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백제에 관한 여러가지 말들이 많은데요,
오늘은 중국 정사중, 송서, 양서, 남사 및 직공도에 기록된 백제 요서관련 내용과
이를 주석한 (제가 제일 존경하는) 순암 안정복 선생의 의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송서(宋書) : 편찬시기 488 년경
직공도(職貢圖) : 제작시기 526∼536 여년경
양서(梁書) : 편찬시기 636 년경
남사(南史) : 편찬시기 640 여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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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서(宋書) 동이열전 백제편中
○ 백제국(百濟國)
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晋平縣)이라 한다.
○ 百濟國
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晋平郡 晋平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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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梁書) 동이열전 백제편中
○ 백제(百濟)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東夷)의 삼한국(三韓國)인데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辰韓)이요, 또 하나는 변한(弁韓)이었다. 변한(弁韓)과 진한(辰韓)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馬韓)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十餘萬戶)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점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자, 백제(百濟) 역시 요서(遼西)·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 百濟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晉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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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南史) 동이열전 백제편中
○ 백제(百濟)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三韓國)인데, 삼한국의 하나는 마한(馬韓)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辰韓)이요, 또 하나는 변한(弁韓)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국(國)이 있었고, 마한은 54국(國)이 있었다.
대국(大國)은 1만여가(一萬餘家), 소국(小國)은 수천가(數千家)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를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遼東)의 동쪽 천여리 밖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이미 요동(遼東)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遼西)·진평(晋平) 2군(郡)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 百濟
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 句麗旣 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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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공도(職貢圖) 백제국사조(百濟國使條) 中
百濟舊來夷馬韓之屬 晉末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 自晋已來常修蕃貢
두가지 해석
1.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다스렸고,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다스렸다.
백제는 원래 내이(來夷)로 마한(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진(晋)나라 말(末)에 고구려가 요동(遼東) 낙랑(樂浪)을 다스렸고(略有)하였고, 또 (백제가) 요서(遼西)의 진평현(晋平縣)을 다스렸다. 진(晋)나라 시기부터 중국에 대하여 늘 조공(貢物)을 바쳐 상조(常朝)하였다
晉末 駒驪略有遼東樂浪 (백제가)亦有遼西晉平縣
2. 고구려가 요동을 다스렸고, 낙랑 또한 요서 진평현을 다스렸다.
백제는 원래 내이(來夷)로 마한(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진(晋)나라 말(末)에 고구려가 요동(遼東)을 다스렸고, 낙랑(樂浪) 또한 요서(遼西)의 진평현(晋平縣)을 다스렸다. 진(晋)나라 시기부터 중국에 대하여 늘 조공(貢物)을 바쳐 상조(常朝)하였다
晉末 駒驪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晉平縣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문맥상으로 2번 해석이 옳은듯 싶습니다. 亦有(또한 다스렸다).
역시 안정복 선생의 의견대로, 중국이 부여, 백제, 낙랑을 잘 구분하지 못한것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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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스승 성호 이익에게 궁금한점을 묻는 서찰中
성호 선생에게 올린 편지. 병자년
《삼국사(三國史)》는 구해 볼 방법이 없었는데 전번에 마침 친우 권암(權巖)이 찾아와서 그 사정을 듣고는 빌려 주었으니 다행입니다. 대충 훑어보니 이 책은 비록 정사(正史)라고는 하나 문헌을 징빙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연대만 이어놓고 또 중국의 역사책을 가져다가 메워 놓았을 뿐입니다.
중국 사람이 외이(外夷)의 일을 전한 데에 본디 잘못된 것이 많은데, 모두 변별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한스럽습니다.
백제(百濟)의 한 일을 가지고 말해보면 “백제가 망하자 그 땅이 말갈(靺鞨)과 발해(渤海)와 신라(新羅)에 나눠졌다.”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당서(唐書)》를 인용한 것입니다. 말갈과 발해는 백제와 더불어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능히 그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있겠습니까. 또 백제의 근원이 부여(扶餘)에서 나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대부분 혼동해서 칭하였습니다.
