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초창기의 대규모 원정군 동원 사례

 얼마후 서달을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에 배하고 상우춘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25만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취하게 하고, 태조는 친히 용강(龍江)에서 마제(禡祭)를 지냈다. 이 때 명장이라 칭하면 반드시 서달과 상우춘을 추천하였다. 두 사람은 재주와 용맹이 서로 비슷해, 모두 태조가 빼어나고 중하게 여겼다. 상우춘은 빠르고 신속하여 과감히 깊숙히 들어가고, 서달은 또한 모략에 뛰어났다. 상우춘은 성읍을 함락시키면 능히 주륙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나, 서달은 가는 곳마다 동요지 않고, 장사(壯士)를 붙잡으면 편안케 해주어 은의(恩義)로 맺으니, 자기를 위해 기용했다. 이 때문에, 많은 자들이 즐거이 대장군에 귀부하였다. ─ 명사 서달 열전



1366년 8월, 서달과 상우춘이 25만의 군세를 이끌고 북벌




홍무 20년 풍승을 명해 정로대장군(征虜大將軍)으로 삼아 영국공(潁國公) 부우덕, 영창후(永昌侯) 남옥을 좌,부우장군으로 삼아, 남웅후(南雄侯) 조용(趙庸) 등 보병과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정국공(鄭國公) 상무(常茂), 조국공(曹國公) 이경륭(李景隆), 신국공(申國公) 등진(鄧鎮) 등이 모두 따랐다. 황제가 다시 예전에 붙잡은 나하추의 부장(部將) 나리오(乃剌吾)를 보내 새서(璽書)를 받들고 가서 항복하도록 달래도록 하였다. 풍승이 송정관(松亭關)을 나와 대녕(大寧), 관하(寬河), 회주(會州), 부욕(富峪)의 네 성을 나누어 벽돌로 쌓았다. 대녕에 주둔하다면서 양월(兩月)을 넘는 한편, 병사 5만은 남겨두어 이를 지키도록 하고, 전 군대로 금산을 압박했다. 나하추가 나리오를 보고 놀라 말하길 "그대가 아직 살아 있었는가!" 라 했다. 나리오는 황제의 은덕에 관해서 말하였다. 나하추가 기뻐하며, 그의 좌승(左丞)과 탐마적(探馬赤) 등을 보내 말을 바치고, 또한 풍승 군을 엿보게 하였다. 풍승은 이미 깊이 들어가서 금산을 넘어 여직고둔(女直苦屯)에 이르러 나하추의 장수 전국공(全國公) 관동(觀童)을 항복시켰다. 대군이 갑자기 이르자, 나하추는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이로의 말로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 명사 풍승 열전


1387년 풍승, 부우덕, 남옥 등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나하추의 항복을 얻음



이 때 원나라 순제(順帝)의 손자인 탈고사첩목아(脫古思帖木兒)가 제위를 이어서는, 변새를 어지럽혔다.

홍무 21년 3월 남옥에게 명하여 군대 15만을 거느리고 이를 정벌하게 하였다. 대녕(大寧)을 나와 경주(慶州)에 이르러서는, 원주(元主)가 포어아해(捕魚兒海)에 있다는 것을 염탐해 알고, 샛길로 아울러 진군하여 백안정(百眼井)까지 이르렀다. 포어아해와 4리 떨어져 있었는데, 적을 보지 못하니, 귀환하고자 하였다. 정원후(定遠侯) 왕필(王弼)이 "우리가 10여만 군사를 이끌고, 막북(漠北) 깊숙히 들어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앖이, 갑자기 군대를 되돌린다면, (황제에게) 뭐라고 복명(復命)하시겠습니까?" 라 했다. 남옥이 "그렇소"라 했다.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땅을 파서 아궁이를 때워 연기와 불을 보이지 않게 하고, 야음을 틈타 포어아해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적의 영은 아직 포어아해 동북쪽 80여리에 있었는데, 남옥은 왕필을 선봉으로 삼으니, 질풍같이 내달려 그 영에 육박했다. 적들은 아군에 물과 풀이 모잘라 깊이 들어올 수 없을 거라 생각해, 방비를 하지 않았었다. 또 큰 바람이 불어 모래를 날려 낮이 밤같이 어두웠다. 군이 행군하였지만, 적은 알아채지 못하였다. 창졸간에 그 앞에 이르자, 크게 놀라, 맞아 싸웠으나, 적을 패배시켰다. ─ 명사 남옥 열전


1388년 3월 남옥이 15만 대군을 이끌고 북원 격파




8월, 천자가 경병문(耿炳文)을 대장군으로 삼아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게 했다. (생략) 대장군 부교(部校)인 장보(張保)가 와서 항복하였는데, 말하길 대장군의 군대는 30만이나, 먼저 도착한 것은 13만명이고, 반은 호타하(滹沱河)에 군영이 있고, 나버지 반은 하북에 영이 있다고 했다. 연왕은 북군과 싸우는 도중에 남군이 또 이 기회를 틈탈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장보를 풀어주고 돌아가서, 연왕의 군대가 또 도착했다고 떠벌리게 하여, 그 군대가 모두 북쪽으로 하수를 건너도록 유도했다. ─ 명사 성조 본기


