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로서 주변국가에 대한 전한의 압도적인 괴력

 




















남월, 대완, 조선 등 여타 주변국들이 이제 좀 '나라' 라고 불릴 만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판인데


그 가운데서 수천만에 달하는 인구에 중앙집권화 된 조직, 한번의 원정에 수만 대군을 동원하는 수준인데



대완 원정과 흉노 원정 모두 어마어마하긴 매한가지인데 전자를 성공시키려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타지키스탄 & 이란 근처까지 군사를 보내야 하고, 후자를 성공시키려면 고비 사막을 지나 수십만의 군대를 진격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한 세대를 한 전선에 투자해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을, 동일한 시대에 양쪽으로 모두 군대를 보내면서 성공시키고...



이 성공 시키는 과정도 보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인데……


이를테면 대완 원정의 경우, 처음에 이광리라는 장군이 수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원정을 시도하지만 너무나 길이 멀어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병력이 소모되면서 군사 작전이 실패할 위기를 맞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한이 이를 해결한 방법은, 그냥 거리 + 지형적 어려움을 그걸 더 넘어서는 물량을 투입해서 가능케 해버렸습니다. 처음 공략에서 실패 한 후 6만 이상의 병력과 10만 마리의 소떼를 지원하여 성공시킨 겁니다.




후자의 경우는……개인적으로 이 부분 때문에 전한이 가진 힘이라는게 상상을 초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절정기에서 분열로 내려오고 있는 추세라고 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흉노를 상대로 막북으로 수십만의 군사를 보내는 대원정을 펼치면서 성과를 거두는데, 




사실 한나라보다 훨씬 관료제가 정비되고 체계적인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만 하더라도, 막북으로 진격하는건 상상을 초월할만큼 어려운 군사적 작전이었습니다. 혹독한 기후에 믿기 힘들만큼 심각한 보급의 어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은 '달아나면 그만' 이기에 성과를 거두는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를 잘 느끼려면 좋은 글이 있는데,



 ……실패한 원정의 여파로, 동원 초기부터 청군을 괴롭힌 심각한 보급 문제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18세기 중엽 청군이 보급상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때까지 이런 양상은 반복되었다. 외관상으로 굉장한 승리를 거둔 후에 변경을 재빨리 버리고 물러나면, 유목민 라이벌이 다시 등장했다. 가르단이 사정거리에서 벗어나자마자 청의 장수들은 퇴각을 시작했다. 


 선두의 퇴각군에는 심지어 말도 없었고, 무거운 식료품을 짊어진 낙타들을 이 굶어가는 병사들에게 내주어야 했다.(중략) 병력 유지를 위해서는 즉각 낙타 4백 마리 분량의 보급이 필요했다. 대신 황제는 대포까지 글꼬 국경 요새로 전면 철수하라고 명했고, 단지 4백의 병사만 남겨두었다. 가르단의 공식 항복 확약을 받기도 전에 이미 청군은 장성 밖의 값비싼 원정을 지속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보급 비용은 원정 초기부터 끝까지 따라다녔다. 만주인 장수 마스카는 베이징에서부터 동행한 군 경험을 일지로 썻는데, 장성 밖 극한의 기후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장자커우의 장성을 지나자 병사들을 우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비탈 아래 좁은 길을 따라 다바간 산맥을 횡단해야 했다. 산맥을 지나 초원에 들어서자 너무 건조해서 "복숭아만 한 우박"을 맞으며 우물을 파야 했다. 고비 사막에 들어서자 물이라고는 (동물의) 시체가 썩어가는 작은 웅덩이뿐이어서 마실 때 능수버들 뿌리가 딸려 들어와서 구토를 했고, 조그마한 마멋을 빼면 짐승과 새라고는 없었다.


 좋은 물은 모래층 1.5미터 아래에 있었다. 사막을 건너자 다시 사람과 말을 질식시킬 정도의 폭우 세례를 받았고, 식량이 떨어져 앞으로 나가알 수 없었다. 이런 환경들과 기진맥진한 투쟁을 벌인 뒤 사람과 말은 거의 기는 속도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고비 사막 3백 킬로미터를 건너는데 12일이 걸렸다. 다른 부대를 만나야만 가르단과의 전투를 전개할 수 있었다.


 말을 사고 먹이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다. 원정 전에 황제는 말 한 필의 가격을 12~20냥으로 책정하는 바람에 베이징에서 폭동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마도 지나치게 가격이 낮다 보니, 관리들이 고위 문사층을 포함한 현지 주민들의 말을 마구잡이로 징발했기 때문이다. 원정을 준비하면서 각 대장들은 말 열 필을 할당받아 먹인 후, 말이 살이 오르고 기운이 세지면 병부에 넘기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찰관들은 끊임없이 변경 주둔지의 여위고 굶주린 말들에 대한 보고를 올렸다.


 어떤 부대든지 잠깐 머무르는 사이에 사람과 말이 쓸 보급품이 바닥났다. 황제는 단 두달의 짦은 원정을 예상했지만, 친정을 발표하자마자 그는 지친 병사들과 말에 대한 소식을 듣기 시작한다. 지친 병사들은 천천히 행군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은 보급품을 현지인들의 '도움'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병사들이 몽골인에게 무기를 팔아 식량과 말을 사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병사들은 식량과 은을 같이 가지고 다녔는데, 은으로 물품을 구매하면서 현지 시장의 가격이 급등했고, 많은 병사들은 두 달분 식량을 지고 다니기를 꺼리거나 지고 다닐 힘이 없었다.


 황제는 퇴각한 장수들에게 분노해서 벌을 내리려 했지만, 이들이 심각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점은 인정했다. 그는 "중국은 군사를 징발하고 보급 계획을 세우는 일을 게을리할 수 없다." 고 강조한다. 중국의 서진 中 피터 C. 퍼듀





그나마 근세의 국가로 어마어마한 인구, 전성기에 한정하여 유기적이고 방대한 관료체계를 갖춘 청나라는 하북에서 신강에 이르는 수준의 광대한 보급선, 화약 무기들로 인한 군사적 불리함의 만회, 오랜 시간을 걸쳐 이루어진 러시아 - 몽골에 대한 외교전 등 여러가지 요인을 모두 성공시킨 후에야 외몽골 평정에 성공하고




반면에 그런게 부족하고, 사실 시대상 불가능하기도 했던 명나라는 영락제가 대규모 원정을 수차례 하고도 성과를 거의 거두지 못하고...







그런데 전한은 예수가 태어나기 백여년전에, 이걸 끝도 없는 물량으로 성공시키는데, 적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깊게 끌어들여, 보급선 조차 닿지 않는곳에서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살려 전멸시키는건 유목민의 주특기인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자진해서 적의 심장부로 진격해서 압도적인 물량과 물자의 힘으로 전투력을 유지하고 격파해버리는 겁니다.




특히 올린 지도 그림 중에 마지막 짤을 보면, 바이칼 호까지 이어진 진격로가 보이는데(곽거병의 원정), 저건 정말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가는 수준에...



불가능한 군사적 작전을 성공시킨것도 그걸 능가하는 수준의 물량으로 가능케 한 겁니다. 곽거병이 저기까지 진격하고 위청이 흉노 선우와 맞붙은 당시의 군사작전에서, 한군이 동원한 말의 숫자는 모두 14만 마리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 14만 마리의 말 중에 11만 마리가 죽었습니다. 그냥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숫자죠.





원정을 가능케 한 한가지 요인으로 저 시기에는 막북이 지금보다는 비교적 따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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