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오걸매의 권력을 능가한 종한(宗翰)

 직접 군을 끌고 전쟁을 수행하던 금 태조 아골타와는 달리, 금 태종 오걸매는 내정에 더욱 힘을 쏟았습니다.

친정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지요.

금사나 송사전 금열전등에 따르면, 오걸매는 사냥을 싫어하고 음악, 특히나 송의 음악인 신악을 매우 즐겼다고 합니다.

송사전 금열전中
천회 13년 1135년, 오걸매(吳乞買)가 죽었다. 
오걸매가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을 매우 즐겼으며, 국가를 경제하는 규모가 상당히 볼 만하였다. 

*송사전은 원 승상 탈탈이 제작한 송사에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어,
 조선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송사 정리에 관심을 보이다가, 즉위 후 학자들에게 명하여
 송사 완전판을 만들려고 한것이지요.
 송사전금열전은 송사에 기록된 금과 관련 내용을 따로 추려 만든 열전입니다.
 송사전은 완결은 보지 못하였고 일부 내용이 청장관전서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시 송사에는 외국 열전에 금열전이 없고, 고려전등만이 있습니다.

1126년엔 송과의 본격적인 전쟁을 수행하면서, 송 정벌을 종한과 종망에게 명했는데,
종한과 종망이 전쟁터로 가자 갑자기 음악을 즐기기도 하였지요.

금사 1126 8월 기사中
8월 경자일(庚子日)에, 조(詔)하여 좌부원수(左副元帥) 종한(宗翰)과 우부원수(右副元帥) 종망(宗望)에게 송을 정벌케 하였다.
경술일(庚戌日)에, 종한(宗翰)이 서경(西京)에서 출발하였다.
계축일(癸丑日)에, 종망(宗望)이 보주(保州)에서 출발하였다.
경신일(庚申日)에, 갑자기 신악(新樂/송나라 음악)을 뽑아 취하였다.

금사 찬자는 오걸매를 이렇게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贊曰:
찬자는 말한다
천보(天輔/금 태조의 연호) 초창기(草創期)에는, 예악(禮樂/예법과 음악)의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태종(太宗)이 사야(斜也)와 종간(宗幹)에게 국정(國政)을 주관하게 하고,
종한(宗翰)과 종망(宗望)으로서는 융사(戎事/군사)를 총괄(總括)하게 하였다.
이윽고 요(遼)를 멸(滅)하고 송(宋)을 치고는, 곧 예법(禮法)과 법도(法度)를 제정(制定)하고, 
역법을 설치해 시간을 명확히 하였으며, 
무공(武功/무력武力으로 공을 세움)을 이어받았고, 문사(文事/학문)도 닦음으로써
경국(經國/나라를 경영함)의 규모(規摹)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정(定)해졌다.
재위(在位)는 13년 동안, 궁실(宮室) 및 정원과 연못을 증익(增益/더하고 늘림)하는 바가 없었다.
말년에는 대신(大臣/종한 등)의 계책을 들어주어, 희종(熙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니
태조(太祖)의 세사(世嗣/후손)로 하여금 올바른 차례를 잃지 않게 하였으니, 
가히 행한 그 바가 심히 어렵다 할 수 있도다!

즉, 오걸매의 치세 기간에 특히나 문(文)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오걸매는 특히나 예악과 문사, 경제 분야에 매진하였고
군사의 경우 종한과 종망에게 거의 일임하다 싶이 하였습니다.
송 정벌도 종한이 총사령관, 종망이 부사령관이었습니다.
더불어 종한은 아골타의 거병부터 승전을 거듭한 상승장군으로, 군공으로는 개국 1등 공신이기도 하였지요.

헌데 종한은 사실 아골타나 오걸매의 직계 자손이거나, 심지어는 국가 원로급도 아니었고, 항렬도 오걸매의 조카 벌이였습니다.

여기서 금 황실의 족보를 살펴보지요.
 
