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공대사탑비 관련 김두진 교수님과의 문답내용입니다.

 얼마전에 태자사낭공대사 탑비 해석에 관한 글을 올린적이 있었는데요,

해서 해당 논문을 발표하신 김두진 교수님께 내용을 문의 하였더니, 답을 해주셨습니다.

김두진 교수님은 전 국민대 교수 및 진단학회와 역사학회 전회장을 역임하신 분으로
신라말기 금석문 관련해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학자이신 분입니다.

교수님께서 운영하시는 블러그는 http://blog.daum.net/doojink45 이구요,
좋은 글들이 많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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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공구 질문 : 

교수님 안녕하세요. 교수님께 문의 하고 싶은게 있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교수님의 1982년 논문 <왕건의 승려결합과 그 의도> 에서 915년 고려 태조 왕건이 왕위에 오르기전 
경주 남산 실제사에 낭공대사를 직접 찾아 뵈었다고 하시었는데요, 
윗글에서도 마찬가지구요.태자사낭공대사비문의 원문과 탁본, 각주 해석본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915년의 낭공대사 방문 주체가 신라 신덕왕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비문에 신덕대왕을 고려 태조의 시호인 신성대왕으로 해석하는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또한 성고대왕도 광종의 입장에서의 고려태조가 아니라,  
경명왕대에서 신덕왕이나 혹은 신덕왕대에서 효공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해당 관련글을  
http://cafe.naver.com/booheong/80110 에 두차례에 걸쳐 작성 하였는데요. 
혹 시간이 허락하시면 의견을 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3.08.27 길공구


김두진 교수님 답변
해당 블러그 덧글 참고


길공구 재문의
상세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의 의견을 위에 제가 언급한 네이버 카페에 담아가도 될련지요? 
교수님의 귀중한 의견은 시간을 들여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교수님의 의견에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이 몇가지 있어 재차 문의를 하고자 합니다.
1. 소율희 등을 왕건 세력이라고 하심은, 소율희가 여러 선사를 후원했듯이
   왕건 또한 잠저에 있을때 형미를 후원한 공통점을 들어 같은류의 세력이라고 하신 거신지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직접적으로 소율희와 왕건이 910년대에 결연내지 접촉했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낭공대사의 비문에는 915년에 낭공대사를 궁중에 초빙한후, 신덕왕이 잠저시에 거처하던 실제사의 한 거처로 
   행적을 모시면서, 그곳을 선방으로 만들어 행적에게 헌납했다고 나옵니다.
   비문의 "성상이 보위에 오르기전 聖上以?閤龍 " 즉 잠저시는 행적의 선방의 유래에 대해 대한 설명이지
   915년 당시가 신덕왕의 잠저시라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행적과 신덕왕이 두번의 만남을 가진것도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비문의 907년 9월에 행적이 신라궁을 찾아와 설법하였을 당시 경청한 비문상의 "주상(主上)"이 신덕왕일수
   있으나 문맥상으로 국사의 예로 대했다는 구절을 보면 효공왕이라고 생각 됩니다.
   즉 905년에 효공왕과 더불어 행적의 설법을 신덕왕이 경청하였을 가능성은 있으나
   단지 비문으로만 국한할경우 행적과 신덕왕의 만남은 915년이 처음이라고 생각됩니다.
3. 낭원대사탑비문에 국한하여 해석하면 개청이 신라왕실의 부름을 받기 이전부터 명주 보현산사에서 
   명주호족 김순식의 후원을 받았으며, 이후 개청은 경애왕의 명을 받아 신라궁을 방문하지요.
   이에 경애왕은 개청을 국사의 예를 대접하였습니다. 
   中使崔暎高飛鳳詔遠詣鴦廬請扶王道之危仍表國師之禮
   신라궁을 떠나 보현사로 되돌아온 개청을, 김순식은 국사의 예를 받은 것을 경하하기 위하여
   요좌를 거느리고 보현사를 방문하자 잠시 김순식을 따라 명주군성에 머물다가
   곧 보현사로 돌아와 입적한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교수님의 말씀처럼 왕실의 부름을 받아 국사의 예로 하였는데도, 궁에 머물지 않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 간것만으로 실제 결연이라고 볼수 없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비문에는 김순식의 명주군성에도 잠깐 머물다 다시 보현사로 되돌아 간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 또한 그렇게 해석할수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4. 행적과 왕건의 연결상황은 교수님의 굴산문관계 글을, 상세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당 논문이나 글은 어떠한 것인지요? 혹 교수님의 현 블러그에도 있는지요?
   
거듭 감사 드립니다. 무더위 건강 유의하십시요. 꾸벅(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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