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패서호족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철원으로 천도했다는 것은 나름 타당해 보입니다.
강씨왕후가 신주강씨로 추정되는바, 왕후를 죽인건 외척을 견제하려 했다고도 볼수 있겠지요.
하지만 후계자인 왕자까지 죽였다는것은, 외척발호나 패서호족의 억압 차원으로는 설명이 잘 안된다고 생각되네요.
어쩌면 궁예축출의 가장 큰 이유는 추대장수들이 말한 "이대로 있다간 다 죽는다" 가 맞을것으로 봅니다.
“지금 왕의 정치가 문란하고 형벌이 지나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이고 신하들을 베어 죽이며 백성은 도탄(塗炭)에 빠져 왕을 원수처럼 미워하니 걸(桀)ㆍ주(紂)의 악도 이보다 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밝은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큰 의리이니, 공은 은(殷) 나라와 주(周) 나라의 일을 행하소서."
“때는 만나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것입니다. 나쁜 정치의 피해를 입은 나라 안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보복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권세와 지위가 높은 사람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니, 지금 공보다 덕망이 높은 사람이 없으므로 여러 사람의 마음이 공에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공이 만약 이 말에 따르지 않으시면 우리들은 얼마 안 가 죽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왕창근의 거울에 쓰인 글이 그러한데, 어찌 하늘의 계시를 어겨서 독부(獨夫)의 손에 죽겠습니까."
패서호족의 군사력이 태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은, 실상 철원으로 천도한후 태봉의 군의 근간은
중앙군인 마군입니다. 마군의 우두머리들은 대부분 궁예에 의해 발탁된 평민출신 장군들이였구요.
또한 태조가 고려를 건국후 임명된 대신들이나, 공신들중에 패서호족계는 극히 드문데다가
대부분 경기지역등에서 올라와서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자, 아니면 군부출신들입니다.
즉, 쿠테타의 핵심세력은 철원 왕도의 군인과 관리들이였던 셈이지요.
궁예가 패서호족들을 집중적으로 처단한것 같진 않구요,
피해대상은 왕도의 군인과 대신, 그리고 청주인에 집중된듯 싶습니다.
즉 쿠테타는 왕권강화에 불안감을 느낀 패서호족의 거사가 아니라
궁예의 근거리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있던, 군부의 장수들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고 봅니다.
군부의 평민출신 장수들이야, 왕이 호족을 때려잡든, 왕권을 강화하든
자신들의 지위와 권리만 보장된다면야 별 상관 없을듯 하네요.
물론 군부의 거사에는 패서호족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군부 장수들이 패서호족들의 동의를 구해가면서까지 왕건을 추대할정도로 여유가 있었던건 아닌듯 싶습니다.
왕건 자신도 쿠테타 당일에나, 군부가 자신을 추대한다는것을 알았을 정도니까요.
저는 궁예 축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서에 나온대로, 단순하게 꼬집어 보자면
"의심병"에서 비롯 되었다고 생각되네요.
왜 의심을 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여러요인중에 물론 왕권강화도 있을수도 있겠지요.
p.s)삼국사기에 "왕후와 왕자를 죽인 이후로 의심이 많고 곧장 성을 내므로" 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심리학적으로는 죄책감이 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강씨 왕후가 죽은 직접적인 원인은
궁예의 불법정치(흔히 말하는 신정?)에 대해 왕후가 간하자, 왕이 성을 내며 간통을 했다면서 죽이죠.
이후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하루에 백여명씩 살해당하였고, 재상과 장수가 90%이상 살해당하고,
철원과 부양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3년 동안 흔히 말하는 폭주가 시작된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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