6세7세8세9세
1남 경조 오고내1남 핵자살개 종한
2남 세조 핵리발1남 강종 오아속1남 당괄덕온
2남 태조 아골타1남 종간
2남 종망
3남 종보
4남 종필
5남 종준
6남 종준
7남 종조
8남 종강
9남 종민
종걸
와로
와로타
습니렬
영길
연손
알홀
3남 알대(斡帶) 
4남 태종 오걸매1남 종반
종고
종아
종위
종영
종의
종본
골라
종미
신토문
곡패속
종철
종순
5남 고/사야 
6남 알새
7남 알자
8남 오고내
9남 도모
10남 사랄
11남 앙
3남 핵손1남 욱
4남 숙종 파자숙1남 누혹관
2남 포로호
5남 목종 영가1남 창1남 알대
2남 오달보
5남 욱()1남 시리홀
6남 핵진보  
7남 마파1남 만도본
8남 아리합만 
9남 만도가

[종x] 로 시작하는 항렬은 바로 아골타나 오걸매의 아들이나 조카를 뜻합니다.
종한의 할아버지는 바로 7세 오고내의 장남 핵자입니다.
아골타나 오걸매의 아버지 핵리발은 차남이었고요.

오고내때 크게 세력이 향상되어, 장남 핵자는 국상으로 다른 부족을 다스리러 완안부를 떠난 듯싶습니다.
이유는 핵자의 아들 살개가 아골타가 요를 최초로 공격할 때, 참전하지 않고 다른 지역에서 부족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국상은 완안부 족장이 세습한 생여진 절도사 바로 아래 직급입니다.

살개의 친동생 핵리발이 완안부 족장으로 절도사를 잇게 되고, 이어 형제들이 차례대로 절도사직을 수행하지요.
그 후에 영가가 조카 아골타에게 넘기게 되면서 오걸매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즉 본래대로라면 핵자-살개-종한이 완안부 족장이 되어 절도사를 이었어야 했는데,
오고내가 절도사직을 차남 핵리발에게 넘긴 것이지요.

실제로 시조 1세 함보부터 7세 오고내까지 전부 1남 적장자가 부족장을 이어받았습니다.
이게 처음으로 차남에게 넘어간 게 핵리발 때입니다.
 
원칙적으로 따지게 되면 바로 종한이 적통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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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요약

1. 오걸매 재위 시에는 오걸매는 국정을, 종한은 군사를 전담
2. 본시 완안부족의 적통은 종한
3. 종한은 전쟁에 매우 능한 유능한 장수
4. [종x]의 항렬은 아골타, 오걸매의 아들 내지 조카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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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걸매 치세 간의 공식적인 서열을 대략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NO.1 황제 오걸매
NO.2 암반발극렬 완안(여진명 사야) + 도원수(군사 총사령관) → 오걸매의 막내 친동생
NO.3 국론홀로발극렬 종반 → 오걸매의 장남
NO.4 국론발극렬 종간 → 아골타의 장남
NO.5 이뢰발극렬 종한(여진명 점몰갈/점한) + 좌부원수(군사 부사령관) → 오걸매의 조카
NO.6 우부원수(군사 no3 사령관) 종망(여진명 알로보/알리부) → 아골타의 차남

실질적인 군권(武)
NO.1 황제 오걸매
NO.2 좌부원수 종한 → 오걸매 조카, 살개의 아들
NO.3 우부원수 종망 → 오걸매 조카, 아골타의 차남

국정수행(文)
오걸매+완안고(사야)+종간


정작 오걸매의 장자인 종반은 금사 태종조에 딱 1회 나옵니다. 즉, 군사적인 면에서 전공이 전무하였다는 이야기이죠.

또 아골타의 장남 종간도 군사적 기록이 금태종조에 한 줄도 없습니다. (훗날 종간의 아들 완안량이 희종을 죽이고 4대 황제)
종간의 최대 공적이라 하면, 아버지 아골타가 죽었을 때 동생들을 모두 이끌고 오걸매를 찾아가
황위에 오르길 간청한 것뿐입니다.

또한 동생이자 차기 황위 계승 1위인 완안고도 도원수로서 군을 지휘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즉 허직이였다는 이야기죠.


완안고, 종반, 종간 → 군사적 기반, 전공 없음


→딱 그림이 나오지요? 왜 오걸매가 아들을 세우지 않고, 아골타의 적자 5남 종준의 아들 완안단(희종)을 세웠는지요.
   후에 완안고가 병사하자 완안단을 강력하게 암반발극렬(NO.2) 자리에 올린 것이 바로 종한입니다.
   즉, 군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오걸매의 장남을 배제하고, 
   힘이 없었던 아골타의 적장자 종준의 아들 완안단을 세운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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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요약

오걸매 재위시 금나라의 군사적 실권은 종한과 종망이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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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한은 태조 아골타 당시부터 군사적인 재능을 보여 왔는데요, 
오걸매가 즉위한 이후 대부분의 대요전쟁의 선봉을 종한이 도맡아 해왔습니다.

