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간신 황잠선 수만 명으로 고려를 공격하라 꼬드기다.

 고려를 통해 금을 견제해 보려는 남송의 계책이

인종의 거부로 틀어지자 남송 황제 조구는 심하게 분노하였습니다.

<아뉘~ 우리 아빠가 얼마나 고려를 잘해 줬냐고?>

사실입니다. 북송은 고려를 정말 후하게 대접해 줬습니다.
책 달라면 책 주고, 의사 달라고 하면 의사 주고
북송 역대 황제들도 고려 사신이 온다고 하면 매우 후하게 사신들을 대접하였지요.
고려사나 당시 사신으로 갔던 임의의 비문을 살펴보면
송나라에 갔던 고려 사신들이 재물을 많이 탐했나 봅니다.
비문에 <임금이 청렴함을 가상하게 여겨>라는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나라에 가면 한몫 단단히 챙기는 게 일상이었나 봅니다.


임의 묘지명中
수창 6년(숙종 5, 1100)에 명을 받고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부사(副使) 중에 이익을 챙기고자 하는 이가 있었으나 공은 웃으며 바라볼 뿐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법도에 맞으니 송(宋)나라 사람들이 눈으로 보고 존경하였다. 돌아오자 임금이 그 청렴함을 가상하게 여겨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하고, 예·병(禮·兵) 2부의 상서(尙書)와 대자첨사(大子詹事)를 지냈다. 

소동파도 고려와의 외교관계는 실익이 없다고 할 정도였지요.

송사 고려전 1090 기사中
○ [원우(元祐)] 5년(A.D.1090; 高麗 宣宗 7)에 다시 사신을 보내와서, 은기(銀器) 5천벌을 하사하였다. [원우(元祐)] 7년(A.D.1092; 高麗 宣宗 9)에 황종각(黃宗慤)을 보내와 『황제침경(黃帝鍼經)』을 바치면서 구입해 가겠다는 서책이 매우 많았다.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식(蘇軾)이, “고려(高麗)가 들어와 조공(朝貢)하는 것이 터럭만큼도 이익은 없고 다섯 가지 손해만 있습니다.지금 요청한 서책과 수매해 가는 금박(金箔) 등은 모두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하고 아뢰니, 조칙(詔勅)을 내려 금박(金箔)만을 수매하여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끝내 『책부원귀(册府元龜)』도 구입하여 귀국했다.


여하튼, 정강의 변으로 금에게 부황 휘종과 형 흠종이 끌려간 이후
남송을 개국?한 고종은 고려와 연합하여 금을 견제하고자 온갖 제안을 고려에 해오는데요,
인종은 모조리 거부합니다. 물론 겉으로는 간곡하게 청하는 형식이었지만 말입니다.
사신으로 파견된 양응성(楊應誠)은 2달 동안 고려에 체류하면서 뜻을 이뤄보려고 하였지만 
실패하고 남송에 귀국하여 이사실을 고종에게 알립니다.
이에 고종은 소위 꼭지가 돌아 버렸습니다.
이에 간신이라 일컫어지는 황잠선이 
"황제님아 제가 배 타고 고려를 혼내 주겠음. 병사 수만 명만 주셈"
이라고 고종을 꼬드깁니다. 얼핏 들으니 황잠선이 악비를 주살할 때도 가담하였다고 하네요.

하니 주승비
"옛날에 여진과 해상동맹 맺어서 연운 지역 먹으려다가 이지경 난거 모르셈? 좀 말이 되는 소리하셈?"
이라고 하니 고종의 화가 풀렸다고 합니다.

한편 고려의 인종은 미안했는지 윤언이를 파견하여 사죄의 표문을 올리는데요,
삐진 고종은 사신단을 대충 접대하고 강제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송사 고려전 1128년 기사中

