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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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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 환자(宦者/환관) 열전 동관(童貫)
宋史卷四百六十八 列傳第二百二十七 宦者三
송사(宋史) 권(卷) 468 열전(列傳) 제(第) 227 환자(宦者) 3
童貫,少出李憲之門。
性巧媚,自給事宮掖,即善策人主微指,先事順承。
微宗立,置明金局於杭,貫以供奉官主之,始與蔡京游。
京進,貫力也。
京既相,贊策取青唐,因言貫嘗十使陝右,審五路事宜與諸將之能否為最悉,力薦之。
合兵十萬,命王厚專閫寄,而貫用李憲故事監其軍。
至湟川,適禁中火,帝下手札,驛止貫毋西兵。
貫發視,遽納靴中。
厚問故,貫曰:
「上趣成功耳。」
師竟出,復四州。
擢景福殿使、襄州觀察使,內侍寄資轉兩使自茲始。
동관(童貫)은, 어릴 때 이헌(李憲/신종조 권세를 얻은 환관)의 문하(門下)에서 태어났다.
성품(性品)이 약삭빠르고 아첨을 잘하여, 스스로 궁액(宮掖/궁의 하인)인 급사(給事/내시부 하급관)가 되었는데,
곧 인주(人主/임금)인 휘종의 뜻을 잘 헤아려, 미리 일을 행하고 순응하며 받들었다.
휘종(徽宗/微宗은 오기로 보임)이 즉위하자, 항주(杭州)에 명금국(明金局/명품 수집을 위한 관청)을 설치하였는데,
동관(童貫)이 공봉관(供奉官)으로서 일을 맡았고, 비로소 채경(蔡京)과 함께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채경(蔡京)의 진급은, 동관(童貫)의 힘이었다.
채경(蔡京)이 이윽고 재상(宰相)이 되자, (동관의) 청당(青唐/중국 서북쪽 서령西寧, 현 청해성靑海省)을 취할 계책에 찬동하여,
인언(因言/인하여 말함)하여 동관이 일찍이 섬우(陝右)에 열차례 사신으로 갔는데,
5로의 일의 사정을 살피고 더불어 각 장수의 능부(能否/능력과 할 수 없음)를 최실(最悉/우선적으로 갖춤)하였다 말하고는,
힘을 다해 (동관을) 천거(薦擧)하였다.
합병(合兵/병력을 합함)하여 10만이었는데,
명(命)하여 왕후(王厚/철종조 강융족을 격파한 사람)를 마음대로 곤기(閫寄/일선의 장군)로 삼고,
이에 동관은 이헌(李憲)의 고사(故事)에 따라 그 군(軍)의 감독(監督)으로 등용되었다.
(동관의 군대가) 황천(湟川)에 이르렀는데, 마침 금중(禁中/궁궐)에 불이 나자,
(불길하다 생각한) 제(帝/휘종)가 수찰(手札/친필 서신)을 내려,
동관(童貫)은 역(驛)에 멈추고 서병(西兵/서쪽으로 진군)하지 말라 하였다.
동관(童貫)이 살펴보고는, (서찰을) 급히 가죽신 가운데 넣었다.
왕후(王厚)가 연고(緣故)를 물으니, 동관(童貫)이 말하길
「상(上)께서 성공(成功)을 재촉한다.」
군대가 마침내 출발하여, 4 주(州)를 회복하였다.
(동관이) 경복전사(景福殿使)와 양주관찰사(襄州觀察使)를 발탁하니,
양사(兩使)가 내시(內侍)에게 한층 재물을 (뇌물로) 부치는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헌(李憲)의 고사(故事) : 신종조에 환관 이헌이 서북쪽에 감군으로 파견되어 공을 세움, 이헌은 동관의 양아버지
未幾,為熙河蘭湟、秦鳳路經略安撫制置使,累遷武康軍節度使。
討溪哥臧征,復積石軍、洮州,加檢校司空。
頗恃功驕恣,選置將吏,皆捷取中旨,不復關朝廷,寖咈京意。
除開府儀同三司,京曰:
「使相豈應授宦官?」
不奉詔。
오래 지나지 않아, (동관이) 희하난황(熙河蘭湟)과 진봉로(秦鳳路)의 경략안무제치사(經略安撫制置使)가 되고,
누천(累遷/여러 번 옮김)하여 무강군(武康軍)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계가(溪哥)의 장정(臧征)을 토벌(討伐)하고, 적석군(積石軍)과 조주(洮州)를 회복하여, 검교사공(檢校司空)에 더해졌다.
