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명신상해에 실린 바얀의 그림 마태화보에 실린 바얀의 그림
바얀(佰顔 1236년 ~ 1295년1월 11일)은 원나라의 명장으로, 정확히 말하면 쿠빌라이 칸의 명장으로 활약했던 장수입니다. 시황제의 왕전이나, 아우구스투스의 아그리파처럼 쿠빌라이 칸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칼" 이었지요.
바아린 부 출신이었던 바얀은 본래 서방을 정복중인 훌라구를 따라 아버지와 함께 그쪽에서 종군하고 있었는데, 일 칸국의 사신으로 원나라 조정에 입조했을때 장군 다운 당당한 체격과 언사로 쿠빌라이의 신임을 듬뿍 받았습니다. 쿠빌라이는 이렇게 말했죠.
"바얀은 큰 인재다. 짐의 신변에 남겨라."
이 결정은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 후로 쿠빌라이의 최측근이 된 바얀은 말 그대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 1265년에는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이 되었습니다. 그때문에 바얀승상(佰顔丞相)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이때쯤 되면, 이제 몽골 제국에 대항하는 나라는 남송밖에 없었습니다. 쿠빌라이의 가장 큰 소망은 전중국의 통일이었으나, 동시에 쿠빌라이는 중국 문화의 애호가 이기도 했습니다.바얀이 출정하기 전에 쿠빌라이는 그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 예전 송나라의 태조의 부하였던 조빈이라는 신하는 남당을 멸망시킬때 무고한 사람을 폭행하지 않았다고 하네. 자네도 그 마음을 본받아 짐의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지 말게나."
1274년 9월 바얀과 아술(阿術 아주Aju 그 유명한 수부타이의 손자)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남송을 공격했는데, 바로 작년에 양양 방어선이 무너진 남송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20만 대군은 강주(江州)에 이르렀고, 송나라의 병부상서 여사기는 바얀에게 투항했습니다.
바얀은 여사기를 강주 태수로 책봉했습니다. 그런데 여사기가 자기를 끌고 와서 보니, 술판을 벌이고는 여자 둘을 바얀에게 붙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바얀은 몹시 화를 냈다고 합니다.
"나는 황제의 명을 듣고 송나라를 문죄하거늘, 어찌 나의 뜻을 동요시키느냐?"
여사기는 깜짝 놀라서 무릎을 꿇고 빌기만 했습니다.
바얀은 쿠빌라이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여, 지나가면서 역병이 든 백성들에게 약을 주고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어 환심을 샀다고 합니다. 이에 백성들은 바얀의 군대를 '왕자의 군대' 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북방 병사들은 남방의 더위를 먹자 영 힘을 못쓰고 있었고, 쿠빌라이는 넌지시 세력을 정비하고 가을에 공격을 할 것을 주장했지만, 바얀은 거절했습니다.
"아군의 공격은 한참 사냥감을 쫓고 있는 격입니다. 지금은 질풍처럼 전진해야 합니다."
"그럼 스스로 결단을 내리게."
이 무렵 남송에서는 간신 가사도가 있었는데, 스스로 바얀의 군대를 막을 자신이 있다고 소리치며 1275년 사실상 남은 거의 모든 군사인 13만의 군대를 싹싹 긁어서 출정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사도는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싸울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칭신(稱臣)하고 세폐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바얀에게 강화를 제안했으나 바얀은 단칼에 거절해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가사도는 내키지 않는 싸움을 하였는데,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었으니 제대로 될리가 만무했습니다. 남송군은 괴멸되었고 주력군은 완전 소멸, 결국 남송의 멸망은 결정되고 말았습니다.
바얀은 건강에 사령부를 두고 아주를 회남일대로 파견해 임안과 회남 사이를 차단, 그 주변 지역들을 쓸어담듯이 점령을 했습니다. 어느정도 준비가 끝나자, 바얀의 군대는 남송의 수도는 임안으로 진격했습니다.
이미 군대도 없는 남송은 더 이상의 저항은 불가능했고, 송나라의 대신들은 어린 황제와 늙은 태후를 불쌍히 여겨 제발 돌아가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바얀은 거절했습니다.
"따지고보면, 자네들 조씨 왕조도 어린 고아와 늙은 과부의 손에서 정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오늘날 어린 고아와 늙은 과부가 자기들 손으로 정권을 잃어버리게 되니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송태조 조광윤이 후주 세종의 후예에게서 정권을 탈취한 일을 말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송나라의 충신 문천상은 바얀를 만나러 했지만, 바얀은 문천상을 아예 구금시켜버리고 결국 1276년 남송은 항복,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바얀은 송나라 황실의 기물, 책, 황족을 성도로 압송했습니다.
