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 서하를 공격해 조주(洮州) 등을 회복하고, 서하가 요에 원군 및 외교적 해결을 요청하자
요가 중재에 나섭니다. 이에 송은 1111년 9월 동관 등을 요에 사신으로 파견하게 됩니다.
본시 동관은 환관으로는 드물게 서하와의 전쟁을 주도하였으며,
동관의 직책은 서하로부터 빼앗은 희하난황(熙河蘭湟)과 진봉(秦鳳) 지역의
경략안무(經略安撫/변경의 군정관) 제치사(制置使/변경의 수장) 및
무신군절도사(武信軍節度使) 겸 검교사공(檢校司空)이었습니다.
요에 사신으로 갈 당시 동관은 온갖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 요 천조제에게 바쳤는데,
궁에서 알현할 때 동관이 환관임을 안 천조제는 신하들과 손가락질하며 비웃게 됩니다.
거란국지(契丹國志) 천조황제(天祚皇帝) 1111년 9월 기사中
天慶元年。
秋九月,宋遣鄭允中、童貫使遼。
貫至,遼君臣相聚指笑曰:
「南朝人才如此。」
천경(天慶) 원년(元年) (1111년).
가을 9월에, 송(宋)이 정윤중(鄭允中)과 동관(童貫)을 사신으로 요(遼)에 보냈다.
동관(童貫)이 이르니, 요(遼)의 군신(君臣)이 상취(相聚/서로 모임)하여 지소(指笑/손가락질하며 비웃음)하며 말하길
「남조(南朝)의 인재(人才)가 이와 같구나.」
수모를 당한 동관은 요에서 귀국할 때 연(燕) 지역에서 마식(馬植)이란 자를 데리고 왔는데,
이 마식이 이양사(李良嗣)의 한족 이름으로 개명하고, 송 휘종에게 연운 16주를 회복할 계책을 아뢰게 됩니다. 이 계책이란 것이 바다 건너 여진족과 통교하여 요를 협공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1111년 9월 당시에는 여진족이 요에 항거할 움직임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이런 계책을 했다는 것은 상당한 선견지명으로 보이긴 합니다.
실제로 훗날 동관은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연지역을 공격하였다가,
야율순이 이끄는 요의 기병 1만에 처참하게 패배하게 됩니다.
송사(宋史) 휘종(徽宗) 1111년 9월 기사中
是月,鄭允中、童貫使遼,以李良嗣來,良嗣獻取燕之策,詔賜姓趙。
이달에, 요에 사신으로 간 정윤중(鄭允中)과 동관(童貫)이, 이양사(李良嗣)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양사(良嗣)가 연(燕)을 취(取)할 수 있는 계책(計策)을 올리니,
조(詔)하여 조씨(趙氏)를 사성(賜姓/임금이 성씨를 내림)하였다.
거란국지(契丹國志) 천조황제(天祚皇帝) 1111년 9월 기사中
貫使歸,至盧溝河,有燕人馬植者,得罪于燕,見貫,陳滅燕之策。
貫擕歸宋,改姓李,名良嗣,薦于朝,遂賜姓趙。
後天祚數移檄索取,貫諱不與。
復燕之議,蓋始此。
동관(童貫)의 사신 일행이 귀환(歸還)하여, 노구하(盧溝河)에 이르렀는데,
연인(燕人/연 지역 사람) 마식(馬植)이란 자가, 연(燕)에서 득죄(得罪)하여, (도망가) 동관을 만나,
연(燕)을 멸(滅)할 책략(策略)을 말하였다.
동관(童貫)이 (마식을) 이끌고 송(宋)에 돌아와, (동관이 마식을) 이씨(李氏)로 개성(改姓)하고,
이름은 양사(良嗣)라 하여,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니,
마침내 (휘종이) 조씨(趙氏)를 사성(賜姓/임금이 성을 하사함)하였다.
후(後)에 천조(天祚)가 수차례 이격(移檄/급하게 격문을 돌림)하여 색취(索取/수색하여 취함) 하였는데,
동관(童貫)이 숨기고 주지 않았다.
연(燕)의 회복에 대한 논의(論議)가, 모두 이에 시작되었다.
*이양사(李良嗣)/조양사(趙良嗣)
→ 본시 요의 연경(燕京) 사람으로 본명은 마식(馬植)인데, 요에 사신으로 갔던 동관이 귀국하면서
마식을 송에 데려와 휘종에게 천거하였다.
동관은 마식을 중국식으로 이양사(李良嗣)로 개명시켰고, 마식은 휘종에게 여진족과 연합하여
요를 치면 연운 16주를 회복할 수 있다고 헌책하였다. 이에 휘종은 조씨성을 하사하였고,
마식은 조양사가 되었다.
매사냥 중인 거란인
송 휘종
거란인
천조제?

어두연중인 천조제?

어두연중인 천조제?
요약
동관 : 대송국 제치사 겸 절도사 겸 검교사공인 동관이 대요국 황제폐하를 뵈옵니다!
천조제 : ㅋㅋ 환관이 대신이라니 ㅋㅋ
송 미쳤음?
동관 : (아놔!)
마식 : 님아 제가 요를 칠 묘책이 있음둥!
휘종 : 얼쑤~ 이젠 연운 16주 먹을 수 있는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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