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야언(海東野言) 中
○ 태조가 개국하자, 재상 조반(趙胖)이 중국에서 생장하였으므로, 그를 주문사(奏聞使)로 삼아 명나라에 보냈는데, 고황제가 불러 들여 고려 왕조를 빼앗은 것을 꾸짖었다. 조반(趙胖)이 대답하기를, “역대로 창업하신 군주들은 거의 모두가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혁명을 이룩한 이들이요, 유독 우리나라만은 아닙니다.” 하여, 은밀히 명나라가 개국한 일과 견주어 지적하였다. 말도 중국말을 썼으므로, 황제가 이르기를, “그대가 어찌하여 중국말을 할 줄 아는가.” 하니, 조반이 아뢰기를, “신(臣)이 중국에서 생장하였고, 일찍이 폐하를 원 나라 탈탈(脫脫) 의 군중(軍中)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 당시의 일들을 물으니 반이 일일이 다 말하므로, 황제가 용상에서 내려와 조반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만약 탈탈이 있었더라면 내가 여기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경은 진실로 나의 친구이다.” 하고, 빈객의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조선(朝鮮)’이란 두 글자를 써서 보내주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요약
주원장 : 고려 오랑캐~ 버르장머리를 혼내 주겠다해!
조반 : 황제님아 님은 혁명 영웅이다해! 우리 성계님은 혁명 못했다해!
주원장 : 오랑캐가 우리말을 한다해!
조반 : 반 중국사람이다해! 나 예전에 님 본적 있다해!
주원장 : 어디서 봤다해?
조반 : 나 탈탈 부하였다해!
주원장 : 헐~ 전우? 나 탈탈 존경한다해! 님 나랑 친구 먹어해!
조반 : 친구님아~ 나라명을 뭘로해?
주원장 : 조선으로 해~ 조선으로 해~
이성계 : 앗싸~ 인정받았다해
조선왕조실록 1392년 10월22일 기사中
지중추원사 조반이 가지고 온 예부의 차부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이 중국 남경으로부터 돌아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였다. 조반이 예부(禮部)의 차부(箚付)를 받들고 와서 전하였다.
“예부(禮部)에서 고려국 도평의사사(高麗國都評議使司)에게 차자(箚子)를 부송하오. 홍무(洪武) 25년 9월 12일 본부(本部)의 우시랑(右侍郞) 장지(張智) 등의 관원이 부송한 글을 화개전(華蓋殿)에서 주문(奏聞)하고 황제의 성지(聖旨)를 삼가 받았는데, 그 칙지에, ‘천지(天地)의 사이에 백성들을 주재(主宰)하는 사람은 크고 작고간에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혹은 흥하기도 하고 혹은 패망하기도 하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 삼한(三韓)은 왕씨(王氏)가 망하면서부터 이씨(李氏)가 계책(計策)을 씀이 천태 만상(千態萬狀)인 것이 벌써 몇 해가 되었는데, 지금은 확연히 그러하다. 왕씨가 옛날에 삼한(三韓)을 차지했던 보답도 또한 그러했으니, 이것이 어찌 왕씨가 옛날에 일을 잘하고, 이씨가 오늘날 계책을 잘 쓰기 때문인가? 상제(上帝)의 명령이 아니면 되지 않는 것이다. 그 삼한(三韓)의 신민이 이미 이씨를 높이고 백성들에게 병화(兵禍)가 없으며 사람마다 각기 하늘의 낙(樂)을 즐기니, 곧 상제(上帝)의 명령인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금후로는 봉강(封疆)을 조심하여 지키고 간사한 마음을 내지 말면 복이 더욱 증가될 것이다. 그대 예부(禮部)에서는 짐(朕)의 뜻을 알리라.’ 하므로, 더욱 이를 공경히 받들어 지금 황제의 칙지(勅旨)의 사의(事意)를 갖추어 먼저 보내오.”
임금이 시좌소(時坐所)에 돌아오니 백관이 배하(拜賀)하였다.
태조건원릉신도비(太祖建元陵神道碑) 中
홍무(洪武 명 태조(明太祖)의 연호) 임신년(태조 1, 1392년) 가을 7월 16일에, 전하(태종)께서 대신(大臣) 배극렴(裵克廉)ㆍ조준(趙浚) 등 52명과 더불어 의리를 내세워 태조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신료(臣僚)와 부로(父老)들도 모의한 일 없이 모두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태조는 정변을 듣고 놀라 일어나 두세 번 굳이 사양하다가 어찌할 수 없이 왕위에 올랐다. 가만히 앉은 채 한 국가가 저절로 이루어졌으니, 하늘이 덕 있는 이를 계도하는 도움이 아니고서야 누가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즉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조반(趙胖)을 중국에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삼한의 백성이 이미 이씨(李氏)를 높였으며, 백성은 병화(兵禍)가 없이 사람마다 제각기 하늘이 주는 즐거움을 즐기고 있으니, 바로 상제의 명이라 하겠다."
