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중기의 국왕의 호칭에 대해서는 이전에 글을 한번 쓴적이 있었는데요.
[고려초중기 황제? 황상? 성상? 황후? : http://cafe.naver.com/booheong/57633 ]
주로 성상, 금상, 주상, 지존등이 쓰이며,
공문서외의 각종 서신이나, 비문등에는 종종 황상이 쓰이기도 하였는데요.
고려 광종조의 금석문 몇개를 살펴보니 두곳에서 황제 라고 기록하였더군요.
특이한 점은 독자연호인 준풍시기(960년~963년)에만 사용된것은 아니더군요.
하나는 광종7년(956년)이고, 또 하나는 광종26년(975년) 입니다.
퇴화군대사종(退火郡大寺鐘) 의 명문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08)
: 광종7년 956년에 퇴화군(현 경북 영일군 흥해면)에 조성된 범종에 새겨진 명문
여제자(女弟子 : 여자 불교 신도) 명호(明好)의 아들인 정조(正朝 : 고려 鄕職의 7품) 수강(壽剛)은 위로는 깨달음의 바른 길을 구하고 아래로는 뭇 중생들을 혼탁한 세상에서 제도하려고 삼가 큰 종을 만들어 우러러 절의 경쇠에 귀의한다. 엎드려 지금의 황제(광종)의 덕이 백성에게 미치기를 바라며 다음으로 나라 안이 평안하고 태평하며 법계의 중생들이 함께 피안(彼岸 : 미혹한 세계인 此岸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에 오르기를 바란다.
度三界之群迷女
弟子明好子正朝」
壽剛者上求菩提」
正路下濟郡生昏」
衢敬造洪鍾仰歸」
梵磐伏願今上」
皇帝德被有裁次」
願國內安泰法界」
弟子明好子正朝」
壽剛者上求菩提」
正路下濟郡生昏」
衢敬造洪鍾仰歸」
梵磐伏願今上」
皇帝德被有裁次」
願國內安泰法界」
비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中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3)
: 광종26년 975년에 고달사(현 경기 여주군 북내면)에 건립된 원종대사 탑비
(陰記)
乾德九年歲次辛未十月二十一日於 元和殿開讀」
大藏經時」
皇帝陛下詔曰國內寺院唯有三處只留不動門下弟」
子相續住持代代不絶以此爲矩所謂高達院曦陽」
院道峯院 住持三寶須憑 國主之力所以」
釋迦如來出世道佛法付囑國王大臣是以」
我皇帝陛下情深敬重釋門妙理共結良因軌矩恒流」
門下弟子道俗等姓名如後」
(음기)
건덕(乾德) 9년 세차(歲次) 신미(辛未) 10월 21일 원화전(元和殿)에서 대장경(大藏經)을 개독(開讀)할 때 황제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국내의 사원(寺院) 중에 오직 3처(三處)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門下)의 제자들이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3처(三處)란 이른바 고달원(高達院)·희양원(曦陽院)·도봉원(道峰院) 등이다. 주지(住持) 삼보(三寶)는 모름지기 국주(國主)의 힘을 의지하여야 하나니, 그 까닭인즉 석가여래께서 출세(出世)하사 이르시기를, “불법의 외호(外護)를 국왕과 대신들에게 부촉(咐囑)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신(臣)이 이로써 우리 황제폐하께서도 지극하신 정의(情誼)로 깊이 석문(釋門)의 묘리(妙理)를 경중(敬重)하시고, 함께 양인(良因)을 맺어 이 규칙이 영원히 유통(流通)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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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혀 독자연호로 알려진 준풍(960년~963년)이 기록된 것들도 소개해 드립니다.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준풍(峻豊) 3년(三年) 임술(壬戌)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10 )
고미현서원종(古弥縣西院鐘)
준풍(峻豐) 4년(四年) 계해(癸亥)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1584 )
안성봉업사지출토준풍명와(安城奉業寺址出土峻豊銘瓦)
준풍(峻豊) 4년(四年) 임술(壬戌)
(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7991 )
보통 개경을 황도(皇都)로 고친 960년을 준풍1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준풍4년은 963년 계해년이여야 하는데
용두사지철당간과 고미현서원종의 준풍년도를 보면 준풍4년이 아니라 준풍3년이 맞은듯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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