 
이때를 보면 대략 주소왕이 초나라, 혹은 연관있는 존재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것을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간 그러면서 주나라의 남방 정책은 좌절되었습니다.
 
 
BC 5000년 ~ BC 4000년 경이라는 허무두 문화(Hemudu culture)등 장강 문명에 대한 이야기가 있지만 일단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楚世家)에서는, 전욱 고양(顓頊 高陽)의 후손이 초나라의 조상이고 전욱은 그 유명한 삼황 오제의 한 사람입니다. 전욱에서 4대를 건너가면 육종(陸終)이 있는데, 이 육종이 몸이 찢어지면서 여섯명의 아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중 막내가 계련(季連)이고, 미(羋) 씨 성을 쓰고 있었으니 미계련입니다. 이 사람이 초나라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진순신은 초나라는 삼묘(三苗)의 후예고, 전욱이 조상이라는것은 초나라에서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만들어낸 신화라고 하는데, 삼묘는 요 임금, 순 임금 이런 시절에 강(江)•회(淮)•형주(荊州) 쪽에 있었다는 민족입니다. 그러면서 순임금때 다 가만히 있는데 묘족만 날뛴다는 순 임금의 부하 우(禹)의 말과 순임금이 남쪽 순수 하다 죽었다는 이야기는 곧 삼묘와 대립 벌이고 토벌하려다가 죽었다, 라는 뜻이다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조상이 삼묘건 전욱이건 간에 주나라 문왕때 육웅(鬻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 후손이었습니다. 육웅은 자기 아들과 함께 주문왕의 편에 섰습니다.
 
 
及庸蜀羌髳微盧彭濮人아,
稱爾戈하며 比爾干하며 立爾矛하라 予其誓호리라


서경(書經), 목서(牧誓)에서 주나라가 이제 은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임전할 군사들에 대한 격려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용과 촉과 강과 무와 노와 팽과 북의 사람들아, 그대들의 손창을 들고, 그대들의 방패를 나란히 하며, 그대들의 긴 창을 세우고, 내 훈시를 하리라" 라는 말입니다.

저 중에 무(髳) 나라는 네이버에 검색을 하면, 산시성 남부에 있었다고 하는데 묘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은나라와 주나라의 목야 전투에서 힘을 합쳐서 싸웠겠죠.


육웅 이후에 대략 그 무리의 수장은 웅려(熊麗)고, 다시 웅려의 아들이 웅광(熊狂)입니다. 그리고 웅광의 아들이 웅역(熊繹)인데, 이때는 주나라 성왕 시절이었습니다. 그전부터 초나라 땅은 이 일족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주나라 건국했을때는 작위를 얻지 못하고 그때서야  초나라의 자작, 즉 초작(楚子)의 지위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초나라의 대략 계보를 잡으면 이렇게 되는 것이죠.

삼황 오제 전욱 고양 → 4대를 지남 → 육종 → 육종의 막내 아들 계련

→ 한참 지나 주문왕때 계련의 후손인 육웅 → 좀 뒤에 웅려 → 웅려의 아들 웅광 → 웅광의 아들 초작 웅역


주성왕때 드디어 자작에 봉해진 초나라지만, 당시 대접은 형편없었습니다. 주나라 천자가 회맹을 벌여 웅역에게 하는 말이 이랬습니다.


"넌 밖에 나가서 화롯불이나 지켜 색꺄."


형만(荊蠻), 남쪽 오랑캐가 어디서 까부느냐는 것이었고, 그래서 다른 제후들이 열심히 회맹을 하고 있을때 밖에서 망이나 보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화가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주소왕이 남쪽을 가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그렇고, 초나라는 그 시대 상황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급선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데다가 차별 대우까지 받았으니, 힘이 커질 수록 막나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웅역에 이어 여섯번째로 제후가 된 초나라의 웅거(熊渠)는 대략 BC 885년 ~ BC 878년쯤에 급기야 갑자기 왕을 칭하게 됩니다. 물론 아직 주나라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서주시대, 나중에 가면 왕의 칭호를 폐지하지만 그렇게 막나가는건 초나라 밖에 없었죠.