남송의 수도 임안은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에 하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물자와 화려한 재화가 있었는데, 거친 병사들은 욕심을 냈지만 이미 쿠빌라이로부터 언질을 받은 바얀은 이를 저지하며 병사들이 성내로 함부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고, 조금이라도 약탈을 하는 자는 군법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철두철미하게 뒷정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쿠빌라이는 바얀을 축하하기 위해 여러 백관들을 앞에 보내 축하하게 했는데, 게중에 당대의 재력가이자 권신이었던 아하마(阿合馬)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는 기색이 은근히 뇌물을 요구하는 수작이었지만 바얀은 가진것이 없어 지니고 있던 옥고리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송나라 황실에는 물론 재물이 많았지. 하지만 나는 가지고 온게 하나도 없네."
아하마는 이게 자신을 무시하는 수작이라고 생각해서 쿠빌라이에게 바얀이 송나라 황실의 물건중에 매우 귀한 옥 술잔을 바얀이 빼돌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에 쿠빌라이는 조사를 해보았지만 딱히 그런 사실을 알수가 없었습니다.
아하마는 나중에 철퇴를 맞고 죽었고 쿠빌라이는 그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어느 사람이 바얀이 뺴돌렸다는 혐의를 받은 옥 술잔을 쿠빌라이에게 헌납하자 한탄했다고 합니다.
"하마터면 충신을 억울하게 대할 뻔 했구나."
쿠발라이는 마지막 대칸이었으나 동시에 대칸이 아니기도 했습니다. 쿠빌라이에 적대하는 다른 몽골인들이 있었고, 대표적인 인물이 오고타이 칸 국의 카이두였습니다.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킨 카이두는 몽케 칸의 아들 시리기, 차가타이의 아들 사르반등을 앞세어 1277년 카라코룸으로 밀고 들어왔습니다.
간담이 서늘해진 쿠빌라이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것을 느꼈고, 이럴때 쿠빌라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바얀이었습니다. 바얀은 과연 뛰어난 용병술을 보여주며 이들을 격파하였고, 시라이와 사르반은 내분을 일으켜 결국 사르반이 시라기를 바얀에게 넘겨버리는 대가로 항복하면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1287년 카이두는 소위 동방 3왕가라고 불리우는 세력들을 끌어모아 다시 한번 대항했는데 쿠빌라이는 그 중 한명인 니얀을 죽이면서 기세를 올렸습니다. 카이두는 여러 차례 공격을 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바얀에 번번히 막혀 도저히 성과를 낼 수 없었습니다.
쿠빌라이가 죽고 바얀은 1년 정도를 더 살다 죽었는데, 후계자는 손자였던 테무르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발하는 의견들이 있어 문제가 생길 듯하자, 직접 대신 회의에 나서 한손에는 보검을 쥐고 조상의 훈시를 큰 소리로 낭독하며 테무르를 옹립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대장군의 어마어마한 위압갑에 여러 왕들은 감히 반발하지 못하고 고개만을 숙여, 테무르는 쉽게 황제가 되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아그리파가 없었으면 옥타비아누스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다." 고 한다고 하는데, 쿠빌라이에게 있어 바얀도 아그리파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쿠빌라이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를 위해 행동했을 정도였죠.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서는 바얀에 관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중국에서는「백안(百眼)」을 의미하여,「백개의 눈을 가진 괴물이 송을 멸한다」는 예언에 관한 인연화(因緣話)가 전해진다.
김호동 교수 말로는 오직 동방 견문록에서만 이 언급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얀을 찾아보면 두 명의 인물이 나타납니다.
바얀
13세기 중국 원나라 초기의 공신. 훌라구[旭烈兀]를 따라 페르시아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뒤에 쿠빌라이忽必烈의 눈에 들어 그의 밑에서 요직을 맡았다. 남송(南宋)을 토벌하고(1276), 이어서 캐라코람[哈刺和林]에 주둔한 몽골군 총사령관으로서 가사도(賈似道)군을 대파하였으며, 성종(成宗)이 즉위한 뒤에는 건국공신으로서 중직을 역임하였다
바얀 ? - 1340
메르키트 부족 출신. 카이두(Khaidu: 海都)와 싸워 무공을 세우고, 무종(武宗) ·인종(仁宗) ·영종(英宗) ·태정제(泰定帝) 밑에서 요직을 역임하였다. 태정제가 죽은 후에는 반대파를 누르고 무종의 장자인 명종(明宗), 아우인 문종(文宗)을 즉위시키고 전권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원망을 사서 실각한 끝에 유적지(流謫地)로 가던 중 병사하였다. 음독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가장 수가 많은 장(張) ·왕(王) ·유(劉) ·이(李) ·조(趙)의 5성(姓) 사람들을 살해하고자 할 정도로 한인(漢人) ·한문화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물론 여기서 제가 언급한 바얀은 전자입니다.
심지어 둘 모두 한자가 伯顔입니다. 도저히 구분이 안되는데
카이두와 싸우는 부분은 뭔가 오해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맞습니다. 바얀이 카이두와 싸웠는데, 아래의 바얀도 카이두의 난에 참전했다고 합니다. 연도로 구분을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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