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과 전쟁할 당시에, 대륙의 기상이라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문제

 대체로 몽골군은 동쪽 보다는 서쪽에서 훨씬 수월하게 정복을 벌였습니다. 호라즘은 한번이 원정으로 궤멸했지만, 금나라는 징기스칸이 죽을때까지 멸망을 못 시켰고, 이집트 근처까지 나아갔을때도 장강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부분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왕조가 체계화된 면이나 기반이 다른 국가들보다 탄탄한게 크지만,



그런 이유들 중에 하나로, 몽골군의 학살에 대한 반응이 있습니다.


몽골군의 학살은 그 정도가 보통을 넘었는데, 이런 학살은 전략적인 면으로도 이용되었다는것 역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르네 그루세의 책을 보면, 해당 부분에 대한 언급이 이렇습니다.




'……몽골인들은 분명히 중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수월하게 트란스옥시아나와 동부 이란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그 까닭은 순전히 그들이 이교도로서 또는 우리식 표현으로는 야만인으로서 일으킨 공포심이, 여러 세기 동안 그들과 이웃으로 살아온 중국 영토 안에서보다는 무슬림들 사이에서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지역에서 지방주민들을 더 많이 활용한 듯하다.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몽골인들은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집하고 칼끝으로 위협해 해자와 성벽으로 몰아붙혔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자신의 동포들에게 베여 쓰러져, 그들의 시체가 해자를 메우고, 그들의 거듭된 공격으로 수비대가 기진맥진해지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때때로 그들은 열 명에 하나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고, 수비대는 평야를 뒤덮도록 배치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칭기스칸 국가의 거대한 군대에 위협받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계책으로 몽골인들의 작은 파견대도 항복을 강요할 수 있었으며, 그처럼 동원된 인간집단은 소용이 다한 후에는 살해되었다.'


'이 끔찍하면서도 보편적인 관행은 몽골군의 혼란과 조직에 의해 완벽해지면서, 그들의 가장 상습적인 전략의 일부가 되었다. 칭기스칸이 사마르칸트 공성전 때 사용한 사람은 부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이었으며, 우르겐치 공격에서는 사마르칸트의 포로들이 이용되었고, 톨루이가 메르브를 함락시킬 때는 부분적으로 후라산의 시골 주민들을 이용하였다.'


'어느 누구도 저항은 생각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공포와 낙담이 컸다.'





 
헌데 중앙 아시아와 페르시아에서 잘 먹힌 이 전술이, 중국 전쟁에서는 잘 안먹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라는게 동일한 책을 보면……


'마지막으로 몽골 사람들은 초원에서 패배한 적을 대량으로 학살 - 추방하거나 '흰 깃발' 아래 집단적으로 징집하여 처리하는 데에는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정주국가, 특히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사는 중국에서는 대량 학살이 별로 대단한 인상을 주지 못하였는데,'


'이는 항상 살해된 자들보다는 그들 대신 자리를 차지할 주민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너무 많아서,

죽여도 죽여도 그 자리에 다시 자리잡고 있을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게....

아무리 학살하고 죽여도 워낙 사람이 많은지라, 저항 자체를 포기할 정도로 겁에 질리지를 않아버렸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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