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정식 번역본이 있는줄 모르고 하다가 중간에 멈추긴 뭐 해서 끝까지 발번역은 해보았습니다.^^;
1267년 8월 원 세조 → 일본 국왕
上天眷命大蒙古國皇帝奉書日本國王
朕惟自古小國之君境土相接、尚務講信修睦
況我祖宗受天明命、奄有區夏、遐方異域、畏威懷徳者、不可悉數
상천(上天/하늘, 하느님)으로부터 권명(眷命/명을 돌봄)한
대몽고국(大蒙古國) 황제(皇帝)가 일본국왕(日本國王)에게 봉서(奉書/명령을 적은 서신을 보냄)한다.
짐은 자고(自古/예로부터)로 소국지군(小國之君/작은 나라의 임금/일본)을 생각하여,
경토(境土/국토)가 상접(相接/서로 접함)함에도,
오히려 강신(講信/믿음을 이야기함)하고 수목(修睦/사이좋게 지냄)에 힘썼고,
하물며 나의 조종(祖宗)께서 하늘의 밝은 명을 수여받아, 문득 구하(區夏/중국)을 얻었는데,
하방(遐方/멀리 떨어진 지방)한 이역(異域/외국의 땅)도, 외위(畏威/위엄을 두려워함)하고 덕을 품는 자가,
모두 헤아림이 불가(不可)하였다.
朕即位之初、以高麗無辜之民久瘁鋒鏑、即令罷兵還其疆域、反其旄倪、高麗君臣、感戴來朝、義雖君臣、而歡若父子、
計王之君臣、亦已知之
짐(朕)이 즉위(即位)한 초기에, 고려(高麗)의 무고(無辜/잘못이 없는)한 백성이 오랫동안 봉적(鋒鏑/창끝과 화살촉)에 병들자,
짐(即)이 명(令)하여 파병(罷兵/군을 물림)하여 그 강역(疆域)을 돌려주었으며,
그 모예(旄倪/노인과 어린아이)를 반환(返還)하니,
고려(高麗)의 군신(君臣)이, 감대(感戴/감격하여 떠받듦)하여 조공하여 왔고,
비록 군신(君臣)으로 맺어졌으나, 기쁨으로써는 부자(父子)와 같았다
(일본) 왕(王)의 군신(君臣)도 헤아렸을 터이니, 또한 이미 알 것이다.
高麗朕之東藩也、日本密迩高麗、開國以來、亦時通中國、至於朕躬、而無一乘之使以通和好、
尚恐王國知之未審、故特遣使持書 布告朕意
고려(高麗)는 짐(朕)의 동번(東藩/동쪽의 번국)이고, 일본(日本)은 고려(高麗)와 빈틈없이 가까워,
개국(開國) 이래(以來), 또한 때마다 중국(中國)과 통하였는데,
짐(朕)의 궁(躬/몸, 시대)에 이르러, 화호(和好)를 통(通)하고자 하는
일승지사(一乘之使/한대의 수레를 거느린 간편한 사자)도 없었지만,
오히려 왕국(王國/일본)이 알고도 미심(未審/살피지 못해 마음이 못 놓임)할까 두려워,
이런 연고로 특별히 서신을 가진 사신을 보내니, 짐(朕)의 뜻을 포고(布告/널리 알림)하라.
冀自今以往、通問結好、以相親睦、且聖人以四海為家、不相通好、豈一家之理哉
至用兵、夫孰所好
王其圖之
不宣
至元三年八月 日
바라건대 자금이왕(自今以往/지금 이후)에는, 통문(通問/서로 왕래함)하여 결호(結好/화친)하며, 서로 친목(親睦)하라.
또 성인(聖人)은 사해(四海/사방)를 한 집안으로 삼았는데, 서로 통호(通好/친분을 통함)하지 않는다면,
어찌 한 집안의 도리(道理)라 하겠는가?
용병(用兵/군을 사용)에 이르게 되면,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왕(王)은 그것을 도모(圖謀/대책과 방법을 세움)하라.