BC 770년 주나라의 수도가 견융(犬戎)에게 박살이 나고 동주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초반에는 아직 주나라를 생각해서 난리가 벌어지지 않았지만, 곧 분위기가 급변합니다.


이런 시대를 연것은 정나라의 정장공(鄭 莊公)입니다. BC 743년 즉위한 정장공은 BC 712년 허나라를 꼭두각시로 만들었고, 노나라와 송나라를 여러번 물리쳤습니다. 주나라 환왕은 이런 행패를 막기 위해  BC 707년 채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연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지만 정 장공은 이를 다 물리칩니다. 이로 인해 주나라의 위엄은 땅에 떨어진것이 재확인 되었습니다.



정나라가 이러할때 BC 740년 초나라에서는 웅통(熊通)이 웅역으로 부터 18대로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 웅통은 형과 그 아들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고, BC 704년 가만히 있는 주위의 소국 수(隨)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아니, 우리 나라는 그쪽과 아무 원한도 없는데 왜 쳐요?"

"나는 남쪽 오랑캐인데, 요즘 제후들을 보니 버릇없이 맨날 싸우기만 한다. 내가 좀 군대가 있으니 니가 가서 내 작위를 높여주라고 말해라."


주나라의 국성은 희(姬) 씨인데, 수나라도 마찬가로 희씨로 친적관계에 있었습니다. 수나라는 살기 위해 주나라에 이 이야기를 전했지만, 정 장공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환왕은 화를 내며 거부했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내가 알아서 왕 하지 뭐."


그러면서 초무왕(楚武王)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나라를 속국으로 삼아버렸는데, 북쪽 깡패 정나라에 시달리던 주나라는 남쪽 깡패 초나라에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일들은 춘추 시대 초기, 주나라의 떨어진 권위를 사방에 알리는데 역할을 해버렸습니다. 참고로 초무왕이 바로 화씨지벽 이야기의 왕입니다.


초나라는 남쪽의 광대한 영토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자신감이 드높았고, 이때를 기점으로 춘추의 최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BC 690년에는 초문왕(楚文王)이 수도를 영(郢)으로 옮기고, BC 684년에는 식나라를 멸망시켰고 채나라를 무너뜨렸으며 등나라도 함락시키는등, 주변 소국들을 개패듯이 두들기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초나라가 깡패놀이를 하고 있을때, 북방에서는 명재상 관중을 앞세운 제나라 제환공이 대두하고 있었습니다.



BC 683년, 제나라와 노나라는 전쟁을 벌이고, 노나라 장군 조말(曺沫)은 계속해서 패배하게 됩니다. 노 장공은 하는 수 없이 땅을 떼어주기로 하고 회담을 청했는데, 조말이 이 자리에서 제 환공을 상대로 칼을 겨누고 협박, 떼어주기로 한 땅을 전부 되돌려 받습니다.

제 환공도 사람인지라 억울 해서 다시 땅을 가져오려고 했지만, 관중의 충고에 그만두었고 제 환공이 신의를 지켰다는 명성이 전 중국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결국 BC 679년, 지금의 산동성 지역인 견(甄)에서 제환공의 주재 아래 수많은 제후들이 모여 그 이름을 드높았습니다.



춘추오패는 잘 알려져 있는데, 최후의 두명은 이견이 많지만 제환공과 진문공은 아무도 이견이 없습니다. 한서에서만 빠졌을뿐, 초 장왕도 거의 확실합니다. 그리고 제환공과 진문공을 패자로 만든 가장 큰 공적은, 바로 초나라의 북상을 저지해낸 것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거의 절제도 없이 패기로운 모습을 보이며 이제 중원으로 올라오려는 초나라. 만일 제후들에게 모두 인정을 받고 패자로 되려면, 이 초나라로부터 중원을 수호해야 했습니다. 패자를 맹주로 한 대초연합의 모습이었습니다.




