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아시아를 뒤흔든 달라이 라마 사기극

 달라이 라마들이 등장하고 나서부터, 물론 종교적 의미로야 달라이 라마는 다 대단한 사람들이겠습니다만은,

역사적 인물로서 가장 비중이 큰 인물들은 이 두명입니다.


우선 달라이라마 3세 소남 갸초입니다.


티베트 불교를 알탄 칸을 비롯한 전 몽골에 전파시킨 공로자로, 그 영향력은 만주에까지 이르렀으며,
심지어 이때문에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 믿어 상무정신이 약해져서 망했다는 

실로 시오노 나나미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입니다. 달라이라마 5세, 악왕롭상가쵸. 옆의 인물은 다름 아닌 청나라 순치제인데, 순치제가 조금 더 높게 있는 모양으로 묘사되지만, 거의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달라이 라마 5세의 별칭 중 하나가, 바로  "아빠첸뽀(Inga pa chen po)" 뜻을 말하자면 위대한 5세 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겔룩 교단이 티베트의 종교와 세속 권력을 장악했고, 무엇보다 청나라 순치제 시절에 베이징으로 입조하여 황제와 만난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황제에게 입조한다는 일은, 제후국이 오는것을 대국이 느긋하게 보는 경우라면,

이 경우에는 청나라가 청태종 홍타이지 시절부터 한사코 '초빙' 한 끝에 도착했고,


중앙 아시아에서 베이징까지 오는 길에 법회를 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베이징에 도착하자 중국 불교계도 몰려와 중국 불교계 내의 문제를 해결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는등,



실로 무협지에서 서장의 일대거사가 천하출두를 하는 듯한 기세였습니다.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현재를) 다스리는, 황제의 명령, 내가 듣자 하니, 모두를 아울러 다스리는 자와 홀로 선한 자가 근원을 밝히는 도리는 같지 않다고 하며, 세상을 떠난 자와 세상에 존재하는 자가 가르침을 세우는 이치 또한 다르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마음을 밝게 하고, 천성에 따른 행위를 분명히 하며, 온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만민의 영도자는 모두 한 가지 뜻으로 통하게 된다. 롭상잠소(=롭상갸쵸) 달라이라마 당신은 빛나는 지성을 바르게 키우고, 지혜가 매우 깊은 까닭으로, 마음과 행동 모두를 다스려, 일체의 사물을 헛된 것이라고 하고, 그로써 불법을 널리 알려 우매한 중생을 가르쳐 이끌었으니, 불법이 서쪽에서 성하여, 그 선한 이름이 동쪽에 알려진것을 아버지가 들어 찬양하고, 그대(달라이라마)가 미리 하늘의 뜻을 알고,

 '용의 해(1652년)에 만나도록 합시다.'

 라고 하였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으로 시간을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한 후, 진정으로 초청하기에 적당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아하니, 사람됨이 자애롭고, 언사에 절도가 있으며,총기와 현명함, 학식을 고루 갖춘 등 은혜를 베풀고, 이치를 궁구하는 문을 널리 열었으니, 이는 마치 밝은 길 위의 계단과 배 같으며, 또는 불법이 높은 산, 하늘의 별 같음이다. 이에 나는 인장을 주어, 세상의 모든 불교 교단을 이끄는, 달라이라마로 추대하였다. 적당한 때에 가서 불교를 융성하게 한 까닭으로 모두 기뻐하며 연회를 베풀도록 하였다. 불법을 떨치게 하고, 수없이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으니, 이것으로 상중의 상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인장을 주었다."



청대 불교 세계의 여행(김성수) 中


순치제가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하는 말인데, 
엄청나게 공경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교단의 보호자로서, 보다 많은 시주층을 확보하려고 했던 티베트의 요구. 

그리고 불교 세계의 관계망 속에 적극 참여함으로서 내륙아시아 지역 질서의 조정자로 등장하려는 중국 제국의 바램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순치제는 달라이라마 교권에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그 지지자로서 청조의 입장을 술회함으로서 불교 세계 내부에서 양자가 갖는 입지를 분명하게 하였습니다.



하여,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현재까지 발휘될 수 있는 그 원동력을, 이 5세의 베이징 방문에서부터 찾는 경우도 왕왕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달라이 라마 5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달라이 라마 5세의 훗날에 일어났습니다.



청나라 강희제 시절에 이르러서도 '위대한' 달라이 라마 5세의 권위는 여전했고, 강희제 역시 달라이 라마 5세에게 함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이 달라이 라마가 하는 소리가 갑자기 이상해지기 시작한 겁니다.


이를테면, 당시 전중국을 진동시켰던 삼번의 난의 경우, 강희제는 오삼계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한참 동안 전역을 총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갑자기 달라이 라마는 오삼계를 용서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을 했습니다. 오삼계는 힘이 꺾이면 알아서 항복할 것이고, 심지어 나라를 나누어 주고 전쟁을 끝내는 편이 낫다고 말입니다.