1398년, 경병문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정난군과 대치



무인일, 이경륭이 병력을 합해 50만이 되자, 진군해 하간(河間)에 진영을 두었다. 연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길 "이경륭은 겉으로 엄격하나 속으로는 굶주리고 있어, 듣자하니 내가 있는 곳에 감히 급히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 하니, 가서 영평을 구원하고 그 군대를 모으는 게 낫다. 오고는 겁이 많아 전투에 임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가면 반드시 달아날 것이고, 그런 연후에 돌아와 이경륭을 공격할 것이다. 견고한 성이 앞에 있고, 대군이 뒤에 있으니, 반드시 성공하여 생포할 것이다"라 했다. ─ 명사 성조 본기


1398년, 이경륭이 50만 대군을 이끌고 정난군과 대치




1410년 3월 15일, 영락제가 병사 50만(퍼듀는 이게 과장이 확실하다면서, '최소한 병사 10만' 이라고), 수레 3만대를 이끌고 북으로 출정


1422년 4월 12일, 영락제가 병사 235,146명과 수레 117,573대, 당나귀 34만 마리를 이끌고 울란바타르로 진격




고려 말기 군대 동원에 관련된 부분을 보면,



以崔瑩(이최영) : 최영에게

兼海道都統使(겸해도도통사) : 해도 도통사(海道都統使)를 겸하게 하였다.

瑩白禑曰(형백우왈) : 영이 우에게 아뢰기를

臣任事旣多(신임사기다) : “신이 일을 맡은 것이 이미 많은데  

又都統海道(우도통해도) : 또 해도를 도통(都統)하면

臣恐不堪(신공불감) : 신이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且今戰艦纔百艘(차금전함재백소) : 또 지금 전함이 겨우 1백 척밖에 안 되며

戍卒僅三千(수졸근삼천) : 수졸이 겨우 3천 명입니다.

臣若行師(신약행사) : 만일 군사를 출동시킨다면

當用兵萬餘(당용병만여) : 1만 명은 써야 하겠는데

倉廩匱竭(창름궤갈) : 창고가 모두 비었으니

何以供億(하이공억) : 어떻게 공급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禑曰(우왈) : 우가 이르기를

備禦事劇(비어사극) : “방비하고 막는 일이 급하므로

不獲已(불획이) : 부득이

以卿兼之(이경겸지) : 경으로 겸하게 하는 것이니

其無固辭(기무고사) : 굳이 사양하지 말라.

且以吾國軍需(차이오국군수) : 또 우리나라의 군수(軍需)로써

餉萬餘兵誠難矣(향만여병성난의) : 1만여 명의 군사를 먹이기가 참으로 어려우니

請卿用三千(청경용삼천) : 경은 3천 명의 군사를 써서

使一當百(사일당백) : 한명이 백명을 감당하게 하라." 하였다.




당시 원정군이 아니라 내지에서 병력을 동원하는데 

왕이 일대백으로 싸우라고 발언



共三萬八千八百三十(공삼만팔천팔백삼십) : 모두 3만 8천 8백 30명이고

傔一萬一千六百三十四(겸일만일천륙백삼십사) : 심부름꾼이 1만 1천 6백 명이었다.



2차 요동 출정 병력 중에 실질적인 전력은 3만 8천 8백 30명. 요동 출정에 언급되는 지휘관들 면면을 보면 이건 당시 고려가 거의 나라 망할 지경이 되어서 추가 대규모 징집 하지 않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거의 한계치




募兵榜曰(모병방왈) : 모병(募兵)하는 방에

凡應募者(범응모자) : “모집에 응하는 자 중에

除私賤外(제사천외) : 사삿집 노비를 제외하고

士人鄕吏(사인향리) : 선비나 향리에게는

官之(관지) : 벼슬을 주고

宮司奴隷(궁사노례) : 궁(宮)ㆍ사(司)의 노예는

良之(량지) : 양민으로 삼든지

或賞錢帛(혹상전백) : 돈과 비단을 상주든지

隨其所願(수기소원) : 그들의 소원에 따르리라." 하였다.



이건 앞서 말한 나라 망할 지경이 되어서 대규모 징집 했던 홍건적의 난 당시 상황으로, 이렇게 20만을 모았고.







30만 동원했던 군단이 패배하자 곧바로 50만 동원했다는 언급이 나오고,



50만 동원했다는 원정이 과장이 심하다고, 그 과장을 빼었다는 군단이 10만이라고 언급되는 나라가 옆에 있는데, 

아무래도 친하게 지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편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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