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내놔라 천조제놈아!

 때는 바야흐로 1118년 가을

천조제가 야심 차게 준비한 2만 8천명의 원군(怨軍/여진에 원한을 갚는 군대)이 
현주(顯州)에서 박살이 나자, 요와 금의 경계에 있던 50 여주가 순식간에 금에 항복하게 됩니다.
이때 변경지역에 저축해 두었던 350만 석의 군량도 금이 꿀꺽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급격히 균형추가 금으로 기울자, 슬슬 화친 협상이 진행되게 됩니다.
금에 요 교서랑(校書郎) 출신인 발해인 양박(楊朴)이 태조 아골타에게
<영웅이 개국하면 먼저 대국의 책봉을 받아야 한다>라고 설득하자,
아골타는 천조제에게 자신을 황제에 책봉하라고 명령? 하게 됩니다.
외에도 총 10가지 조건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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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국지 1118년 기사中
是時有楊朴者,遼東鐵州人也,本渤海大族,登進士第,累官校書郎。
先是高永昌叛時,降女真,頗用事,勸阿骨打稱皇帝,改元天輔,以王為姓,以旻為名,以其國產金,號大金。
又陳說阿骨打曰:
「自古英雄開國受禪,先求大國封冊。」
이때 양박(楊朴)이란 자가 있었는데, 요동(遼東) 철주인(鐵州人)이며, 본래(本來) 발해(渤海)의 대족(大族)으로,
진사제(進士第)에 올라, 누관(累官/누차 벼슬이 오름)하여 교서랑(校書郎)이 되었다.
처음에 고영창(高永昌)이 반란(叛亂)하였을 때, (양박은) 여진(女真)에 항복하고, 
자못 용사(用事/일을 처리함, 세력을 떨침)하였는데, 아골타(阿骨打)에게 황제(皇帝)를 칭(稱)할 것을 권(勸)하여, 
천보(天輔)로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하며, 왕(王)으로써 성(姓)을 삼고, 민(旻)으로써 이름을 삼으며,
그 나라에 금(金)이 산출(出)됨으로,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하였다.
또 아골타(阿骨打)에게 진설(陳說/진술, 설명)하여 말하길
「자고(自古)로 영웅(英雄)이 개국(開國)하고 수선(受禪/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하면,
   먼저 대국(大國)의 봉책(封冊/봉한다는 천자의 조서)을 구(求)하여야 합니다.

요약 : 아골타님아 천조제에게 황제 달라고 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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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1118년 2월 기사中
二月,耶律奴哥還自金,金主復書曰:
「能以兄事朕,歲貢方物,歸我上、中京、興中府三路州縣;以親王、公主、駙馬、大臣子孫為質;
   還我行人及元給信符,并宋、夏、高麗往復書詔、表牒,則可以如約。」
2월에, 야율노가(耶律奴哥)가 금(金)에서 돌아왔는데, 금주(金主)의 복서(復書/회답 서신)에 말하기를
「능(能)히 형(兄)으로써 짐(朕)을 섬기고, 방물(方物/조공)을 세공(歲貢/해마다 바침)하며, 
   나에게 상경(上京)과 중경(中京) 및 흥중부(興中府) 3로(路)의 주현(州縣)을 돌려주고,
   친왕(親王)과 공주(公主) 및 부마(駙馬)와 대신(大臣)의 자손(子孫)을 인질(人質)로 하고,
   나의 행인(行人/심부름꾼)과 더불어 원래 주었던 신부(信符/증표)와, 
   아울러 송(宋)과 하(夏) 및 고려(高麗)와 왕복(往復)한 서조(書詔)와 표첩(表牒)을 반환(返還)하면,
   곧 여약(如約/약속대로 함)이 가이(可以/할 수 있음)하다.

요약 : 천조제놈아 나를 형으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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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 1118년 7월 기사中
秋七月,獵秋山。
金復遣胡突袞來,免取質子及上京、興中府所屬州郡,裁減歲幣之數,
「如能以兄事朕,冊用漢儀,可以如約」。
가을 7월에, 추산(秋山)에서 사냥하였다.
금(金)이 다시 호돌곤(胡突袞)을 보내왔는데, 
질자(質子/인질)와 더불어 상경(上京) 및 흥중부(興中府)의 소속(所屬) 주군(州郡)을 면취(免取/취함을 면함)하고,
세폐(歲幣)의 수(數)를 재감(裁減/헤아려 가볍게 덜어 줌)하였다.
「만일 능(能)히 형(兄)으로써 짐(朕)을 섬기고, 한의(漢儀/중국의 예법)를 사용해 (짐을 황제로) 책봉(冊封)한다면,
   여약(如約/약속대로 함)이 가이(可以/할 수 있음)하다.

