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에 나타난 일리천 전투의 묘사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中

우리 태조대왕의 운세가 이흉(夷兇)들까지 미쳤고, 때는 난리를 평정할 시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양장(良將)에게 군의 통수권을 주어 백제군의 잔당(殘黨)인 교굴(狡窟) 과 적군이 숨어 있는 효소(梟巢)를 지적하여 낱낱이 탕하게 하였다. 육도삼략(六韜三略)의 기이한 모책과 남다른 책략을 펼쳐 진두의 북을 치니 산하가 우뢰처럼 진동하고, 선두의 깃발이 힘차게 휘날려 산천초목도 떨었다. 고려군인 아군(我軍)은 마치 새매와 같이 용감하였고, 적군들은 고기가 썩어 흩어지듯이 무너져 뿔뿔이 흩어졌으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주왕[紂王(폭군)]인 제신(帝辛)을 목야(牧野)에서 축출한 일과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초(楚)의 항우(項羽)를 오강(烏江)에서 패배시킨 것과 같다 하겠다. 바닷물을 말려 고래를 잡아내며, 숲 속을 샅샅이 뒤져 외뿔소를 잡아내듯 섬과 산에 숨어 있는 잔병을 모두 찾아 소탕하였으니, 전쟁의 암울한 구름은 사기(四紀), 즉 약 50년 동안이나 있었다. 적군은 깨끗이 소탕하여 남음이 없었다.

 

 

이흉(夷兇) : 흉악한 오랑캐

양장(良將) : 훌륭한 장수

교굴(狡窟) : 토끼굴, 적군의 소굴

효소(梟巢) : 올빼미둥지, 적군의 은신처

탕하게 하였다 : 소탕하였다.

 

 

 

고려사 936년 9월 기사中

전군이 북을 울리며 전진하자 갑자기 칼과 창처럼 생긴 흰 구름이 아군 위에서 생겨나더니 적진을 향하여 날아갔다.
(중략)

왕이 대장군 강공훤에게 명령을 내려 곧바로 중군을 치게 하고는 삼군이 일제히 진격하여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고려사절요 936년 9월 기사中

 이에 삼군(三軍)이 전고(戰鼓)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모양으로 된 흰 구름이 우리 군사 위에서 일어나 적진 쪽으로 향하여 갔다.

(중략)

왕이 공훤에게 명하여 바로 중군을 공격하게 하고, 삼군이 일제히 전진하여 양쪽에서 협격(挾擊)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동사강목 936년 9월 기사中

북을 울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칼과 창 같은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 군사 위에 일어나서, 적진을 향하여 퍼져나갔다.

 

 

전체적으로 압도적이였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압도적이지 않았다면 고려왕 왕건이 대군을 총동원 했을리는 없었을듯 합니다.

 

 

아래는 일리천 전투 1년후 건립된 태조와 관련된 금석문입니다.

 

서운사(瑞雲寺) 요오화상비(了悟和尙碑) 中

 

오관산(五冠山) 서운사(瑞雲寺) 화상(和尙)의 휘는 순지(順之)요, 속성은 박씨(朴氏)며, 패강(浿江) 사람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가업(家業)이 웅호(雄豪)하여 대대로변장(邊將)을 지냈는데, 마치 규화향일(葵花向日)처럼 충성스럽게 근무하는 호국(護國)의 아성일 뿐만 아니라 패강도호부(浿江都護府)에서 북방(北方) 변새(邊塞)를 수호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명장(名將)이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그리하여경사스러운 위대한 업적(業蹟)을 지방 곳곳에 남겼던 것이다.

 

(중략)

 

깊이 생각해 보건대 대왕전하(大王殿下)께서는 날마다 상서로움을 나타내시고 용안(龍顔)에는 경사스러움을 보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묘(妙)한 책략을 품었으므로

위급(危急)을 구하고 절망(絶望)을 소생시키는 영모(英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복된 명지(明地)를 얻어 (결락) 북궐(北闕)에 거존(居尊)하였고, 동명(東溟)에는 발자취가 두루 닿았다.
이 때 외역(外域)에서는 왕께 귀화(歸化)하는 공물을 올렸으며, 중화(中華)에서는 태조(太祖) 임금의 등극(登極)을 축하하는

사절이 오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서방(四方)으로부터는 도산(塗山)의 모임으로 찾아오고 삼천열국(三千列國)들이 함께 천토(踐土)의 동맹(同盟)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위력(偉力)을 갖추었으므로 암혈(岩穴)과 숲 속에 숨어있는 패잔병(敗殘兵)을 모두 소탕하였고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의 참모들인 전범자들을 모두 마진(馬津)에 몰아 놓고 문죄(問罪)하였다.

공손히 천명(天命)을 봉행하여 모든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한 손을 머리에 얹고 양을 이끌고 항복하여 오므로

모두가 평화롭게 농사지으면서 살게 되었다.


이로써 높은 영(靈)의 위력을 의지하고, 잠시 신용(神用)을 수고롭게 하여 먼저 원흉(元兇)의 악당들을 제거하였으니,

마치 위황(魏皇)인 조조(曹操)가 촉(蜀)나라 유비를 격멸한 것과 같다고 하겠다.

 

(결락) 오류(五流)의 형(刑)에 해당하는 죄인에게도 한결같이 사면령을 내려 석방하고 가택을 소유하게 하는 관용정치를 행하고, 백 가지의 일거일동 몸가짐을 오로지 정절(貞節)의 덕행으로 지켰으니,
이 모두가 숙세(宿世)로부터 조상(祖上)이 선인(善因)을 심었고, 선왕(先王)들이 음덕을 쌓았기에 그 자비의 인因이 후예後裔에게로 끼쳤으며, 그 복을 후손들이 입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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