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의 죽음이 더 일찍 닥쳐왔다면, 그의 평가는 지금 어떻게 되어있었을까?

 



아래 내용은 전형적인 IF 놀이일 뿐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길 바랍니다.




1. 1896년 경에 죽었다면?

빠른 판단으로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청나라의 영향력을 조선에서 유지했으나, 이후 어린 나이로 말미암은 객기와 독선적인 판단, 고집으로 조선 문제를 망쳐 놓은 풋내기 외교인



2. 1899년 경에 죽었다면?

서양식 군사제도의 전환을 이뤄내려는 의도는 있었으나, 변법자강 운동을 막아 가능성 조차 봉쇄해버린 최악의 인물



3. 1901년 경에 죽었다면?

변법자강 운동을 막은 보수적인 색체에 강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의화단 운동의 한계를 바로 꿰뚫어볼 기민함은 있는 인물. 



4. 1908년 경에 사망했다면?

"만약 원세개가 오래 살았다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라는 IF 놀이가 지금 자주 벌어지고 있었을 수도…… 교육 제도 일신, 군사 제도 개혁, 경제 부흥 시도 등등에 양계초 등 당대인들이 "지금 유일하게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물" 로 평가 하는등, 청 말기에 가장 주목받는 개혁가로 꼽혔을 가능성이 있음.



5. 1912년 경에 죽었다면?

중국 제일의 근대화론자이자, 혁명가들의 행동에 공감하여 굳게 떨치고 일어서 퇴폐의 청조를 무너뜨리고, 남북의 화합을 이룬 후 사망한 영웅적인 장군…… 정도로 묘사될 가능성이 매우 큼. 무엇보다 이 당시 외국인들의 원세개에 대한 신임은 지금에 와서 보면 정말 깜짝 놀라울 지경이라, (본래 열강 중에서도 가장 쑨원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긴 했지만)당시 영국의 외무장관은 "(원세개에게는)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 라고 하거나, 레지널드 존스턴의 책에서도 언급이 되는 편이지만 당시의 혼란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원세개 뿐이라고 생각하는 등등……

아마 원세개 사후 필연적으로 벌어졌을 군벌 혼란에 대해 "책임이 있다." 고 언급이 되긴 하겠지만 심하지는 않았을듯



6. 1913년 송교인 사망 직전에 죽었다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인물로 평가를 받으며 좋은 부분의 이미지가 상당히 깎였겠지만, "원세개도 말년에 독재하려고 했죠. 권력의 맛이라는게 무섭습니다." 정도에서 끝날 수도 있음.


7. 송교인 사망 이후 2차 혁명 이후 죽었다면

이 다음부터는 그냥 지금 우리가 내리는 원세개에 대한 평가로…… 그래도 황제 등극만 안하고 죽었어도 "실책이 많기는 하지만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 적지는 않다." 정도로 어떻게든 쉴드가 나오면서 평가에 호불호가 좀 갈릴 가능성이 있어보임.





강건성세 후반 부분을 쓰기 위해 당시에 대한 문헌을 본 느낌으로는, 의화단 운동 ─ 진보당 결성 이전 원세개에 대한, 특히 외국인들의 평가가 본래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수준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거의 뭐 한 10년이나 20년 전쯤에 잘나가는 서방 세계에서, 아주 성공적으로 국가를 이끄는 제 3세계 지도자를 보는 듯한 정도라… …


물론 원세개가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평가를 보면 (훗날을 생각하면 정말 아이러니하지만) "중국 제일의 근대화론자" 로 통했다고 할지, 거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근대적 수준의 마인드에 혁명가들은 힘이 없어 입씨름만 하는 와중에 가장 센스 있고 기민한데다 행동력도 끝내주는 인물로 보았던듯 싶습니다. 그렇다고 중국 내에서 평가가 아주 안 좋다고 보기도 그런것이, "어찌되었건 원세개 말고는 지금 뭘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고 생각하는 지식인들도 꽤 있었던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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