거란국지 1118년 기사中
八月,阿骨打遣人詣天祚求封冊,其事有十:
徽號大聖大明皇帝,一也;
國號大金,二也;
玉輅,三也;
袞冕,四也;
玉刻御前之寶,五也;
以弟兄通問,六也;
生辰、正旦遣使,七也;
歲輸銀絹二十五萬疋兩,分南宋歲賜之半,八也;
割遼東、長春兩路,九也;
送還女真阿鶻產、趙三大王,十也。
8월에, 아골타(阿骨打)가 견인(遣人/사람을 보냄)하여 이르러 천조(天祚)에게 봉책(封冊))을 구(求)하였는데,
그 (구하는) 일에는 열 가지가 있었다.
휘호(徽號/존호)를 대성대명황제(大聖大明皇帝)라 봉책하는 것이, 일(一)이다.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봉책하는 것이, 둘(二)이다.
옥로(玉輅/주옥으로 꾸민 천자의 수레)를 보내는 것이, 삼(三)이다.
곤면(袞冕/곤룡포袞龍袍와 면류관冕旒冠)을 보내는 것이, 사(四)이다.
옥각(玉刻/옥에 글을 새김)한 어전지보(御前之寶/옥새)를 보내는 것이, 오(五)이다.
제형(弟兄/아우와 형)으로써 통문(通問/왕래하고 방문함)하는 것이, 육(六)이다.
생진(生辰/생신)과 정단(正旦/설날)에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는 것이, 칠(七)이다.
세수(歲輸/해마다 보냄)하는 은견(銀絹/은과 비단)이 25만 필량(疋兩/비단과 돈의 수량)이고,
남(南)쪽의 송(宋)이 세사(歲賜/해마다 줌)하는 반(半)을 나누는 것이, 팔(八)이다.
요동(遼東)과 장춘(長春)의 양로(兩路)를 할양(割讓)하는 것이, 구(九)이다.
여진인(女真人) 아골산(阿鶻產)과 조삼대왕(趙三大王)을 송환(送還)하는 것이, 십(十)이다.

요약 : 황제 내놔라 천조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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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천조제가 나름 자존심을 부렸나 봅니다.
천조제의 반응이 맘에 안 든 아골타님은 1년동안 참으시다가 
드디어 천조제님을 끝장내 버리겠다고 선포하시지요.


금사 1119년 6월 기사中
六月辛卯,遼遣太傳習泥烈等奉冊爾來,上擿冊文不合者數事復之。
6월 신묘일(辛卯日)에, 요에서 보낸 태전(太傳/태부太傅) 습니열(習泥烈)등이 봉책(奉冊/칙서를 받듦)하여 오니,
상(上)이 책문(冊文)을 들추어 보고는 몇 가지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보냈다.

금사 1119년 9월 기사中
九月,以遼冊禮使失期,詔諸路軍過江屯駐。
9월에, 요에서 책례사(冊禮使)가 기한을 어기니, 조(詔)하여 각 지역의 군을 강을 지나 둔주(屯駐/진치고 머무름)하게 하였다.

금사 1120년 3월 기사中
三月甲辰,上謂群臣曰:
「遼人屢敗,遣使求成,惟飾虛辭,以爲緩師之計,當議進討。其令咸州路統軍司治軍旅、修器械,具數以聞。」
辛酉,詔咸州路都統司曰:
「朕以遼國和議無成,將以四月二十五日進師。」
令斜葛留兵一千鎮守,闍母以餘兵來會于渾河。
遼習泥烈以國書來。
3월 갑진일(甲辰日)에, 상(上)이 군신(群臣/뭇 신하들)에게 이르러 말하길
「요인(遼人)이 여러 번 패하여, 사신을 보내 이룸을 얻고자 하며, 
   오직 허사(虛辭/거짓말)만을 꾸미고, 군대를 늦추고자 하는 계략을 꾸미니, 
   마땅히 의논하여 진토(進討/나아가 토벌함)해야 한다.
   이에 명하니 함주로도통사(咸州路統軍司)는 군려(軍旅.군세)를 다스리고, 기계(器械)를 수리하여,
   그 수량을 갖추어 전하라.
신유일(辛酉日)에, 조(詔)하여 함주로도통사(咸州路都統司)에게 말하길
요국(遼國)과의 화의(和議)가 이룸이 없으니 짐(朕)이, 장차 4월 25일에 군사을 진군시키겠다.
명하여 사갈(斜葛)에게 병력 1천으로 진수(鎮守/진영을 지킴)하여 머무르게 하고,
도모(闍母)는 남은 병력으로 혼하(渾河)에서 와서 모이도록 하였다.
요의 습니열(習泥烈)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다.


요약 : 너 죽었어 천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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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여진이 거병할 당시부터 아골타와 천조제 사이의 서신 배틀이 있었는데요,
       재밌는 것은, 이 서신 배틀을 담당했던 자들이 빡쳐서
       천조제를 배신하거나, 여진에 항복해 버리는 일들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한번 글을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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