자못 공을 믿고 교자(驕恣/교만하고 자만함)하여, 장리(將吏/문무관)를 선치(選置/골라 배치함)하고,
(휘종에게 천거하여) 모두 원하는 대로 중지(中旨/조정의 조칙)를 받아,
더는 (채경 등의) 조정(朝廷)에 관계(關係)하지 않으니, 채경(蔡京)의 뜻을 점점 거슬렀다.
(동관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任命)되자, 채경(蔡京)이 말하기를
「사상(使相)을 환관(宦官)에게 수여하는 것을 어찌 승낙할 수 있겠는가?」
(채경이) 조(詔)를 받들지 않았다.
*계가(溪哥)의 장정(臧征) : 1108년 5월 계가(溪哥)의 왕자(王子) 장정박가(臧征撲哥)가 항복하고, 적석군(積石軍)을 회복하였음
*사상(使相) : 지방 절도사에 재상의 호칭을 더함
*채경이 동관의 개부의동삼사 임명에 이견을 보이자, 동관이 앙심을 품고 1106년 2월 혜성이 나타났다는 구실로
원우간당비를 허물고, 채경을 파직하게 선동하였음.
政和元年,進檢校太尉,使契丹。
或言:
「以宦官為上介,國無人乎?」
帝曰:
「契丹聞貫破羌,故欲見之,因使覘國,策之善者也。」
使還,益展奮,廟謨兵柄皆屬焉。
遂請進築夏國橫山,以太尉為陝西、河東、河北宣撫使。
俄開府儀同三司,簽書樞密院河西北兩房。
不三歲,領院事。
更武信武寧護國河東山南東道劍南東川等九鎮、太傅、涇國公。
時人稱蔡京為公相,因稱貫為媼相。
정화(政和/휘종의 #4 연호) 원년(元年) (1111년)에,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진급하여, 글단(契丹/거란)에 사신으로 갔다.
혹자(或者/어떤 자)가 말하길
「환간(宦官)이 상개(上介/임금의 측근)가 되니,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이옵니까?」
제(帝/휘종)가 말하길
「글단(契丹/거란)이 동관(童貫)이 강족(羌族)을 격파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이런 연고(緣故)로 보고자 하여,
(거란이) 사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를 엿보고자 함이니, 계책(計策)으로 (동관이) 가장 알맞은 자이다.」
사신이 돌아오니, (명성이) 전분(展奮/펼치고 떨침)을 더하고,
묘모(廟謨/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와 병병(兵柄/군을 통솔하는 권한)이 모두 배속(配屬)하였다.
드디어 하국(夏國)의 횡산(橫山)에 진축(進築/축성)을 청(請)하니,
(동관을) 태위(太尉)로 하여 섬서(陝西)와 하동(河東) 및 하북(河北)의 선무사(宣撫使)로 삼았다.
잠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임명되었다가,
첨서추밀원(簽書樞密院)으로 하북(河北)과 서북(西北)의 양쪽에 두 관아를 두었다.
3년도 지나지 않아, 추밀원사(樞密院事/군정의 최고 통솔관)의 영(領)을 받았다.
무신군(武信軍)을 고쳐 무녕군(武寧軍)으로 하고
호국(護國), 하동(河東), 산남(山南), 동도(東道), 검남(劍南), 동천(東川) 등 9 지역을 지켰으며,
태부(太傅) 및 경국공(涇國公)에 봉하여 졌다.
이때 사람들이 칭(稱)하기를 채경(蔡京)을 공상(公相/숫재상)이라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관(童貫)은 온상(媼相/할머니 재상)이라 칭(稱)하였다.
*송사 휘종본기에 따르면 동관은 1108년 무신군 절도사에 임명되었으며, 곧 조주 등을 회복하여 검교사공이 더해지고,
1111년에는 검교태위로 진급하여 요에 사신으로 천조제를 알현하였으며,
1112년에는 무신군절도사 겸 태위에 임명되었다.
將秦、晉銳師深入河、隴,薄於蕭關古骨龍,謂可制夏人死命。
遣大將劉法取朔方,法不可,貫逼之曰:
「君在京師時,親授命於王所,自言必成功,今難之,何也?」
法不得已出塞,遇伏而死。
法,西州名將,既死,諸軍恟懼。
貫隱其敗,以捷聞,百官入賀,皆切齒,然莫敢言。
關右既困,夏人亦不能支,乃因遼人進誓表納款。
使至,授以誓詔,辭不取,貫彊館伴使固與之,還及境,棄諸道上。
舊制,熟羌不授漢官,貫故引拔之,有至節度使者。
弓箭手失其分地而使守新疆,禁卒逃亡不死而得改隸他籍,軍政盡壞。
政和元年,副鄭允中使於遼,得燕人馬植,歸薦諸朝,遂造平燕之謀,選健將勁卒,刻日發命。
장차 진(秦)과 진(晉)의 예사(銳師/날쌘 군사)로 하(河)와 롱(隴) 및 박(薄)에 심입(深入/깊게 들어옴)하여,
(서하 인근의) 소관(蕭關)의 고골룡(古骨龍)에 가까워지자,
(동관이) 이르기를 가히 사명(死命/죽을힘을 다함)하여 하국인(夏國人)을 막으라 하였다.