1123년 종한은 금 태종 최초의 공명첩을 발급받고 새롭게 점령한 구 요나라 땅 서남북 100 도를 다스리는 도통에 임명됩니다.

금사 1123년 10월 기사中
10월 임진일(壬辰日)에, 조(詔)하여 공명선두(空名宣頭/공명첩)를 내려 도통(都統) 종한(宗翰)에게
서남(西南)과 서북(西北) 양 지역의 100 도(道)를 주며 말하길
「이제 너에게 이 방면(方面)을 맡기고자 하니, 
   반드시 주청(奏請/임금에게 상주하여 청함)하고 대기하면 마땅히 천수(遷授/벼슬을 옮겨 제수함)할 것이니,
   (임지로 가게 되면) 계체(稽滯/일이 밀려 늦어짐)를 경계하고, 
   편의종사(便宜從事/지방에 나간 관리가 편의대로 상황에 맞게 대처함)로 하라.」

*공명선두(空名宣頭) : 같은말 공명고신(空名告身)/공명첩(空名帖)
  → 임명되는 자의 이름을 비워 발행하는 사령장(辭令狀)

임지에 가면 편의대로 일을 보아라!


또 1125년 대송 전쟁을 수행하면서, 실질적인 총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금사 1125년 10월 기사중
갑진일(甲辰日)에, 제장(諸將)에게 조(詔)하여 송(宋)을 정벌토록 하였다.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 고(杲)를 겸(兼)하여 영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종한(宗翰)을 겸(兼)하여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삼아 선봉(先鋒)으로 하고,
경략사(經略使) 완안희윤(完顏希尹)을 원수우감군(元帥右監軍)으로 삼고,
좌금오상장군(左金吾上將軍) 야율여도(耶律余睹)를 원수우도림(元帥右都臨)으로 삼고,
서경(西京)에서 부터 태원(太原)으로 들어갔다.
6부로(六部路)의 군수(軍帥) 달라(撻懶)를 6부로(六部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사야(斜也)를 부도통(都統)으로 삼았으며,
종망(宗望)을 남경로(南京路) 도통(都統)으로 삼고, 도모(闍母)를 부도통(都統)으로 삼았으며,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유언종(劉彥宗)을 겸(兼)하여 한군도통(漢軍都統)으로 삼아,
남경(南京)에서 부터 연산(燕山)으로 들어갔다.

완안고는 말한 도원수이지, 실제 1차 송정벌군 6만의 총사령관은 종한이었습니다.

1차, 2차에 걸친 대송 전쟁의 총 사령관으로, 2차 정벌전에서는 황하에서 송군 12만과 대치하였는데
종한이 계략으로 밤새 북을 두드리자, 송군이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여
피해 없이 황하를 도강하였다는 일화는 종한의 무력(武力/힘이 아닌 전쟁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개봉성을 함락한 것도 종한이었으며, 휘종과 흠종을 발아래로 조아리게 한 것도 종한이었지요.
종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개봉이 함락되기 전 강화특사로 파견된 송의 이절은
종한을 쳐다도 보지 못하고 벌벌 떨면서 무릎으로 기어서, 종한이 어떤 말을 하든 "네네"만 연발하였다고 하지요.

이런 종한을 유일하게 견제할 수 있었던 실력자가 바로 종망이었습니다.
대요 대송 전쟁에서 눈부신 전공으로 군사적 명망도 대단하였고, 아버지가 태조 아골타니
만에 하나 숙부 완안고가 죽고 나면, 형 종간이나 아니면 자신이 암반발극렬에도 올릴 수 있는 
충분한 능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요.

하지만, 송의 두 황제를 끌고 귀환한 두달 후 종망이 사망하게 됩니다.

금사 1127년 6월 기사中
경진일(庚辰日)에, 우부원수(右副元帥) 종망(宗望)이 훙(薨)하였다.

즉 1127년 6월을 기점으로 종한의 권력을 제어할 만한자가 거의 없다고 보여집니다.

