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란 어떤 조직인가? 이 의정왕대신회의의 기원은 누르하치 때 찾을 수 있다. 후금의 최고 정책 결정은"여러 왕들이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방식" 인 합의제를 취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천명(天命) 6년(1621) 누르하치가 자신이 사망한 뒤에 국정의 기본 체제에 있어서 팔왕합의제(八王合議制)로 할 것을 공표하면서 공식화되었다. 그리고, 권력을 공유한 4대 패륵 외에 의정십패륵(議政十貝勒)을 두었다. 이때 의정왕대신회라는 정식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찌만, 실제로 이들이 논의하여 처리하는 조직의 기본 성격은 그 이후와 비슷하므로 초기 형태로 규정할 수 있다.
홍타이지가 후금의 통치자로 즉위하였지만, 누르하치의 뜻에 따라서 정책결정 등에서 지위를 확보한 의정왕대신회의는 군주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道)를 따르지 않으면 다른 군주를 세울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의 역학 관계는 조정 내에서의 자리 배치와 의례에서도 나타났다.
의정왕 중 주요 인물들인 3명의 대패륵은 군주인 홍타이지와 함께 남면(南面)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주는 5일과 21일 두 차례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신년에 당자(만주족이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 제사를 지낼 떄에도 먼저 당자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그 다음에는 신기를 향해서, 마지막으로는 숙부와 형제들에게 머리를 숙인 후 자리에 앉았다." 고 하니 후금 군주의 지위와 대패륵들을 포함한 의정왕대신회의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홍타이지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 의정왕대신회의이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할 수 있었을까? 천총 3년(1629) 홍타이지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는 이미 결정을 하였지만, 명나라와 몽골 중 어느 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의정왕대신회의의 논의를 요청하였다.
이떄 홍타이지와 권력을 공유하였던 4대 패륵 중 대선(代善 : 다이샨), 망고이태(莽古爾泰 : 망구타이)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고, 다른 이들은 의견이 분분하여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자 홍타이지가 입을 열어 먼저 명을 정벌할 의사를 밝히고 진격하겠다고 하자, 대선과 망고이태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회의는 중단되었다. 이들 두 사람은 개인적으로 군주의 처소로 가서 홍타이지를 만났고, 이때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패륵과 대신들을 밖에 세워두고 세를 과시하면서 군주를 압박하였다. 이것을 보면, 대선과 망고이태의 동의가 없이는 군주가 출병을 결정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그들이 자신들의 세력에 어느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최고 통치자를 압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대 정책 결정기구와 정치 세력 ─ 송미령(전북대 교수)
홍타이지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의정왕 숫자를 계속 늘려 소수의 의정대신이 엄청난 지위를 가지는것을 막고(순치제 시절에는 60여명까지 증가), 문관(文館)이라는 일정의 군주 비서 기구를 만들었고,
의정왕들은 옹정제 즉위 무렵까지 어느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영향력이 떨어졌습니다.
대신 옹정제 시절부터는 잘 알려지 있는 군기처(軍機處)를 설립해서 황제가 좀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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