대장(大將) 유법(劉法)을 보내 삭방(朔方/북방北方)을 취(取)하게 하였는데,
유법(劉法)이 불가(不可/할 수 없음)하다 하니, 동관(童貫)이 핍박(逼迫)하여 말하길
「군(君/공경대부의 부를 때의 호칭)이 경사(京師/개봉)에 있을 때에,
(임금께서) 친히 왕소(王所/왕이 있는 곳)에서 수명(授命/명령을 내림)하시었는데,
(그대는) 스스로 말하길 필(必)히 성공(成功)한다 하고서는, 지금은 어렵다 하니, 어째서인가?」
유법(劉法)이 부득이(不得已)하게 출새(出塞/요새要塞를 나옴)하였는데, 매복(埋伏)을 만나서 죽었다.
유법(劉法)은, 서주(西州)의 명장(名將)이었는데, 이윽고 죽으니, 각 군이 흉구(恟懼/매우 두려워 함)하였다.
동관(童貫)이 그 패배를 숨기고, 첩문(捷聞/승첩을 전함)하니, 백관(百官)이 들어와 하례(賀禮)하였는데,
모두 절치(切齒/분하여 이를 감)하였지만, 그럼에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송의) 관우(關右/관중 지역)가 이윽고 곤란(困難)하였는데, 하국인(夏國人) 역시(亦是) 지탱(支撐)하기가 불능(不能)하니,
이로 인하여 요국인(遼國人)이 (중재하여) 납관(納款/정성을 다해 받아들임)하는 서표(誓表/맹세하는 표문)를 나아가게 하였다.
사신이 이르러, 서조(誓詔/서약의 조서)를 주니, 핑계삼아 취(取)하지 않고는,
동관(童貫)이 억지로 관반사(館伴使/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관직명)를 가두고 (사신과) 같이 가서는,
국경에 이르러 (사신을) 돌려보내고, (서조를) 모두 도상(道上/노상路上/길바닥)에 버렸다.
구제(舊制/예전의 제도)에, 숙강(熟羌/귀화한 강족)에게는 한관(漢官/중국의 관직)을 수여(授與)하지 않았는데,
동관(童貫)이 뽑아 추천(推薦)한 까닭으로, (숙강 중에)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는 자가 있었다.
궁전수(弓箭手/궁병)가 (지키던) 그 분지(分地/나눈 땅)를 잃어버리고 이에 신강(新疆/새롭게 개척한 땅)을 (또) 지키게 하자,
금졸(禁卒/금군 병졸)이 도망(逃亡)가 죽지 않았음에도 (도망병들이) 다른 호적(戶籍)으로 바꾸어 얻게 되니,
군정(軍政)이 다 없어지고 무너졌다.
정화(政和/휘종의 #4 연호) 원년(元年) (1111년)에, 부사(副使)로 정윤중(鄭允中)과 사신으로 요(遼)에 갔는데,
연인(燕人) 마식(馬植)을 얻어, 돌아와 조정(朝廷)에 천거(薦擧)하여, 드디어 연(燕)을 평정할 모략(謀略)을 만들어,
건장(健將/건강한 장수, 맹장猛將)과 경졸(勁卒/굳센 병졸)을 선발(選拔)하여,
각일(刻日/날짜를 정함)하여 발명(發命/군사 동원의 명을 발함)하였다.
會方臘起睦州,勢甚張,改江、浙、淮南宣撫使,即以所聚兵帥諸將討平之。
方臘者,睦州青溪人也。
世居縣堨村,託左道以惑衆。
初,唐永徽中,睦州女子陳碩真反,自稱文佳皇帝,故其地相傳有天子基、萬年樓,臘益得憑籍以自信。
縣境梓桐、幫源諸峒皆落山谷幽險處,民物繁夥,有漆楮、杉材之饒,富商巨賈多往來。
時吳中困於朱勉花石之擾,比屋致怨,臘因民不忍,陰聚貧乏游手之徒。
방랍(方臘)이 (무리를) 모아 목주(睦州)에서 일어나니, 기세(氣勢)가 심(甚)히 성(盛)하였는데,
(동관을) 강(江)과 절(浙) 및 회남(淮南) 선무사(宣撫使)로 고쳐,
곧 제장(諸將)을 인솔하여 병력을 모아 토평(討平/토벌하여 평정함)하게 하였다.
방랍(方臘)이라는 자는, 목주(睦州)의 청계(青溪) 사람이다.