《남사(南史)》에서 “진(晋) 나라 때 백제가 약간 요서(遼西)를 가졌다.” 하고, 《북사(北史)》에서 “구태(仇台)가 비로소 대방(帶方)에 왕노릇을 하니, 공손도(公孫度)가 그 딸로 아내를 삼아 주었다.”고 한 설들은 모두 부여의 일인데 혼동하여 백제라고 하니, 중국 역사책을 믿을 수 없는 것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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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고이(考異)/보유(補遺)/괴설변증(怪說辨證)/잡설(雜說)中
우태(優台)와 구태(仇台)의 분별
《북사》에,
“동명(東明)이 부여(扶餘)에 이르러 왕이 되고, 동명 뒤에 구태(仇台)가 대방(帶方) 옛땅에 나라를 세우자, 한(漢)의 요동 태수(遼東太守) 공손도(公孫度)가 그에게 딸을 보내 아내를 삼아 주었는데, 드디어 동이(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는 동명으로 부여국의 왕을 삼은 것인데, 그 말은 대개 《후한서》의 그릇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부여국(扶餘國)에 보인다.
또 《문헌통고(文獻通考)에,
“한 헌제(漢獻帝) 때 구려(句麗)ㆍ선비(鮮卑)가 강성하여, 요동 태수 공손도가 부여왕(扶餘王) 위구태(尉仇台)로 두 나라 사이에 있게 하고 그 종녀(宗女)로 아내를 삼아 주었다.”
하였으니, 이는 북부여(北夫餘)의 일을 《북사》에서 백제(百濟)의 선조로 인용한 것이다. 대개 백제의 시조에 우태(優台)가 있고 또 백제의 성이 부여(扶餘)이기 때문에 혼동하여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북사》ㆍ《통전(通典)》에 모두,
“백제가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국성(國城)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태의 와전이다.
중국 사람들이 항상 부여와 백제를 혼동해 일컫기 때문에 《남사(南史)》에는,
“진(晋) 나라 때 구려(句麗)가 요동(遼東)을 점유하고 백제 또한 요서(遼西)의 진(晋)ㆍ평(平) 두 고을을 점거하였다.”
하였고, 《자치통감(資治通鑑)》 진 목제(晋穆帝) 영화(永和) 2년(346)에는,
“처음에 부여가 녹산(鹿山)에 있다가 백제(구려의 오류인 듯하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소산(消散)해지므로 서쪽으로 옮겨 연(燕)에 근접하였다.”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傳聞)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요약 : 중국에서는 백제의 성이 부여임으로, 백제국의 역사에 부여를 포함시킨 것이다. 혹은 부여와 백제를 구분하지 못하였다.
또 부여왕 구태와 백제시조 우태를 구분하지도 못하였다.
안정복 선생은 우태를 소서노의 전남편 이자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라 보았으며, 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라 저술하였다.
한줄요약 : 중국애들은 부여와 백제를 잘 구분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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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말기 부여 상황 (346년경까지)
285년 서쪽의 선비족 모용외(慕容廆/전연의 시조)의 공격을 받아 국왕 의려(依慮) 자살, 1만명 포로로 끌려감
왕족 북옥저로 피신
진(晉) 무제(武帝/사마염) 하감(何龕)을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로 임명하고 부여 재흥 명령
286년 부여국왕 의라(依羅) 하감에게 원군요청, 진군 모용외 격파, 부여본국 회복
모용외 진나라에 투항,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됨.
허나 모용외는 계속적으로 부여를 침공해 부여민을 노예로 중국에 팜,
진무제 부여노예를 국비로 사들여 되돌려 보냈으며, 부여노예 매매를 금지함.
