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宋史) 후몽(侯蒙) 열전中
宋江寇京東,蒙上書言:
「江以三十六人橫行齊、魏,官軍數萬無敢抗者,其才必過人。
今青溪盜起,不若赦江,使討方臘以自贖。」
帝曰:
「蒙居外不忘君,忠臣也。」
송강(宋江)이라는 도적(盜賊)이 경동(京東)에 있었는데, 후몽(侯蒙)이 상서(上書/임금께 글을 올림)하여 말하길
「송강(宋江)이 (휘하 장수) 36인으로써 제(齊)와 위(魏)에 횡행(橫行/거리낌 없이 행동함)하여,
관군(官軍) 수만(數萬)이 감(敢)히 대항(敢抗)하는 자가 없으니,
그 재능(才能)이 반드시 과인(過人/보통 사람을 뛰어넘음)합니다.
지금 청계(青溪)에 도기(盜起/도적이 일어남)하니, 송강(宋江)을 사면(赦免)함만 못하며,
자속(自贖/스스로 속죄함)으로써 송강(宋江)으로 하여금 방랍(方臘)을 토벌해야 합니다.」
제(帝/휘종)가 말하길
「후몽(侯蒙)은 거외(居外/바깥에 거주함)하면서도 임금을 잊지 않았으니, 충신이로다.」
→ 송강과 휘하 장수 36인이 이끄는 병력이 수만 관군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
방랍을 토벌할 때 송강을 조정에 회유시켜 토벌군에 합류시켜야 한다.
송사 휘종본기 1121년 2월 기사中
二月甲戌,降詔招撫方臘。
是月,方臘陷處州。
淮南盜宋江等犯淮陽軍,遣將討捕,又犯京東、河北,入楚、海州界,命知州張叔夜招降之。
2월 갑술일(甲戌日)에, 항조(降詔/조서를 내림)하여 방랍(方臘)을 초무(招撫/불러 타이름)하였다.
이달에, 방랍(方臘)이 처주(處州)를 함락(陷落)하였다.
회남(淮南)의 도적(盜賊) 송강(宋江) 등이 회양군(淮陽軍)을 범(犯)하니,
견장(遣將/장수를 보냄)하여 토포(討捕/토벌하여 사로잡음)하게 하였는데,
또 경동(京東)과 하북(河北) 및 입초(入楚)와 해주(海州)의 경계(境界)를 범(犯)하니,
명(命)하여 지주(知州) 장숙야(張叔夜)에게 초항(招降/불러 항복시킴)하게 하였다.
→ 장숙야가 송강을 조정에 투항시켰다.
송사(宋史) 장숙야(張叔夜) 열전中
宋江起河朔,轉略十郡,官軍莫敢嬰其鋒。
聲言將至,叔夜使間者覘所向,賊徑趨海瀕,劫钜舟十餘,載鹵獲。
於是募死士得千人,設伏近城,而出輕兵距海,誘之戰。
先匿壯卒海旁,伺兵合,舉火焚其舟。
賊聞之,皆無鬥志,伏兵乘之,擒其副賊,江乃降。
加直學士,徙濟南府。
송강(宋江)이 하삭(河朔)에서 일어나, 10군(郡)을 전략(轉略/옮겨 다니며 약탈함)하니,
관군(官軍)이 그 예봉(銳鋒)을 감(敢)히 어린아이처럼 막지 못하였다.
(조정의) 성언(聲言/성명)이 장차(將次) 이르자,
장숙야(張叔夜)가 간자(間者/첩자)로 하여금 소향(所向/향하여 가는 곳)을 엿보았는데,
적(賊)이 해빈(海瀕/해변가)으로 경추(徑趨/지름길로 달려감)하자,
거주(钜舟/큰배) 십여 척으로 위협하여, 노획(鹵獲)하여 실었다.
이로부터 사사(死士/죽기를 각오한 무사)를 모집(募集)하여 천명을 얻으니,
근성(近城/가까운 성)에 설복(設伏/복병을 둠)하고, 경병(輕兵)으로서 출발하여 거해(距海/바다에 도달함)하고는,
유인(誘引)하여 싸웠다.