BC 656년, 제환공은 송, 노, 진, 위, 정, 허, 조를 끌어들여 무려 8개국 연합군을 결성, 초나라와 정면으로 대치합니다.  초나라도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내었지만, 무려 8개국이나 되는 군대는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굴완을 보내 회담을 진행시키는데, 바로 위에 있는 관중과 굴완의 회담이 그것입니다.


저렇게 회담을 한 후에도 관중은 안심할수가 없어 일단 군사의 위세를 보이기로 합니다. 강을 건너 초나라를 공격하자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관중은 위험부담이 크다면서 반대했기에 양군이 한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사이, 초나라는 다시 한번 굴완을 보내 사정하였습니다.


"우리 군주께서 죄를 뉘우치고 있으니, 군대를 물려 주시면 주나라 왕실에 조공을 하겠나이다."

제환공도 그러자 시원스럽게 응낙했습니다.

"그리하면 본인도 천자 앞에서 체면이 서지요."

이리하여 주나라 왕실에 보낼 조공품이 오자 8개국의 제후들과 굴완은 맹약을 맺었습니다. 사실상 초나라의 가장 큰 문제라면 왕을 참칭한것인데, 관중은 그 대신 포모를 문제 삼으며 초나라를 압박만 했습니다. 만약 초나라의 왕을 참칭한것을 문제 삼는다면, 전면전은 불가피했죠. 대신에 이를 피한것입니다.



초나라의 북방 진출이 제환공과 관중에 의해서 아주 잠시 제지당한 때, 초나라에 한명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진(晉)나라의 공자 중이였죠. 고국의 정치 문제 때문에 오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초성왕은 같은 제후의 예절로 중이를 대접하며 말했습니다.

"그대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소?"

"주옥, 비단, 상아, 공작의 털. 이런 물건들은 초나라에도 많으니,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보답하겠는가?"

아마도 이런 초성왕의 움직임은 중이를 후원해서 진나라의 땅을 얻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이지만, 중이는 여기서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 전쟁터에서 공을 만났다면, 군대를 삼사(三舍)로 물리겠습니다."

1사는 30리. 대략 36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망명객의 말에 초나라 장군 자옥은 화를 내며 죽여버리자고 했지만 초성왕은 거절했습니다.

"진나라의 공자는 어질고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나라의 뛰어난 신하다. 만약 하늘이 바야흐로 이를 흥하게 한다면, 누가 하늘을 거스르겠는가?"


그후 중이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왕이 되었는데, 바로 두번쨰 패자인 진문공이었습니다. 그때 초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송나라는 진문공이 떠돌이 생활을 할때, 전투에서 패배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대접을 해준 곳이라 은혜를 값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에 "차라리 초나라를 공격하는것보다는, 초나라의 속국인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 하는게 좋겠습니다." 라는 의견이 나와 진문공은 이를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이에 초성왕은 송나라에서 퇴각하려 했지만, 진문공을 전에 죽이려고 했던 장군 자옥은 이에 반대를 합니다.


초나라가 중원의 국가와 싸우면서 가장 큰 문제점은, 보급선이 길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길어지는건 매우 부담스러워 했죠. 송나라가 의외로 오래 버티자 깔끔하게 퇴각하려 했지만 자옥이 반대하자 그에게 일부 군사를 맡겼습니다.



BC 632년,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진문공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송(宋)·진(秦)·제(齊) 나라였고 초나라도 진(陳)·채(蔡)·정(鄭)·허(許)나라의 연합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진문공은 진짜로 군사를 뒤로 물려 이전의 약속을 지켰습니다.

