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황제가 죽든 말든 풍악을♬~ 올려라♬ 의종

 때는 1161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이해만큼 평화? 로운 때가 없었습니다.

1년 내내 임금님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놀고~ 놀고~ 또 놀고~
이러던中 금나라에서 급변이 발생합니다.

본시 금 2대 황제 태종 오걸매 이후, 오걸매의 아들이 제위를 이은 것이 아니라
금 태조 아골타의 친손자인 완안단(完顔亶)이 3대 황제 희종(熙宗)이 됩니다.
헌데, 희종의 아버지는 아골타의 정실부인 소생의 적자인 종준(宗峻)으로 실상 5남이었고,
이에 비해 아골타의 장남인 종간(宗幹)의 아들은 완안량(完顔亮)이었지요.
제위 계승에 있어 적통으로 완안단이 인정되어, 
당시의 실권을 쥐고 있던 종한이 희종을 옹립한 것이었지요.
헌데 1149년 완안량이 희종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하고 4대 황제에 오르게 되지요.
완안량이 바로 폐황제 해릉왕(海陵王)이지요.
이러던 중 1161년 해릉왕이 전쟁을 반대하는 적모 도단씨를 죽이고 남송을 공격하였는데, 
거듭된 패배로 군심이 이반된 상태에서 동경유수였던 완안옹(完顔雍)이 황제를 선포하게 됩니다.
완안옹은 아골타의 3남인 종보(宗輔)/종요(宗堯)의 아들이었지요.
본시 아골타의 1남부터 5남까지 아들들의 모친이 모두 다릅니다.

완안옹이 황제를 선포하자, 당시 양주(揚州)에 있던 남벌군에서 반란이 일어나 해릉왕은 피살되어
완안옹이 정식 5대 황제 세종(世宗)이 되었는데, 
금 세종은 매우 현명한 군주로 금은 다시 한번 황금기를 누리게 되지요.

여하튼 1161년 이런 급보가 고려 조정에 보고되었는데
역시 의종 폐하께서는 오늘도 노시고~ 내일도 노시는데
이딴 급보 같은 것은 그냥 살포시 무시해 버리시고
또 풍악을♬~ 올려라♬ 를 시전하십니다.


고려사 1161년 기사中
여름 4월
초하루 계묘일.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나가 머물렀다.
을묘일. 왕의 거처를 현화사(玄化寺)로 옮겼다.
무진일. 왕의 거처를 귀법사(歸法寺)로 옮겼다.
5월
초하루 계유일.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갑신일. 우박이 쏟아졌다.
갑오일. 최유청(崔惟淸)을 봉원전태학사(奉元殿太學士)로 임명했다.
을미일. 왕이 현화사에 나가 머물렀다.
정유일. 비가 내리자 왕이 「희우시(喜雨詩)」를 지어 유신(儒臣)들에게 보였다.
6월
계묘일. 왕이 봉원사(奉元寺)에 갔다.
계축일.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 7월
초하루 임신일.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경인일. 사면령을 내렸다.
8월
임인일.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나가 머물렀다.
정미일.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계축일.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나가 머물렀다.
임술일.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정묘일. 왕이 천화사(天和寺)에 나가 머물렀다.
9월
정축일. 왕의 거처를 장원정으로 옮겼다.
정해일. 왕의 거처를 천화사로 옮겼다.
겨울 10월
임인일. 왕의 거처를 현화사(玄化寺)로 옮겼다.
병오일. 감음현(感陰縣 :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사람인 자화(子和)와 의장(義章) 등이, 정서(鄭敍)의 처 임씨(任氏)와 현리(縣吏) 인량(仁梁)이 왕과 대신들을 저주한다고 무고했다. 왕이 합문지후(閤門祗侯) 임문분(林文賁)을 시켜 문초하게 한 결과, 자화와 인량이 서로 틈이 생겨 자화가 인량을 해치려고 한 짓임이 발각되었다. 이에 자화와 의장을 강물에 던져 죽였다.
11월
갑술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 금나라의 임금이 시해당했다는 소식을 서북면에서 급히 보고해 왔다.
무인일.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임오일. 왕이 구정(毬庭)에서 풍악을 구경했다.
갑신일. 또 풍악을 구경했다.
신묘일. 왕이 흥왕사(興王寺)에 나가 머물렀다.

한줄요약하시는 짝다리 동관님의 말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