하고, 이어 또 칙명에 이르기를,
"나라가 바뀌었으니 나라 이름은 무었인가?"
하므로, 즉시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한상질(韓尙質)을 중국에 보내어 나라이름을 정하여 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 '조선(朝鮮)'이라는 명칭이 아름다우니, 그 이름을 바탕으로 옛날의 조선을 잇도록 하라. 하늘을 본받아 백성을 길러서 길이 후세의 자손에게 이르도록 창성하게 하라."
하였다. 이 모두는 우리 태조의 위엄과 명성 그리고 의롭고 곧은 성품이 위로 황제에게 들려, 황제의 마음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태조가 청명(請命)하자 곧 윤허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조선왕조실록 1401년 10월27일 기사中
부흥군 조반의 졸기
부흥군(復興君) 조반(趙胖)이 죽었다. 반은 풍해도(豐海道) 배주(白州) 사람인데, 증 참찬(贈參贊) 조세경(趙世卿)의 아들이다. 나이 12세에 세경을 따라 연도(燕都)에 들어가서 종자(從姊)의 남편인 단평장(段平章)의 집에 있으면서, 드디어 한문을 배우고 겸하여 몽고(蒙古)의 글과 말을 통하였다. 승상(丞相) 탈탈(脫脫)이 한번 보고 기이하게 여기어 아뢰어서, 중서성(中書省) 역사(譯史)로 불러 썼다. 무신년에 어버이가 늙었기 때문에 환국하였다. 을축년에 전리 판서(典理判書)로 경사(京師)에 갔으니, 경효왕(敬孝王)의 시호(諡號)와 승습(承襲)을 청하기 위함이었다. 돌아오매 밀직 부사(密直副使)를 제수하였다. 이때에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이 오래 정병(政柄)을 잡고 탐(貪)하는 바가 끝이 없어, 배주(白州) 사람의 밭 수백 경(數百頃)을 빼앗아, 그의 종[蒼頭] 이광(李光)을 장주(庄主)로 삼고, 또 여러 사람의 밭을 빼앗아 1년에 수조(收租)하기를 두 번, 세 번까지 하니,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었다. 반이 시중(侍中) 최영(崔瑩)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임(林)·염(廉)의 당(黨)을 급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먼저 이광(李光)을 없애어 그 단서(端緖)를 열고자 하니, 원컨대 미리 주상께 계달하라.”
하여, 영이 곧 왕에게 아뢰었다. 반이 이에 칼을 끌고 1백여 인을 거느리고 광을 베었다. 임견미·염흥방이 반이 반란을 꾀하였다고 왕에게 고하여 이를 해치려고,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참혹하게 봉략(棒掠)을 가해서 거의 죽게 되었다. 옥사(獄辭)가 들리매, 왕이 임(林)·염(廉)과 그 도당(徒黨)을 잡아서 모조리 베었다. 기사년에 공양군(恭讓君)이 즉위하매, 종지도본(宗支圖本)과 실봉(實封)을 싸가지고 경사(京師)에 갔다. 마침 윤이(尹彝)·이초(李初)라는 자가 고려(高麗)의 재상(宰相)이라 사칭(詐稱)하고, 아 태조(我太祖)를 포함하여 친왕(親王)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일 것을 청하였다. 반이 항쟁하여 말하여 밝게 변석(辨釋)하니, 황제의 의심이 풀렸다. 임신년에 나라 사람들이 태상왕을 추대하매, 반이 백관의 장문(狀文)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석 달 만에 돌아오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의 빠른 것에 놀랬고, 태조께서 맞아 위로[迎慰]하기를 한결같이 중국의 사신을 맞는 의절(儀節)과 같이 하고,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호(號)를 주었다. 계유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부흥군(復興君)에 승진하고, 이해에 우리 전하(殿下)를 따라 경사(京師)에 갔었다. 을해년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제수되고, 여러 번 옮기어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이르렀다.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61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매 조회를 정지하고, 인하여 제(祭)와 부의(賻儀)를 내리고, 시호(諡號)를 숙위(肅魏)라 하였다. 반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활달하고 정직하고 옳지 못한 일에 의분을 느끼는 사람으로 부모를 섬기는 것이나 임금을 섬기는 것이 한결같이 성심(誠心)에서 나오고, 지조를 빼앗을 수 없었다. 젊어서부터 선법(禪法)에 마음을 두어, 시주(施主)를 좋아하고 착한 것을 쌓았다. 아들은 셋이 있으니, 조서로(趙瑞老)·조서강(趙瑞康)·조서안(趙瑞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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