실제 전투에서 초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의 중앙을 공격했으나, 결국 무너뜨리지 못했고 진나라 군은 초나라군의 좌우를 붕괴시켰습니다. 이에 자옥은 군사를 후퇴시킵니다. 성복대전의 패배로 초나라의 중앙 진출은 다시 한번 늦춰지고 만 것입니다. 이로 인해 진문공은 진정한 패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성복의 대전이 끝난 후 6년 뒤, 초성왕은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왕이 된 초목왕은 다시 근처의 강, 육나라 등의 작은 나라를 쓸어담으면서 전열을 정비하고 북쪽으로 또다시 올라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12년 뒤 초목왕이 죽자 초장왕이 즉위 합니다. 장왕은 제위하고 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고 합니다. 무려 3년을 이렇게 허송세월을 하며 보내고 있는데, 오자서의 할아버지인 오거가 나서서 왕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수수께끼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3년 동안을 전혀 날지도 울지도 않는 어떤 새가 있습니다. 이 새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초장왕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새는 한번 날아 오르면 하늘까지 이를 것이고, 한번 울면 만인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사람이 바뀐것처럼 명군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뛰어난 인물을 등용하고, 간신들을 주살했습니다. 초장왕에 대해서는 우맹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유쾌한 이야기가 사기 골계열전에 있지만, 뭔가 이 이야기와 합쳐서 보면 잘 아귀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간에 암군이었던 초장왕은 갑자기 각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야심에 찬 초장왕은 그것을 감추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주나라의 사신인 왕손만이 오자, 초장왕은 가만히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주나라에 구정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한번 우리 초나라로 가져와 보고 싶소. 무게가 어떻게 되오?"

구정은 전설에 따르면 하나라때부터 내려져오는 천자의 상징인 솥으로서, 이 말에 숨겨져있는 의미에 왕손만은 아연실색하여 필사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천명은 아직 바뀌지 않았소! 그런것은 묻는것이 아니오!"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소. 초나라엔 구부러진 창날은 꽤 있으니, 그것들을 모으면 구정 정도야 금방 만들 수 있겠지."


그 후 초장왕은 정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정장공 시절에는 막강했으나, 이시점의 정나라는 초나라가 북진할때마다 시달리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초나라에 항복하고 맙니다.

진문공 이후로 진나라는 초나라에 대항하여 북상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도 정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정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도착도 하기 전에 정나라가 항복을 했기에 분위기가 뒤숭숭했지만 싸움에 나섰습니다. BC 597년, 이것이 필의 전투입니다.


초장왕은 항복시킨 정나라 군사들을 앞세우고 직접 진나라 군대를 대파했습니다. 진나라 군사들은 허겁지겁 황하를 건너 도망쳤고, 배에 먼저 탄 병사들은 배에 매달린 병사들의 손가락을 잘라버리면서 까지 도망쳤다고 합니다. 이 대승으로 초장왕은 세번째 패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초장왕은 기세를 타서 송나라를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송나라가 결사적으로 버티자 또 실패하고 맙니다. BC 591년 초장왕도 사망합니다. 한편 진나라는 당분간 초나라와의 전쟁을 자제하며 힘을 다시 키우는데 여념이 없었고, 그 후 정나라를 공격합니다. 공격하는건 정나라되, 목적은 초나라의 세력을 꺾는 것이었죠. 초나라도 이에 대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와, BC 575년 언릉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또 초나라가 패했습니다. 초공왕은 눈에 화살까지 맞고 말았습니다. 춘추시대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주나라의 권위가 떨어지는 가운데 여러 제후들이 독립하고, 북진하는 초나라를 진나라가 저지했다." 라고 설명 할수 있을정도로 두 나라는 너무나도 격렬하게 대립했습니다.


이 가운데 죽어나는것은 정나라였습니다.


BC 546년 송나라는 이런 상황을 보다가 이 분위기를 좀 누그러뜨리기 위해 협정을 주재합니다. 미병 회담이었죠. 진나라와 초나라도 슬슬 지쳐가고 있었기에 손을 잡았고, 이후 40년간 자잘한 전투 외의 성복, 필의 전투 같은 대전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40년동안, 진나라는 내부에서 분열을 일으키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초나라로서는 그런 기회를 노려볼만도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말 갑작스레 나타난 오나라 때문입니다.