송사전 금열전에 종한의 권력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송사 금열전中
종망(宗望)이 제(帝/남송 고종)가 즉위한 소문을 듣고 상황(上皇/휘종)을 돌려보내어 강화하려 하였는데, 
종한(宗翰)이 허락하지 않더니 마침 종한이 죽으므로 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이때에 종한이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어서 오걸매도 영을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일설에 금 태종이 황실 창고에서 술을 꺼내 먹다가 걸려서 신하들에게 곤장 20대를 맞았다는 말이 있어서
금사를 뒤적여 보았으나, 찾질 못하겠더군요.

중국 사이트에서 검색해보니, 재물을 사적으로 사용하여 신하들이 곤장 20대를 치고, 죄를 청하였다 뭐 이런 글귀가 보이더라고요. 이때의 이것을 주도한 신하가 바로 종한입니다.

사실 오걸매는 완안고가 1130년 9월에 동생 완안고가 사망하자, 내심 아들을 암반발극렬로 세우고자 하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뜻대로 될 수가 없었죠. 바로 종한이 가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금사 1130년 9월 기사中
신유일(辛酉日)에, 암반발극력(諳班勃極烈)과 도원수(都元帥)인 고(杲)가 훙(薨)하였다.


송사전 금열전 1135년 기사中
1135년, 오걸매(吳乞買)가 죽었다. 오걸매가 사냥을 좋아하지 않고 음악을 매우 즐겼으며, 국가를 경제하는 규모가 상당히 볼 만하였다. 나이 61에 13년을 참위하였고, 천회로 개원하였으며, 시호는 문열황제(文烈皇帝), 묘호는 태종(太宗), 능호는 공릉(恭陵)이다.
아골타(阿骨打)의 손자 합라(合剌)가 즉위하였다. 합라의 개명은 단(亶)인데, 풍왕(豐王) 승과(繩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포채씨(蒲蔡氏)이다.
과거 오걸매(吳乞買)의 아우 고(杲)가 죽었을 적에 종한(宗翰) 등이 보반발극렬(譜班勃極烈)의 직위를 오래 비워 둘 수 없다 하여, 합라로 보반발극렬을 삼자고 청하므로 오걸매가 마지못해 따랐었다. 오걸매가 일찍이 이 직위에 있다가 고에게 물려 준 것으로 보아 이사(貳嗣)의 자리인 듯하다. 유예(劉豫)에게 명하여 이제 부하는 ‘신’이라 일컫고 ‘자’라 일컫지 말라 하였다. 상황(上皇)이 오국성(五國城)에서 죽으니, 사신을 보내어 치제(致祭)ㆍ치부(致賻)하였다.


아골타는 형 오아속에게서 부족장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자식에게 넘기지 않고 동생 오걸매에게 넘겼습니다.
오걸매도 형제 상속의 예를 따라 친동생 완안고를 황위 계승 1순위인 암반발극렬에 임명한 것이지요.
오고내의 적자 중 막내였던 영가가 형의 아들 오아속에게 부족장을 이어준 전대의 예를 따른다면 
적자 중 막내인 완안고가 죽고 나면 아골타의 적손 5남 종준에게 물려주는게 원칙이었겠지만,
실질적으로 종준은 1124년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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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요약

오걸매가 다음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지만 태클을 건자가 바로 종한이다.
2년 공석 끝에 종한은 아골타의 적손 완안단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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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안고가 죽고 2년 동안 암반발극렬은 공석이 됩니다.
즉 이 자리를 두고 오걸매와 종한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고 생각되네요.
이후 1132년 4월에 드디어 완안단을 암반발극렬로 세우면서, 종한도 좌부원수에서 도원수로 승진시킵니다.
도원수가 군사 총사령관으로 실직인 것처럼 보이지만, 완안고가 도원수였음을 감안하면
지방에 나가 땅을 다스리며 군사를 보유하고 있는 좌, 우 부원수가 더욱 실직인 듯 보입니다.

즉 어린 완안단을 암반발극렬에 세운 종한은 이일로 인해 군사적 실권을 제한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볼 때는 오걸매가 완안단을 암반발극렬로 세우면서 종한의 군사적 실권과 딜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1132년 4월 기사중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과 좌부원수(左副元帥)인 종한(宗翰)이 경사(京師/수도)에서 조(朝)하였다.
경오일(庚午日)에, 새롭게 태조(太祖)의 손자 단(亶)을 암반발극렬(諳班勃極烈)로 삼고, 
황자(皇子) 종반(宗磐)을 국론홀로발극렬(國論忽魯勃極烈)로 삼았으며, 
국론발극렬(國論勃極烈) 종간(宗幹)을 국론좌발극렬(國論左勃極烈)로 삼고, 
이뢰발극렬(移賚勃極烈) 겸 좌부원수(左副元帥) 종한(宗翰)을 국론우발극렬(國論右勃極烈) 겸(兼)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우부원수(右副元帥) 종보(宗輔)를 좌부원수(左副元帥)로 삼았다.