먼저 장졸(壯卒/굳센 병졸)을 해방(海旁/바다 근방)에 숨겼는데, (기회를) 노리다 병합(兵合)하여,
거화(舉火/불을 일으킴)하여 그 배를 불살랐다.
적(賊)이 듣고는, 모두 투지(鬥志)가 없었는데, (장숙야의) 복병(伏兵)이 (기세를) 타고, 그 부적(副賊/부두목)을 사로잡으니,
송강(宋江)이 곧 항복하였다.
(장숙야에게) 직학사(直學士)를 더하고, (장숙야의 임지를) 제남부(濟南府)로 옮겼다.
→ 장숙야가 천명의 의용군으로 송강을 토벌하러 가서, 계략으로 부두목을 사로잡으니
송강이 곧 항복하였다.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권52 中
宣和二年方臘反睦州陷溫台婺處杭秀等州東南震動以貫為江浙宣撫使領劉延慶劉光世辛企宗宋江等軍二十餘萬往討之
선화(宣和) 2년 (1120년) 방랍(方臘)이 목주(睦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온주(溫州), 태주(台州), 무주(婺州), 처주(處州), 항주(杭州), 수주(秀州) 등의 주(州)를 함락하니 동남(東南)이 진동(震動)하였고
동관(童貫)을 강절선무사(江浙宣撫使)로 삼아 유연경(劉延慶), 유광세(劉光世), 신기종(辛企宗), 송강(宋江) 등
군(軍) 20여만(萬)을 거느리고 왕토(往討/가서 토벌함)하게 하였다.
→ 1120년 10월에 화석강의 폐해를 빌미 삼아 목주(睦州)에서 난을 일으킨 방랍의 농민군은
순식간에 6만 이상으로 늘어나 강남 일대를 휘저었습니다.
이 난의 결과로 송사에서는 200만의 백성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1121년 2월에 적진 앞에 당도한 동관의 군대는 총 20만이었으며 군의 구성은 아래와 같습니다.
송사 동관[방랍] 열전中
會方臘起睦州,勢甚張,改江、浙、淮南宣撫使,即以所聚兵帥諸將討平之。
방랍(方臘)이 (무리를) 모아 목주(睦州)에서 일어나니, 기세(氣勢)가 심(甚)히 성(盛)하였는데,
(동관을) 강(江)과 절(浙) 및 회남(淮南) 선무사(宣撫使)로 고쳐,
곧 제장(諸將)을 인솔하여 병력을 모아 토평(討平/토벌하여 평정함)하게 하였다.
徽宗始大驚,亟遣童貫、譚稹為宣撫制置使,率禁旅及秦、晉蕃漢兵十五萬以東,且諭貫使作詔罷應奉局。
휘종(徽宗)이 비로소 대경(大驚/크게 놀람)하여, 긴급(緊急)하게 동관(童貫)과 담진(譚稹)을 선무제치사(宣撫制置使)로
삼아 보내고, 금려(禁旅/금군禁軍)와 함께 진번(秦蕃)과 진번(晉蕃)의 한병(漢兵) 15 만을 인솔(引率)하여 동진하게 하였고,
또한 동관(童貫)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지어 응봉국(應奉局/화석강을 주관하던 관청)을
파(罷)하여 (방랍을) 타이르게 하였다.
여기서 송강의 병력을 대강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단 방랍의 난에 투입된 병력은 총 20만입니다.
1. 동관이 서쪽의 진(秦)과 진(晉) 지역에서 서하와의 전쟁을 통해 몸소 키워오던
최정예 향병 + 조정의 금군 → 총합 15만
2. 기타는 동관이 강, 절, 회남 선무사로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 5만
이들은 유연경, 유광세, 신기종, 송강 등이 거느린 병력으로 추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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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 섬서성(陝西省) 부곡현(府谷縣)에서 발견된 이 절가존(折可存) 묘지명은
역사적 의의가 대단하다고 하네요.
소설 수호지속의 이야기로만 치부되던 일들이 실제로 송강군이 방랍의 난에 투입되었고,
방랍의 난이 진압되자마자 휘종의 명으로 처형되었다는 것을
증빙할 수 있는 생생한 자료라는 것이지요.