불선(不宣/이만 줄임)한다
지원(至元/원 세조世祖의 연호) 3년(1267년) 8월 일
고려사절요 1267년 8월 기사中 (번역 : 고전번역원)
○ 기거사인 반부에게 몽고의 국서와 우리나라의 국서를 주어서 일본에 보냈다. 몽고의 국서에 이르기를,
“대몽고 황제는 일본국 왕에게 글을 보낸다. 짐이 생각건대, 자고로 작은 나라 임금들도 국경이 서로 접하면 오히려 신의를 다지고 친목을 닦으려고 힘쓰거든, 하물며 우리 조종(祖宗)께서는 하늘의 밝은 명을 받아서 문득 중국을 차지하였으니, 멀리 있는 나라들도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는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짐이 즉위하던 처음에, 고려의 죄 없는 백성들이 오래 전란에 병들었음을 생각하여 곧 군사를 파하여 그 강역(彊域)을 돌려주고 포로를 돌려보냈다. 고려의 왕과 신하가 감동하여 매우 공손히 와서 조회하니, 의리는 비록 군신(君臣)간이지만 정은 부자와 같다. 생각건대 일본의 군신(君臣)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쪽 울타리이다. 일본은 매우 가깝고 개국한 이래로 또한 때로 중국에 통하였는데, 짐의 시대에 이르러 한 사신으로도 화호를 통하는 일이 없으니 아마도 왕의 나라에서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글로써 짐의 뜻을 포고하노니,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서로 통신하고 화호를 맺어서 친목하라. 또 성인은 사해(四海)로써 집을 삼나니 서로 화호를 통하지 않는 것이 어찌 한 집안의 정리라 하겠는가. 군사를 쓰는 데 이르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왕은 생각해 보라."
하였다.
고려사 1267년 8월 기사中 (번역 : 동아대학교. 네이버. 경인문화사)
“대몽고 황제가 일본국왕에게 글을 보내노라. 짐이 생각건대, 예로부터 작은 나라의 군주들은 영토가 맞붙어 있을 경우 상호 간의 신의와 우호를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하물며 우리 선조들께서 천명을 받아 중국 천하를 차지하니 아무리 먼 곳이라도 우리의 위세를 두려워하고 인덕을 흠모하는 나라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내가 즉위한 초기에는 무고한 고려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란에 시달리고 있음을 측은히 여겨 즉시 우리 군사를 철수시키고 그 강역을 돌려주었으며 포로로 잡혀온 모든 백성들도 죄다 돌려보냈다. 이를 본 고려의 군신이 감격해 입조해 왔으니 양국은 명목상으로 군신관계이나 그 친밀함은 부자와도 같다. 일본의 군신들도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고려는 짐의 동쪽 울타리 나라로서 일본과 밀착되어 있는 곳이다. 일본은 개국 이후 때때로 중국과 교류했다고는 하지만, 짐이 등극한 뒤로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맺으려고 한 일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일본에서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는가 우려해 이제 짐의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보내 짐의 뜻을 알리고자 한다. 지금 이후 서로 통신을 주고받으며 우호를 맺음으로써 상호간의 선린관계를 유지하기 바란다. 성인은 천하만국을 한 집안으로 여겼으니, 먼저 우호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어찌 한 집안이 될 수 있겠는가? 일본의 거부로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국왕이 알아서 판단하라.”
이에 함께 고려도 일본에 국서를 보냈습니다.
고려 원종 → 일본 국왕
고려사절요 1267년 8월 기사中
우리나라에서 보낸 국서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몽고 대국을 신하로 섬겨 정삭(正朔)을 받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황제께서 어질고 밝아서 천하로 한 집을 삼아서 먼 곳을 보기를 가까운 곳같이 하니 일월이 비치는 곳에서는 모두 그 덕을 흠앙한다. 지금 귀국에 화호를 통하려 하여 과인(寡人)에게 조하기를, '일본이 고려와 인접하여 있는데 제도와 정치가 칭찬할 만한 것이 있고, 한(漢)ㆍ당(唐) 이래로 여러 번 중국에 통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글을 보낸 것이니, 풍파가 험난하다고 핑계를 삼지 말라' 하였는데, 그 뜻이 엄하고 간절하므로 부득이하여 모관(某官) 모(某)를 보내어 황제의 글을 받들어 앞서 가는 것이다. 귀국이 중국에 화호를 통하지 않은 대(代)가 없다. 하물며 지금 황제께서 귀국과 화호를 통하려는 것은 그 공물(貢物)을 이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대개 온 천하가 복종하였다는 이름으로 천하에 우뚝 서고자 하는 것이다. 만일 귀국과 화호를 통함을 얻는다면 반드시 후하게 대접할 것이니 한 사신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귀국은 상량(商量) 참작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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