○ [건염(建炎)] 2년(A.D.1128; 高麗 仁宗 6) 에 절동로(浙東路) 마보군도총관(馬步軍都總管) 양응성(楊應誠)이 상언(上言)하기를, “고려(高麗)에서 여진(女眞)까지의 길이 매우 가까우므로 신(臣)이 삼한(三韓)에 사신으로 가서 계림(鷄林)과 우호를 맺어 [여진(女眞)으로 잡혀간] 삼성(三聖)을 영접하여 올 것을 도모하겠습니다.” 하니, 곧 양응성(楊應誠)을 가형부상서(假刑部尙書)로 삼아 고려국(高麗國) 사신으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절동수신(浙東帥臣) 적여문(翟汝文)이, “양응성(楊應誠)은 폐하(陛下)를 속여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웠을 뿐입니다. 만약 고려(高麗)가 오(吳)· 월(越)을 엿보기 위하여 금(金)나라 사람도 나루터를 물어 왔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무슨 말로써 그에 대답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폐하(陛下)의 명을 욕되게 한다면 원방(遠方)의 오랑캐에게 조소(嘲笑)당할 터이니 [양응성(楊應誠)을] 파견하지 마십시오.” 하고 아뢰었다.

양응성(楊應誠)은 이 말을 듣고도 끝내 부사(副使) 한연(韓衍)· 서장관(書狀官) 맹건(孟健) 등과 함께 항주(杭州)를 경유하여 바다를 건너서 갔다. 6월에 고려(高麗)에 도착하여 고려왕(高麗王) 해(楷)에게 하고 싶은 계획으로 효유(曉諭)하니  해(楷)가, “대조(大朝)는 본시 산동(山東)에 길이 있는데 어찌 등주(登州)를 경유하여 [여진(女眞)으로] 가지 아니하였습니까?”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이, “귀국(貴國)의 길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해(楷)는 난처한 기색을 보이더니 얼마 후에 그 나라 문하시랑(門下侍郞) 부일(傅佾)에게 명하여 객관(客館)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과연 적여문(翟汝文)의 말처럼 대답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이, “여진(女眞)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하니, 부일(傅佾)은, “여진(女眞)은 항상 바닷길로 왕래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여진(女眞)이 옛날에는 신하(臣下)로서 본국을 섬겼지만지금에는 우리가 도리어 신하로서 여진(女眞)을 섬기고 있으니, 그 강약(强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뒤에 [해(楷)가] 다시 중서시랑(中書侍郞) 최홍재(崔洪宰)· 지추밀원(知樞密院) 김부식(金富軾) 등을 [양응성(楊應誠)에게] 보내어 전일의 의사를 변동 없이 견지하면서,

“이성(二聖)이 현재 연운(燕雲)에 계신 이상 대조(大朝)에서 국토를 [여진(女眞)에게] 모조리 바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성(二聖)을 맞아 올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찌 병사를 훈련시켜 여진(女眞)과 싸우지 않습니까?” 하면서 끝내 조서(詔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양응성(楊應誠)은 2개월여를 [고려(高麗)에] 체류하다가 하는 수 없이 수창문(壽昌門)에서 해(楷)를 접견하고 그가 올린 표(表)만을 받아가지고 귀국하였다.

 

○ [건염2년(建炎二年)]10월에 대궐에 이르러 입대(入對)하여 그 상황을 아뢰니, 고종(高宗)은 해(楷)가 국은(國恩)을 저버렸다고 대단히 노하였다. 상서우승(尙書右丞) 주승비(朱勝非)가, “고려(高麗)가 금(金)나라 사람과는 인접하여 있고 중국과는 바다로 막혀 있으므로 이해(利害)가 매우 분명합니다과거에 고려(高麗)를 너무 후하게 대우하였지만, 지금 어떻게 그 보답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아뢰자, 우복사(右僕射) 황잠선(黃潛善)은, “큰 전함(戰艦)에 정예병(精銳兵) 수만명을 싣고 가 곧바로 고려(高麗)의 도읍지를 공격하면 저들이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승비(朱勝非)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연산(燕山)의 사적이 가까운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하고 아뢰니, 상(上)이 노여움을 풀었다.

11월에 해(楷)가 그의 신하 윤언신(尹彦頣)를 보내와 표(表)를 올려 사죄하니, 조칙(詔勅)을 내려 이성(二聖)이 아직 귀국하지 못하였으므로 연회(燕會)에 음악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여, 마침내 전문(殿門) 밖에다 막(幕)을 설치하여 객성관(客省官) 오득흥(吳得興)에게는 술과 음식을 반사(伴賜)하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징(張澂)더러는 그를 압반(押伴)하여 예(禮)에 따라 환국(還國)하도록 하였다.



헌데 송나라가 금 상대하기도 빡센 판국에 바다 건너 고려를 쳐?


한줄요약하시는 짝다리 동관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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