즉 실권을 아골타의 3남 종보에게 맡기면서, 종한을 중앙으로 불러들여 국론우발극렬 및 도원수로 삼아 버립니다.
즉 국정을 수행케 하는 재상직에 임명하면서 군사일에는 손을 떼게 한 것이지요.

한편 오걸매와 종한의 원수부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도 있던 듯이 보입니다.

1133년 2월 기사中
2월 기해일(己亥日)에, 원수부(元帥府)에서 말하길
「조(詔)를 받들어 군사(軍士)를 진휼(賑恤)코자 하는데, 
   유사(有司)에서 신(臣)이 두려워하여 전폐(錢幣/자금)가 장차 이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請)하옵건데 원수(元帥) 이하(以下)에서부터 녹(祿)을 받는 자의 돈을 걷어 (진휼 자금으로써) 공급할까 합니다.
조(詔)하여 말하길
관(官)의 부고(府庫/곳간, 창고)가 있는데도 신하(臣下)에게서 취(取)한다면, 이에 어떻게 다스리겠다는 것이냐?
   그 모두를 관에서 공급토록 하라.
*당시의 도원수(都元帥)는 종한(宗翰), 좌부원수(左副元帥)는 종보(宗輔)

요약 : 
오걸매 → 군사들 밥줘! 
종한 → 왜 돈도 안 주면서 밥 사주라 하는데?, 그냥 부하들에게 삥 뜯겠음
오걸매 → 아 창고에 돈 좀 있잖아, 잔말 말고 네 돈 풀어서 밥줘!
종한 → 아놔, 내가 인사계(행보관)라니!


송사전 금열전에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있는데, 바로 종한이 군사적 실권을 쥐고 있을 때 주변에서 반란을 일으키라 부추겼다는 내용입니다.

송사전 금열전中
1137년, 과거에 오걸매가 종한(宗翰)을 불러 정승을 삼고부터 병권(兵權)을 상실하였는데,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 고경예(高慶裔)가 장(贓)으로 해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을 적에 종한이 경예를 찾아가서 울며 영결하자, 경예가 종한을 보고 “당신이 일찍이 나의 말을 받아들였더라면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났겠는가?” 한 것으로 보아 경예가 언젠가 종한에게 반란을 획책시킨 듯하다. 종한이 걱정하다가 밥을 굶고 죽었다. 

즉, 오걸매는 황제의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해 종한의 뜻대로 완안단을 다음 황제로 삼았으나,
어린 완안단이 종한에게 휘둘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군사적 실권을 거두고 재상으로 삼았다는 것이지요.
이에 희종이 등극하자마자, 희종은 종한의 측근을 쳐버렸고, 종한은 토사구팽을 당하자
근심하여 단식하여 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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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요약

-오걸매는 완안단을 후계자로 삼으면서, 종한과 딜을 하여 그의 군사적 실권을 제한했다.
-종한이 완안단을 세운 연유는
   1. 태조의 적손을 세움이 도리에 맞다
   2. 어린 황제를 세우고 내가 실권을 차지하겠다.
   3. 1+2 둘다이다
-종한은 한때 주변에서 제위 찬탈을 권유 받았다.
-결국 종한은 희종에게 토사구팽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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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오걸매와 종한의 후손의 씨가 마르다

태조 아골타의 장남 종간의 둘째 아들 완안량(4대황제 폐황제 해릉양왕)이 희종 완안단을 죽이고 황제에 오른지 2년 뒤

송사전 금열전 1150년 기사中
종실(宗室)인 오걸매ㆍ종한(宗翰)의 자손을 씨도 남기지 않고 무참히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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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한 줄 요약 : 
종한 → 내가 이 가문 적장자인데.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겠어!
완안단 → 내가 태조 황제의 적손인데.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완안량 → 내가 태조 황제의 장남 가문인데. 나를 안 세워? 다 죽었어!

P.S) 조회 수 한자리에 도전해봅니다.^^;
       이런 재미없는 긴 글을 읽으실 분이 과연 계실는지....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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