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여진족의 아골타가 금을 세우고 거란족의 요를 거세게 몰아붙이던 1117년,
여진족을 피해 바다로 도망친 사람들이 표류하여 송나라 땅에 이르게 되자,
휘종은 드디어 여진이 거란을 공격해 요동 땅을 이미 집어삼켰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에 서하와의 전쟁으로 일대의 군권을 휘어잡았던 희대의 환관 동관은
휘종이 천하를 얻게 될 것이라는 둥, 헛바람을 잔뜩 집어넣어 드디어 연운 16주를 되찾으려는
원대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고 하는데.......
바로 여진족과 손잡고 천조제 야율연희의 뒤통수를 치자!
이에 동관은 고약사 등에게 배를 타고 여진으로 가라! 라고 명령하였는데
바다를 건너 요동에 당도한 고약사가 순찰 중인 여진병사를 보자
심장이 꽁닥꽁닥 뛰는 바람에 그만 혼비백산하여 다시 송나라로 되돌아온 사건입니다 ㅎㅎ
빡친 동관은 다음 해 1118년에 여진말?을 할 줄 아는 마정(馬政)을 다시 보내
해상 동맹을 체결하지요.
거란국지(契丹國志) 천조황제(天祚皇帝) 1117년 기사中
宋詔童貫、蔡京議,遣人偵其實,委師中選將校七人,各借以官,用平海指揮兵船,載高藥師同往。
至海北,見女真邏者,不敢前,復回青州。
安撫崔直躬奏其事於宋,詔復委童貫措置,應借官過海人,悉寘之法。
別遣使女真,講買馬舊好。
송(宋)이 조(詔)하여 (휘종이) 동관(童貫)과 채경(蔡京)에게 의논(議論)케 하니,
(동관과 채경이) 사람을 보내 그 실태(實態)를 정탐(偵探)하게 하니,
위임(委任)받은 왕사중(王師中)이 장교(將校) 7인을 선발(選拔)하여, 각각 차관(借官)하여,
평해(平海/넓은 바다, 창해滄海)를 이용하여 병선(兵船)을 지휘(指揮)하게 하니,
(장교 7인이) 고약사(高藥師)를 싣고 동왕(同往/같이 감)하였다.
해북(海北)에 이르자, 여진(女真)의 순라(巡邏/순찰)하는 자를 보고는, 감(敢)히 앞에 나서지 못하고,
다시 청주(青州)로 돌아왔다.
안무사(安撫使) 최직궁(崔直躬)이 그 일을 송(宋)에 올리자, 조(詔)하여 다시 동관(童貫)에게 맡겨 조치(措置)하게 하니,
(이에) 응(應)하여 (동관이) 과해인(過海人/바다를 건너는 사람)에게 차관(借官)하여, 모두 법(法)에 치지(寘之/적용함)하였다.
별도로 여진(女真)에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고, 매마(買馬/말을 삼)하여 구호(舊好/예전부터 사이가 좋음)를 꾀하였다.
*삼조북맹회편에는 1117년 8월 3일에 등주수 왕사중이 장리(將吏) 7인을 선발하여 교위(校尉) 벼슬을 내리고, 고약사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게 하였는데, 8월 22일에 고약사 등이 하선하여 여진으로 갔다가 여진의 순찰자를 보고는 다시 되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음.
*삼조북맹회편에는 동관과 왕사중이 1118년 4월 27일에 외국어를 잘하는 마정(馬政)과 장교 7인, 병사 80인을 선발하여
바다를 건너 여진에 이르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음.
요약
동관 : 바다를 건너라 사신이여~
여진 병사 : 넌 뭐냐?
고약사 : 헐 무섭! ㅌㅌㅌ
동관 : 아놔!
어찌 됐든 송과 금의 해상 동맹이 체결됩니다.
금사에는 1117년 12월이나, 정확성 면에서 삼조북맹회편이 더욱 신뢰가 가니
1118년 4~5월에 동맹이 체결되었다고 보아야겠지요.
금사 태조 본기 1117년 12월 기사中
是月,宋使登州防禦使馬政以國書來,其略曰:
「日出之分,實生聖人。竊聞征遼,屢破勍敵。若克遼之後,五代時陷入契丹漢地,願畀下邑。」
이달에, 송(宋)의 사신 등주방어사(登州防禦使) 마정(馬政)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왔는데, 그것을 간략하게 말하면
「해가 뜨는 곳에서, 성인(聖人)이 실생(實生/현생)하였다.
남몰래 들으니, 요를 정벌하여, 누차에 걸쳐 경적(勍敵/강한적)을 격파하였다.
만약 요를 이긴 후에는, 5대(五代) 시기에 거란이 들어와 함락한 한(漢)의 땅인,
하읍(下邑/지방고을, 즉 연운 16주)을 베풀어 주기를 원(願)한다.」
요약 : 아골타님아 연희 뒤통수 제가 때릴 때니, 연운 16주 좀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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