강희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청나라 판도의 영역을 나누어주고 오삼계와 협정을 맺을리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도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1680년대 후반에 이르면, 강희제는 당시 골칫거리였던 서북 지방의 준가르 부족, 그 우두머리인 가르단을 잡는데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689년 12월, 청나라 조정의 티베트 공사 선파릉감복이 출발할때, 티베트의 최고 관리, '제파'의 지위에 있는 상게 갸초(Sangye Gyatsho)라는 인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시 가르단과 대적하고 있는 몽골족의 인물 중에 "투시예투 칸" 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파 샹게 가초가 말하길, 달라이 라마 5세가 그 투시예투 칸을 청나라가 사로잡아 가르단에게 넘겨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강희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가르단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데 가르단과 원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잡아다, 가르단에게 바쳐줄리는 없는 일입니다. 강희제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이렇게 반응 했습니다.


 "밀지의 내용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항상 중생을 구제하는일에 힘써왔는데, 선파릉감복이 전한 서신은 어쩐지 달라이 라마의 뜻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달라이 라마의 뜻이 아닌것 같다. 실상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강희는 달라이 라마 5세가 묘한 짓을 벌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강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있는 사람은 그 위대한 달라이 라마 5세가 아닙니다. 제파의 지위에 있는 상게 갸초입니다. 그럼 달라이 라마는 어떻게 되었는가?


 죽었습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훨씬 이전, 1682년이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샹게 가초는 이를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고, 5세와 모습이 비슷한 승려, 강양찰파라는 인물을 데려다가 달라이 라마의 복장을 입혀 포탈랍 궁의 옥좌에 앉히고는, 대외적으로는 5세가 명상에 들어갔다고 선포하며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했습니다.


 이 샹게 가초라는 인물은, 일전에 순치제가 달라이 라마 5세와 만나기전, 달라이 라마가 라싸 북부의 저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그날 밤 저택 주인의 아내의 시중을 받았고, 그 아내는 이듬해에 자식을 낳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샹게 가초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샹게 가초가 달라이 라마 5세의 친아들일것이라고 수근거렸고, 사실이 어떻던 간에, 달라이 라마 5세 역시 이를 신경을 썻는지 8살이 되자 직접 포탈랍 궁으로 데려와서는, 미래의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직접 교육을 시켰고, 샹게 가초는 이후 박학다식한 청년이 되어 26세가 되자 달라이 라마의 추대로 수많은 승려들의 환호성 앞에 제파의 지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 5세는 제파 샹게 가초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 달라이 라마의 또다른 제자가, 사실 가르단입니다. 즉 제파 샹게 가초와 가르단은 동문수학한 사이인데, 그렇게 되자 제파 샹게 가초는 가르단을 남몰래 비호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즉 달라이 라마는 죽었고, 그를 사칭하는 사람이 그 명의로 계속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고 있는데, 강희제 입장에서는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뭔가 괴이하고 이전과 다른것 같은데 그 권위를 무시할 수도 없는 괴상망측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강희제가 진실을 알아차린 것은 라마의 사망으로부터 무려 9년뒤에, '차오모드 전투' 에서 승리 한후 포로의 심문을 통해서였습니다. 


당연히 이 소식을 들은 강희제는 엄청나게 격노했고, 곧 청나라에 대항 해볼 수 있는 가르단 마저 완전히 강희제에게 격파 당하자, 사기극을 벌였던 제파 샹게 가초도 깜짝 놀라서 새로 달라이 라마 6세를 세우고 청나라에 숙이고 들어가면서 어떻게든 강희제의 노여움을 가라 앉게 하려고 했습니다.



일단 강희제는 '더 헛수작을 부리지 않는 선에서' 이를 넘어가겠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1705년 라장한이라는 인물이 티베트로 침입해서 제파를 없애버렸고, 달라이 라마 6세도 청나라로 압송해 가는 도중에 사망(암살 의혹이 짙은)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라장한의 뒤를 봐주면서 지지를 해주던 사람이, 실은 강희제였습니다. 이 한바탕의 사기극은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여담으로, 청나라의 지지를 받고 티베트에 진입한 라장한은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세웠는데, 대다수 티베트인들은 그건 라장한이 세운 가짜일 뿐이고, 진짜 "활불"은 코코노르에서 태어난 다른 소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라장한은 이를 무시하고 그 소년은 라싸에 못 들어오게 하고, 청나라 역시 '보호'를 이유로 그 소년을 따로 억류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현대에 벌어지는 달라이 라마를 둘러싼 정치 놀음과 비슷해 보이는 일입니다.




여담을 하나 더 말하자면, 저 대립은 갑작스럽게 끝나게 되는데, 갑자기 중국 서북에 있던 준가르 부족이 이 티베트의 정치 문제에 개입하면서, 서북의 산맥들을 넘는 말도 안되는 대원정 끝에 라싸로 진입, 라장한을 비롯해서 대다수를 전부 학살하면서 이상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강희제의 14황자와 장군 연갱요 등이 이끄는 부대가 라싸로 진군해 준가르를 몰아내고 새로운 달라이 라마를 세웠습니다.


대략 이 시점부터 청나라와 티베트의 관계가 약간 달라지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몹시도 높은 대접을 받은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와, 이를 후원하면서 대단히 공경하는 청나라의 지배자의 관계가 그 이전이라면, 


물론 그 이후에도 티베트의 종교 지도자가 청나라에서 존중을 받는다 해도 이 시점부터는 달라이 라마 등이 단순히 청나라 황제의 후원을 얻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청나라가 티베트의 실질적인 군사세력이 되어버린 셈이니, 청나라의 입김이란 부분에서 어느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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