송고무공대부하동제이장절공묘지명(宋故武功大夫河東第二將折公墓志銘) 中
方臘之叛,用第四將從軍,諸人藉才,互以推公,公遂兼率三將兵。
奮然先登,士皆用命,臘賊就擒,遷武節大夫。
班師過國門,奉禦筆捕草寇宋江,不逾月,繼獲,遷武功大夫。
방랍(方臘)의 반란(叛亂)에서, 제(第) 4장(四將)으로 임용(任用)되어 종군(從軍/군을 따라 전쟁에 나감)하였는데,
제인(諸人/많은 사람)이 자재(藉才/재주를 업신여김)하여, 서로 공(公)을 천거(薦擧)하니,
공(公)이 드디어 3장(將)의 병(兵)을 겸솔(兼率/겸하여 인솔함)하였다.
분연(奮然)히 선등(先登/선봉)하여, 병사(兵士)가 모두 용명(用命/윗사람의 명령을 따름)하니,
납적(臘賊/방랍)을 취금(就擒/나아가 사로잡음)하니, 무절대부(武節大夫)로 (관직을) 옮겼다.
반사(班師/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옴)하여 국문(國門/도성문)을 지났는데,
초구(草寇/도적) 송강(宋江)을 사로잡으라는 어필(禦筆/임금의 친필)을 받들어, (송강을 사로잡음을) 달을 넘기지 않았고,
(나머지 무리도) 계획(繼獲/계속하여 사로잡음)하니, 무공대부(武功大夫)로 (관직을) 옮겼다.
여기서 잠깐... [도둑 송강]과 [토벌 장수 송강]이 동명이인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알아보니
아마 근거가 [미야자키 이치사다]라는 작가가 쓴
[중국사의 大家, 수호전을 歷史로 읽다]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책의 간략한 내용은 구글에 <중국사의 大家, 수호전을 歷史로 읽다> 검색하시면 대략적인 내용은 알 수 있을듯싶습니다.
저도 인터넷(위키 등에)에 4월26일 절가존이 궁궐문을 들어서다가 송강을 죽이라는 명을 받고
되돌아가 4월 중에 송강을 죽였다라고 떠돌고, 위의 책에 또 그렇게 써있길래
비문에 날짜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헌데, 전혀 나와 있지 않더군요.
헌데 왜 4월 26일인가? 의문이 들어 송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이 기록 때문이었습니다.
송사 휘종 본기 1121년 4월 기사中
夏四月庚寅,忠州防禦使辛興宗擒方臘於青溪
여름 4월 경인일(庚寅日)에, 충주(忠州) 방어사(防禦使) 신흥종(辛興宗)이 방랍(方臘)을 청계(青溪)에서 사로잡았다.
이걸 제가 저번에 올린 연표로 확인해 보면 4월 26일입니다.
1114년~1127년간 달력 (8) 1121년 http://cafe.naver.com/booheong/86809
하여 다시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책 내용을 살펴보니,
1→ 묘비에 기록되어 있는 4월 26일에 개봉에서 절가존이 명을 받고 4월 중에 송강을 죽였다?
2→ 속자치통감장편기사본말(續資治通鑑長篇紀事本末)을 살펴보면 정부군이 4월에 방랍을 죽이고
6월까지 잔당을 토벌하였다? 정부군 명단 중에 송강이 있다.
3→ 3일 만에 개봉에서 지방에서 토벌중인 송강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4→ 고로 도적 송강과 토벌군 송강은 동명이인이다.
일단 여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존재합니다.
1→ 묘비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송사에 4월 26일에 청계에서 방랍을 사로잡았다고 나옵니다.
청계는 방랍의 난 초기 1120년 11월에 방랍이 함락한 지역입니다.
즉 4월 26일 현지에서 방랍을 사로잡은 것이지요.
2→ 6월까지 정부군이 현지에 있었다는 것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송사의 기록에 의하면 총사령관 동관은 곧장 7월에 개봉에 입성하였지만,
송사에 의하면 정부군 일부는 계속 남아 1122년 3월까지 잔당을 계속 토벌하였기 때문이지요.