시간을 돌려, 강태공을 끌어들여 대업을 도모한 주문왕이 있었고, 다시 그의 할아버지가 고공단보(古公亶父)였습니다. 고공단보의 세 아들 ─ 곧 장남 태백(吳太伯), 차자 중옹(仲雍), 막내 계력(季歷) ─ 중에 누군가는 후계자가 되어야 했지만, 태백은 사양했습니다.

 "나보다 동생들이 훨씬 재질이 뛰어난데 어찌 내가 후계자가 된다는 말인가?"

그러고는 달아나 버렸습니다. 별수 없이 신하들은 두번째인 중옹에게 이를 제안했지만, 똑같았습니다.

 "나보다는 동생에게 군주의 그릇이 있소이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일을 감당 할수 없으니, 정 시키려고 하시거든 내 동생을 찾아가보시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끝에 막내 계력이 후계자가 되었고, 두 형들은 동생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멀리, 아주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아무 기록도 없다가, '사기'의 십이제후연표에서는 갑자기 BC 585년쯤에 뜬금없이 나타나 자신들은 중옹과 태백의 후손이고, 천자와 동성이라며 하는 것입니다. 주나라 왕실에서 봉한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들이 주위를 쳐서 알아서 영주가 되었던 것으로 중원에서 보자면 왠 오랑캐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초나라 사람 무신(巫臣)은 진(晉)나라에 망명하고, 다시 진나라에서는 무신을 오나라로 보내어 전차의 사용법등을 알려줍니다. 아직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나라인 오나라는 이때부터 남방의 초강대국 초나라의 배후를 노리기 시작합니다. 진나라에서, 초나라를 배후에서 한번 괴롭혀 보기로 한것이죠.


남방의 풍부한 물자와 사람들의 괄괄한 성미, 거기에 진 - 초의 대전으로 발전한 중원의 뛰어난 전쟁기술이 결합되자 오나라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해서 초나라를 괴롭힐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자서가 나타납니다...이 이야기를 굳이 여기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여하간 오자서는 합려를 도와 오나라를 욱일승천하게 만들었고, 그런 꼴이 날만큼 엉망이었던 초나라는 오나라에 완벽하게 유린당합니다. 춘추 시대를 통틀어 다른 나라들을 압도하던 초나라였기에, 이런 오나라의 모습은 엄청난 임팩트였습니다. 그때문에 합려를 춘추오패의 일원으로 보기도 할 정도였습니다.


초나라의 대신 신포서는 서쪽의 진(秦)나라에서 원군을 데려오고, 마침 오나라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 탓에 합려는 돌아가고 맙니다. 초나라는 오자서의 무서운 복수에서 간신히 멸망만을 피했지요.


오나라는 월나라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그런데 월나라의 멸망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느정도 세력이 약해지는가 싶더니, 초나라는 순식간에 월나라를 집어 삼켜버렸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보자면 오와 월을 흡수했으니, 초나라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진(秦)나라가, 그전의 모든 나라와 비교를 불허할정도로 강해지고 있었지요.



이제 시대가 춘추에서 전국으로 넘어가면서, 초나라의 가장 큰 라이벌 진나라는 삼진으로 분열됩니다. 삼진 중 하나인 위나라가 최강의 세력을 갖추었지만 제나라의 손빈에게 대패했고, 그 사이에 진나라는 위나라를 치며 중원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 그 후로 압도적인 국력을 갖추게 됩니다. 그 직전, 초나라에 손님이 한명 찾아옵니다.


오자병법으로 알려진 오기였습니다. 오기는 정치에서 변법을 시행하며 초나라에서 개혁을 벌였지요. 이로 인해 초나라는 다시 한번 국력을 쇄신하였으나, 이후 기득권 층에 반발을 사 오기는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의 변법은 모두 취소되었습니다. 이는 새로 떠오른 라이벌인 진나라의 혜문왕이 상앙을 죽인 후에도 변법은 유지해나간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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