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장에게는 특이한 면이 있는데,
자기에게 위협될지 모르는 신하들에게는 엄청난 대학살을 자행하지만,
우선 자기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적" 들에게는 정말 관대합니다.
나하추도 사로잡혔다가 조건없이 풀려났고, 주원장에게 대항해서 싸우다 전사한 장수들 중에 정중한 제사를 받은 사람도 있고,
무엇보다 진우량의 경우가 있습니다.
진우량 본인은 파양호 대전에서 전사하지만, 진우량의 둘쨰 아들인 진리라는 인물은 살아남아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 시점에서 주원장의 상대가 될 수는 없으니, 주원장에게 항복을 합니다.
그런데 주원장은 그를 용서하고, 죄를 주기는 커녕 나름대로 융숭하게 대접을 해줍니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진리가 마침내 항복하여, 군문(軍門)으로 들어가 부복(俯伏)하여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태조가 진리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그를 부축하여 일으키고, 손을 잡고 말하길
"내가 너를 죄주지 않을 것이다"
라 하였다. 부고의 재물들은 진리에게 마음대로 가지도록 하였고, 응천으로 돌아온 후, 귀덕후(歸德侯)의 작을 제수했다.
─ 명사 진우량전
또, 나중에 진리가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는 말을 우연히 내뱉었습니다.
주원장의 경우, 신하들이나 문인들이 "광" 이라는 글자만 써도 "내가 미쳤다고 욕을 하느냐" 고 죽여버렸지만,
진리에 대해서는 이 경에도 관대해서,
진리에게 처벌을 내리는 대신에, 고려로 보내버리는 조취를 취합니다.
어차피 진우량의 후손에게 해꼬치를 하려는 사람들이야 많으니, 이 경우에는 관대한 판단입니다.
진리는 경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우울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뱉었다. 황제가
"이 아이는 어린 젖먹이에 지나지 않으나, 소인들이 미혹해서 짐의 은혜를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원방에 거처게 하는 게 의당할 것이다"
라 했다. 홍무 5년, 진리와 귀의후(歸義侯) 명승(明昇)을 아울러 고려(高麗)로 옮기고, 원의 항복한 신하 추밀사(樞密使) 연안답리(延安答理)를 보내 보호해서 가도록 하였다. 고려왕에게는 비단(羅綺)을 하사하여, 그를 잘 보아 주도록 했다. 또한 진보재 등도 저양(滁陽)으로 옮겼다. ─ 명사 진우량 열전
이 당시 고려의 왕은 공민왕입니다.
즉, 주원장이 공민왕에게 비단까지 주면서, "진리 좀 잘 돌봐주라." 고 부탁까지 한 겁니다.
참고로 같이 간 명승은, 당대 군웅 중 하나였던 명옥진의 아들입니다.
그 후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습격 당해 죽고, 우왕이 즉위하고, 왜구가 들끓고,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고, 조선이 세워지는 대혼란기가 벌어지는데,
그 사이에도 진리는 계속 한반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떄문에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진리의 기록이 나옵니다.
진왕(陳王)에게 전지를 주다. 진리(陳理)와 명승(明昇)의 귀화 기사
진왕(陳王)에게 전지(田地)를 주었다. 진이(陳理)는 진우량(陳友諒)의 아들인데, 명나라에 항복하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봉(封)하여 순덕후(順德侯)를 삼고, 홍무(洪武) 5년 임자에 황제가 이(理)와 명정(明貞)의 아들 승(昇)으로 하여금 각각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가서 한가로이 살게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진왕이라고 불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진왕의 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고, 의정부에 명하여 주휼(周恤)할 방법을 의논하게 하니, 정부(政府)에서 전지를 주자고 청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바로 태종 이방원이 즉위한 무렵의 기록입니다.
진왕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여전히 조선 땅에서 살고 있었고,
그 생활이 어려운 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정부에서 의논해서 전지를 주어 먹고 살게 해결해준 겁니다.
순덕후 진리의 졸기. 예부에 자문을 보내 알리다
순덕후(順德侯) 진리(陳理)가 죽었다. 진리는 곧 진우량(陳友諒)의 아들인데, 아들 진명선(陳明善)이 있다. 진리가 죽으매 쌀·콩 50석(石)과 종이 1백 권(卷)을 부의(賻儀)로 주고, 관곽(棺槨)을 내려 주었다. 인하여 예부(禮部)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알렸다.
그로부터 8년뒤인 1408년, 진리가 사망했습니다.
진우량이 사망한 시점부터 따지면, 45년 뒤입니다. 아마 50~60세 정도였을거라고 생각됩니다.
또, 여기서의 기록을 보면 조선 땅에서 진명선이라는 자식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외, 조선 초기의 관료였던 허조가 신주 만드는 지식을 이 진리의 집에서 배웠갔다는 언급도 보이고...
또 나중에 조정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언급되는것은 300년 뒤입니다.
본래, 주원장은 진리와 명승을 보내면서, 따로 일 시키지 말고 한가롭게 지내도록 해주라, 고 부탁했고
명나라 황제의 부탁인데, 조선에서도 뭐 한두명쯤이야...하고 적당히 잘대해주면서, 여러가지 정역도 면제를 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300년 뒤인 효종 무렵에, 명승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 홍무제가 우리 정역 면제 시켜주라고 했잖아요. 우리 면제 시켜주셈."
이러는 사건이 생깁니다.
여기에 대해, 조정에서는
"뭐, 그런말이 있긴 했는데. 그런데 그게 300년 전인데 지금까지 봐준것만으로도 잘 대해준거 아님?'
이런 의견이 주고, 효종 역시
"명씨들이 우리나라에서 뭐 한것도 없이 단지 중국 조정 말로 삼백년을 놀고 먹었는데, 이제와서 뭐 더 볼거 있냐? 이제부턴 명씨들도 걍 일반 백성들하고 똑같이 낼거 내고, 할거 해라."
라고 해서...그 후로는 그렇게 됩니다.
참고로 이 명승이, 현재 한국 명씨의 시초입니다. 유명인 중에 명계남 씨 같은 명씨 유명인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진리의 후손들이 현재 한국의 양산 진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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