또한 위책의 고증 오류로 인한 문제로 속자치통감장편기사본말(續資治通鑑長篇紀事本末)을
좀 더 살펴보고 이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속자치통감장편습보에는 1122년 6월 24일까지는 송강이 현지에서 잔당 토벌 중인 것은
확인 하였습니다.
3→ 총사령관 동관과 휘하 장수들이 방랍을 끌고 개봉에 입성한 날은 1121년 7월 26일입니다.
4월 26일부터 총 118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또한 방랍을 처형한 날은 1121년 8월 24일입니다.
송사 휘종 본기 1121년 7월 기사中
秋七月戊子,童貫等俘方臘以獻。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에, 동관(童貫) 등이 사로잡은 방랍(方臘)을 바쳤다.
송사 휘종 본기 1121년 8월 기사中
八月乙巳,以童貫為太師,譚稹加節度。
丙辰,方臘伏誅。
8월 을사일(乙巳日)에, 동관(童貫)을 태사(太師)로 삼고, 담진(譚稹)에게는 절도사(節度使)를 더하였다.
병진일(丙辰日)에, 방랍(方臘)을 복주(伏誅/형을 내려 죽임)하였다.
사소한 고증을 무시하고, 순식간에 동명이인으로 탈바꿈 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물론 이것으로 인해 제가 [도적 송강]과 [토벌군 송강]이 동명이인이 100% 아니다고
단정 지을 순 없습니다.
역사에 분명하지 않은 것을 단정하는 것만큼 어렵고도 옳지 않은 것은 없으니까요.
속자치통감장편습보를 살펴보면 송강에 관한 기사가 여럿 보입니다.
상세한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지요. 대략 읽어보니 2월에 투항한 송강군이 동관을 따라 진군하여
4월부터 전투에 배치된 것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속자치통감장편습보 1121년 4월 24일 기사中
戊子。初,童贯与王禀、刘镇两路预约会於睦、歙间,分兵四围,包帮源洞於中,同日进师。至是,王禀等已复睦州,将至洞前;刘显等已复歙州,(案:三月戊申,官军复歙州。辛亥,刘镇、杨可世至歙之潘村。此“刘显”疑“刘镇”之误。) 驻军洞后。且密谕之,溇日既定,当纵火为号,见焚燎烟升,则表悰夹攻,仍面缚伪囚,上副御笔四围生禽之策。刘镇将中军,杨可世将后军,王涣统领马公直并裨将赵明、赵许、宋江,既次洞后,而门岭崖壁峭拔,险径危侧,贼数万据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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刘镇将中军,杨可世将后军,王涣统领马公直并裨将赵明、赵许、宋江,既次洞后,而门岭崖壁峭拔,险径危侧,贼数万据之。
유진(刘镇)을 중군(中军)의 장(将)으로, 양가세(杨可世)를 후군(后军)의 장(将)으로,
왕환(王涣)이 마공직(马公直)과 더불어 비장(裨将) 조명(赵明)과 조허(赵许) 및 송강(宋江)을 통령(统领/통솔)하여,
이윽고 동굴의 뒤에 머물렀는데,
그런데 문령(门岭)의 애벽(崖壁/절벽)이 초발(峭拔/높고 가파름)하고, 험경(险径/험한 길)이 위측(危侧/위태롭고 아련함)하여, 적(贼) 수만(数万)이 근거(根據)하였다.
속자치통감장편습보 1121년 6월 기사中
六月,己亥,姚平仲破贼金像等三十馀洞。
辛丑,辛兴宗与宋江破贼上苑洞,姚平仲破贼石峡口,贼将吕师囊弃石城遁走,擒其伪太宰吕助等。
6월, 기해일(己亥日)에, 요평중(姚平仲)이 금상(金像)등 30여 동굴을 파적(破贼/적을 격파함)하였다.
