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단군의 연대를 고증한 안정복 선생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기도 한 안정복 선생이

동사강목 부록 고이(考異)편에 단군의 연대에 대해 고증한 부분이 있어 올립니다.^^

출처 : 고전번역원

동사강목 부록 고이(考異) 中

 

단군(檀君) 원년 무진은 당요(唐堯/요임금) 이십 오년에 해당한다 
 

《위서(魏書)》를 상고하면,

“2천 년 전에 단군 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하고 나라를 열어 그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으니 요(堯)와 동시이다.”
하여, 중국사(中國史)의 기록이 동사(東史)와 대략 같다. 단 동사에는 지나치게 과장하고 허황하게 썼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모호하게 기연미연한 것으로 돌림은 옳지 못하다.
또 상고하건대, 고려의 중 무극(無極)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찬술(撰述)하면서 《고기(古記)》 《단군고기(檀君古記》 를 인용하여,

“단군(檀君)은 당요(唐堯) 50년 경인(庚寅)에 즉위하였다.”
하고, 그 자주(自註)에,

“요(堯)의 원년은 무진(戊辰)이므로 50년은 정사(丁巳)요 경인이 아니다.”
하여, 《경세서(經世書)》와 다르니 필시 다른 일종의 책일 것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과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모두,

“당요 무진년에 단군이 평양(平壤)에 도읍하였다.”
하였는데, 요(堯)의 즉위가 상원갑자(上元甲子) 갑진(甲辰)에 있었으니 무진(戊辰)은 곧 25년이다.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경세서보편(經世書補編)》에도 요(堯)의 25년 무진으로 단군의 원년을 삼았기 때문에 그것을 따른다.


[주D-001]상원갑자(上元甲子) : 술가(術家)에서 1백 80년으로 1주(周)를 삼고, 그 1주를 셋으로 나누어 상원갑자(上元甲子)ㆍ중원갑자(中元甲子)ㆍ하원갑자(下元甲子)로 만든 것 중의 하나.

 



단군(檀君)의 이칭(異稱)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렸기 때문에 단군(檀君)이라 칭한다.”
하였고, 《동국통감(東國通鑑)》 및 《고려사》 지리지에도,

“단목(檀木) 아래에 내렸기 때문에 단군이라 칭한다.”
하였기에, 《동국통감》 및 《고려사》 지리지를 따른다.

 



왕검(王儉) 
 

《고기(古記)》 및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魏書)》에 모두,

“단군의 이름은 왕검(王儉)이다.”
하고, 《삼국사(三國史)》에는,

“평양(平壤)이란 본래 선인(僊人) 왕검의 집이다.”
하고, 단군의 이름이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취택하기는 하였으나 의심이 간다.
【안】 《삼국사》에는,
“왕(王)이 되어 왕검(王儉)에 도읍하였다.”
하였다.

【안】《한서(漢書)》에는,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을 격파하고 점차 진번(眞番)과 조선 제이(朝鮮諸夷) 및 전에 연(燕)ㆍ제(齊)로부터 망명해 온 사람들을 역속(役屬)시켜 이에 왕이 되고 왕검에 도읍하였다.”
하였다. 지금은 그 윗문장을 끊어버리고 다만,
“왕이 되어 왕검에 도읍하였다.”
하는 것만 썼으므로 문리가 통하지 않는다. 김부식(金富軾)의 소략함이 이와 같은 데가 많으니 이제 변별하지 않을 수 없다.
검(儉)은 《한서》에 험(險)으로 되었으나, 지금 동사(東史)의 기록을 따라 검으로 한다.

 

백성을 가르쳐 머리를 땋고 모자를 쓰게 하다 
 

이 조항은 홍씨(洪氏 만종(萬宗))의 《동국총목(東國摠目)》에서 나왔는데, 무슨 책을 근거한 것인지는 모로겠으나 필시 근거가 있을 것이다. 또 개국(開國) 초기에 반드시 백성을 가르치는 절차가 있었으리라 믿어 그대로 따른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