(일설에는 고구려는 의라의 부여국을 북부여라 하였으며, 옥저에 남은 부여왕족이 세운 나라를 동부여라 하였다.
동부여는 410년 광개토왕에 의해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333년 :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 연왕 즉위
340~346년간 : 부여 본격적으로 동남쪽의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본거지 녹산(鹿山/현 길림지역)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점점더 서쪽으로 이동하게 됨(현 농안, 장춘지역으로 추정)
342년 : 연국 고구려 침공, 미천왕릉 도굴하여 미천왕 시신 가져감
346년 : 연국 세자 모용준 1만7천 기병으로 부여침공, 부여왕 현왕(玄王)과 부여민 5만을 포로로 끌고감
연왕 모용황 부여왕 현왕을 사위로 삼고 진동장군(鎭東將軍)에 임명
이때 사실상 부여가 멸망하였으나, 후에 후연에 의해 부여국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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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설은 굉장히 말들이 많은 이야기인데요, 저는 안정복 선생의 의견을 따르고 싶군요.
즉 요서 지역에 진출한 것은 백제가 아닌 부여이고, 그 시기가 진나라 말임을 감안하면
연나라에 의해 강제로 요서로 옮겨진 부여국 유민들의 자치지역이 아닐까 추측되네요.
하지만, 중국 정사에 "백제가 경략했다. 점거했다.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구절을 보면
쓰러져가는 부여라고 생각하기엔 개연성이 떨어진긴 합니다.
진나라 말이 백제의 전성기였던 근초고왕의 시기인점을 보면, 진정 백제가 요서로 진출할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아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송서,양서,남사의 이부분을 주석한 내용입니다.
『송서(宋書)』백제국전(伯濟國傳)에 이에 관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는데, 백제(百濟)의 요서경략(遼西經略)은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346~374)의 일로 보인다.
<참조>
『宋書』百濟傳 註 4)
백제략유요서(百濟略有遼西)
백제가 요서지방을 점유하였다는 사실(事實)은 『송서(宋書)』·『양서(梁書)』 등의 중국사서에 등장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해서는 여기의 『송서』 보다 『양서』 백제전(百濟傳)에서 한층 자세한 전말을 읽을 수 있다. 『양서』 백제전에는 ‘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 晋世句驪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자료를 『송서』와 비교하여 보면 백제군(百濟郡)까지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양서』의 기술은 당시 사신들의 내왕이 잦았던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남사(南史)』의 백제전(百濟傳)에도 동일하게 보이고 있으나, 『진서(晋書)』에서는 마한전(馬韓傳)으로 대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이 같은 사실들이 제외되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여 이야기해야 할 것은 『직공도(職貢圖)』의 백제국사조(百濟國使條)에 보이는 기록들이다. 이 기록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백제는 원래 래이(來夷)였던 마한(馬韓)에 속했던 나라이다. 진말(晋末)에 고구려가가 요동(遼東) 낙랑(樂浪)을 략유(略有)하였고 (백제가) 요서(遼西)의 진평현(晋平縣)을 락유(略有)하였다. 진나라 시기부터 중국에 대하여 늘 공물(貢物)을 바쳐 상조(常朝)하였다.
『직공도』에 보이는 백제국사(百濟國使)의 기록은 백제를 설명하는 조항이지 고구려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가 요동 낙랑을 점유하였고 또한 요서의 진평현을 략유(略有)하였다고 서술해 놓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 『양서』의 구체적인 기록이나 여기『송서』의 기록과 차이가 나고 있다. 따라서 『직공도』백제국사조에 보이는 기록에는 백제라는 두 글자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요서의 진평현을 점유한 것은 고구려가 아니고 백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측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러한 사실이 실려 있지 않은데 이것은 신라 중심의 역사서술에서 나타난 결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료의 누락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항은 백제가 진나라 때 요서(遼西)·진평(晋平) 2군(郡)을 차지하였다고 하는 바 바로『진서』에 그러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이를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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