신축일(辛丑日/6월 24일)에, 신흥종(辛兴宗)이 송강(宋江)과 더불어 상원동(上苑洞)에서 파적(破贼/적을 격파함)하였고,
요평중(姚平仲)이 석협구(石峡口/골짜기의 돌입구)에서 파적(破贼/적을 격파함)하니,
적장(贼将) 여사낭(吕师囊)이 석성(石城)을 버리고 둔주(遁走/도망쳐 달아남)하였는데,
그 가태재(伪太宰/거짓 태재/방납이 자칭 나라를 세우고 재상을 세웠음) 여조(吕助) 등을 사로잡았다.
속자치통감장편습보 1121년 4월 강목中
《十朝纲要》亦载三年六月辛丑,辛兴宗与宋江破贼上苑洞。
是宋江之讨方腊固有明证,而毕氏乃疑《童贯别传》为误,其说殊未当也。
《십조강요(十朝纲要)》에 또한 실리기를 (선화) 3년(1121년) 6월 신축일(辛丑日/6월 24일)에,
신흥종(辛兴宗)이 송강(宋江)과 함께 상원동(上苑洞)에서 파적(破贼/적을 격파함)하였다.
이는 송강(宋江)이 방석(方腊)을 공격한 고유(固有)의 명증(明证/명백한 증거)이니,
이에 이름에 대한《동관별전(童贯别传)》의 오류의 의심(疑心)을 끝내니, 그 설(说)이 다르지 않음이 마땅하다.
결론
1. 회남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송강은 휘하에 36명의 장수가 있었다.
2. 송강이 10여 군을 옮겨 다니며 약탈하였다.
3. 수만 명의 관군 중에 감히 송강군에게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4. 후몽은 송강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송강을 조정에 투항시켜
방랍의 토벌에 투입하자고 휘종에게 건의했다.
휘종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후몽을 칭찬하였다.
5. 휘종의 명을 받은 장숙야가 의용군 1천 명을 모집하여 계략으로
송강군의 부두목을 사로잡았다. 이에 1121년 2월에 곧바로 송강이 투항하였다.
송사 본기에는 조정의 명에 따라 장숙야가 송강을 투항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도적 송강과 토벌군 송강의 동명이인설은 확답하진 못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수많은 사서의 정황상 동명인이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6. 동관의 20만의 토벌군 중 서하와의 전쟁에서 단련된 진진 지역의 향병과 중앙의 금군은
총 15만이다.
7. 나머지 5만은 장, 절, 회남에서 모은 향병이다. 이 중에 송강군도 포함되어 있다.
8. 송강의 직책은 비장이다.
9. 1121년 2월부터 시작된 동관의 토벌작전에서 전군의 비장으로 송강군은
4월 24일에 문령의 동굴의 후방에 배치되어 적 수만과 대치하였다.
10. 1121년 4월 26일에 신흥종이 청계에서 방랍을 사로잡았다.
11. 1121년 6월 24일 송강은 신흥종과 함께 상원동에서 적을 격파하고 방석을 사로잡았다.
1121년 6월 24일 요평중은 가태재 여조를 사로잡았다.
12. 1121년 7월 26일 동관은 개봉에 입성하여 휘종에게 방랍을 바친다.
13. 1121년 7월 26일 제3,4장인 절가존은 개봉성문에 도달하였는데,
송강을 제거하라는 휘종의 친필 명령을 받는다.
14. 회군 중으로 보이는 송강은 1121년 7월 26일 ~ 7월 30일 사이에
절가존에 사로잡혔는데, 필경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P.S) 방랍의 난이 진압된 후 수십 년이 흐른 뒤 남송의 홍매(洪邁)가 지은 소설책인 이견지(夷堅志)에는
1124년 조정에서 송강의 500 무리를 주살하였다고 나오는데,
비문에 의하면 송강의 주살 년도는 1121년이니, 이는 잘못된 것이지요.
다만 참고할 것이 송강의 500 무리라고 생각됩니다. 수만 명의 관군을 어린아이 취급한 송강의 총병력이
500이라 하기엔 너무 수호지스럽고, 너무 많다고 하기엔 20만 토벌군 중에 많아 봐야 5만을 넘지 못하고
그것도 3개 지역으로 나누면 많아야 1만 5천. 적으면 수백 정도 되지 않을까 추측해 보네요.
※ 급하게 번역하고 글을 작성하다 보니 오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틀린 점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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