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 시조 함보에 관한 기록들

 금나라 시조로 알려진 함보가 고려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있어

몇몇 기록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선 여러 기록을 종합해보면 함보라는 말은 고려에서 먼저 나온게 아니라, 금에서 스스로 나온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사적에서 금사를 빌어 함보를 언급하였고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온것은 1109년 6월에 금의 사신 요불에 의해서이며
요불 또한 자신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 태사 영가(盈歌)>가 그랬다고 합니다.
즉 금에서 스스로 언급한것을 부정할 만한 근거가 딱히 있을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황해도中
○ 《금사(金史)》를 보면, “금 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인데 처음 고려에서 올 때 나이 벌써 60여 세였다. 형 아고내(阿古迺)는 불교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고 따르려 하지 않으니 아우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함보가 완안부(完顔部)의 복알수(僕斡水) 물가에 살면서, 나이 60세가 되도록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에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가 오로(烏魯)이고 다음이 알로(斡魯)였는데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니, 금 나라의 선조가 고려 사람인 것은 의심 없는 일이다. 다만 금준이나 극수 중 누가 저 《금사》에서 말한 함보인지는 상고할 길이 없다.


해동역사 지리고 中
《금사》 세기(世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가 처음 고려에서 올 적에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의 물가에서 살았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해동역사 인물고 中
금(金)나라 시조(始祖) 함보(函普) 
○ 금나라의 시조 함보는 고려 사람이다. 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적에 나이가 이미 60여 세였다. 그의 형인 아고내(阿古迺)는 부처를 좋아하여 고려에 머물러 있으면서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후세의 자손들 중에 반드시 서로 모여서 살게 할 자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갈 수가 없다.” 하였다. 이에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와 함께 왔다. 시조는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 가에서 살고, 보활리는 야라(耶懶)에서 살았다.
그 뒤에 호십문(胡十門)이 갈소관(曷蘇館)의 지역을 들어 태조(太祖)에게 귀의하면서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 조상은 삼형제로, 서로 이별하여 떠나갔다.” 하였는바, 대개 스스로 아고내의 후예라고 한 것이다. 석토문(石土門)과 적고내(迪古乃)는 바로 보활리의 후예이다. -또 《금사(金史)》 제66권 호십문열전(胡十門列傳)에 이르기를, “호십문이란 자는 갈소관(曷蘇館) 사람이다. 아버지인 달불야(撻不野)가 요(遼)나라를 섬겨 태위(太尉)가 되었다. 고영창(高永昌)이 동경(東京)에 웅거하면서 갈소관 사람을 불러들이려 하였으나, 호십문이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호십문이 그의 족인(族人)들을 불러 모의하기를, ‘우리의 먼 조상 세 분 형제께서는 모두 고려에서 나왔다. 지금 황제의 할아버지는 여직(女直)으로 들어가고, 나의 할아버지는 고려에 머물렀다. 그러니 고려로부터 가서 요나라에 귀의하겠다. 나와 황제는 모두 세 분 할아버지의 후예이다.’ 하였다. 호십문이 스스로 이와 같이 말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아고내(阿古迺)의 후예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시조는 완안부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그 부(部) 사람들은 양 족속 간에 사이가 나빠 서로 싸웠는데, 이를 풀 길이 없었다. 완안부의 사람이 시조에게 일러 말하기를, “만약 이 원한 관계를 풀게 해서 양 족속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지 않게 한다면, 부에 나이 60인데도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진 여인이 있는데, 그와 짝을 맺어 주겠다.” 하였다. 이에 시조가 그러겠다고 승낙하고, 직접 가서 깨우쳐 주니, 원한 관계에 있던 집 사람들이 약속한 대로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부의 사람들이 신복(信服)하면서 청우(靑牛) 한 마리를 주어서 사례하였으며, 아울러 60세 먹은 신부에게 장가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시조가 청우로써 납빙(納聘)하는 예를 갖추고 신부를 맞아들였다.
그 뒤에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오로(烏魯)이고 차남은 알로(斡魯)이며, 딸 하나는 주사판(注思板)이다. 이에 드디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천회(天會) 14년(1136, 인종14)에 경원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하였다. 《금사(金史)》


고려사절요 1109년 6월 기사中
1109년 6월기사
요불(여진사신) 등이 상주하여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사 영가(盈歌)가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조종은 대국(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기까지 귀부해야 한다 하였고, 지금 태사 오아속이 역시 대국을 부모의 나라로 알았습니다. 

고려사절요 1115년 1월 기사中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 우리나라 평주(平州 지금 황해도의 평산)의 중 금준(今俊)이 도망하여 여진으로 들어가서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이가 금나라의 시조라 한다."고 하며,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가 처음으로 여진에 들어가 아지고촌에 살면서 여진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古乙太師)라고 하며 고을(古乙)이 활라태사(活羅太師)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를 핵리발(劾里鉢), 막내아들을 영가(盈歌)라 하였는데, 영가가 제일 영웅호걸스러워 여러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으니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烏雅束)이 지위를 계승하고 오아속이 죽으니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송사 금열전中
시조(始祖)는 보함(普函)인데, 나이 60여 세에 고려를 떠나 완안부(完顔部) 복간수(僕幹水) 유역에 정착해 살며 어떤 노부인에게 장가를 드니, 그도 60여 세였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으며, 경원 황제(景元皇帝)라고 추시(追諡)했다.


P.S) 본문의 요지는 금 시조의 출신이 고려냐? 아니냐? 에 대한 기록에 대한 소개 일뿐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말씀하셨듯이 금의 시조가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금나라가 고려사의 일부가 되는것은 절대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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