현알촌(縣堨村)에 세거(世居/대대로 거주함)하였는데,
좌도(左道/사도邪道/방랍은 사마당事魔黨 마니교를 선동함)에 의지하여 무리를 미혹(迷惑)하였다.
처음에, 당(唐) 영휘(永徽/고종高宗 #1 연호 650년~655년) 중에,
목주(睦州)의 여자(女子) 진석진(陳碩真)이 반란(反亂)을 일으켜, 문가황제(文佳皇帝)라 자칭(自稱)하니,
이런 연고(緣故)로 그 땅에는 천자기(天子基/천자의 터)와 만년루(萬年樓/누각)가 있다고 상전(相傳/대대로 전함)하였는데,
방랍(方臘)이 이를 빙자(憑籍)하여 자신(自信/자신의 능력을 확신함)을 더욱 얻었다.
현경(縣境/현의 경계)에 재동(梓桐)과 방원(幫源)의 각 산굴(山窟)이 모두 낙산곡유(落山谷幽/깊게 떨어진 깊은 산골)의
험처(險處/험준한 곳)에 있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민물(民物/민간에서 나오는 재물)이 번과(繁夥/무성하고 많음)하여, 옻칠한 닥나무와 삼나무 재목이
넉넉하게 있으니, 부상(富商/부자 상인)과 거가(巨賈/거상巨商)가 많이 왕래(往來/가고 옴)하였다.
당시 오(吳) 지역이 주면(朱勉/朱勔)의 화석지요(花石之擾)로 피곤(疲困)하였는데,
비옥(比屋/집들이 이어 있는 모양/집집마다)에 원망(怨望)이 이르니,
방랍(方臘)이 피곤한 백성이 참지 못하자,
빈핍(貧乏/가난하고 부족함)하여 유수(游手/놀고 있는 사람)하는 무리를 음취(陰聚/몰래 모음)하였다.
*주면(朱勉/朱勔)의 화석지요(花石之擾) : 휘종조 진귀한 꽃, 돌, 나무 등을 전국에서 수집하여 정원을 많이 꾸몄는데
이를 화석강(花石綱)이라 하였는데, 이로 인해 전국의 백성이 힘들어하였다.
이를 화석강에 의한 시끄러움이라 하여 화석지요(花石之擾)라 불렀는데,
특히나 강남 지역에서 주면이란 자가 화석강 책임자로 민간에 행패를 많이 부렸다.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방랍이 맨 먼저 주면을 죽이고 분풀이를 하였다.
宣和二年十月,起為亂,自號聖公,建元永樂,置官吏將帥,以巾飾為別,自紅巾而上凡六等。
無弓矢、介胄,唯以鬼神詭祕事相扇訹,焚室廬,掠金帛子女,誘脅良民為兵。
人安於太平,不識兵革,聞金鼓聲即斂手聽命,不旬日聚衆至數萬,破殺將官蔡遵於息坑。
선화(宣和/휘종의 #6 연호) 2년 (1120년) 10월에, 난(亂)을 일으키니, 스스로 호(號)를 성공(聖公)이라 하고,
건원(建元/연호를 세움)하여 영락(永樂)이라 하며, 관리(官吏)와 장수(將帥)를 두고,
건식(巾飾/두건으로 꾸밈)으로 구별(區別)하여, 자홍(自紅)색 두건을 최상으로 삼고 무릇 6등급을 두었다.
궁시(弓矢/활과 화살)와 개주(介胄/갑옷과 투구)가 없고,
오직 귀신(鬼神)으로 궤비(詭祕/속이고 숨김)함으로써 서로 선수(扇訹/부채질하여 꾀임)하여 일을 만들고는,
실려(室廬/농가)를 불사르고, 금백(金帛/금과 비단)과 자녀(子女/남자와 여자)를 노략(擄掠)질하고,
양민(良民)을 유협(誘脅/달래고 위협함)하여 병(兵)으로 삼았다.
(세상이) 태평(太平)하며 인안(人安/사람이 편함)하니, (사람들이) 병혁(兵革/병기)을 부식(不識/알지 못함)하여,
(백성들이) 금고(金鼓/꽹과리와 북) 소리를 들으면 곧 염수(斂手/두 손을 공손히 마주 잡음)하여 청명(聽命/명을 들음)하였고,
(이에 방랍이) 순일(旬日/10 일)도 되지 않아 무리를 모아 수만(數萬)에 이르렀는데,
장관(將官) 채준(蔡遵)을 식갱(息坑)에서 파살(破殺/깨트려 죽임)하였다.
十一月陷青溪,十二月陷睦、歙二州。
南陷衢,殺郡守彭汝方;北掠新城、桐廬、富陽諸縣,進逼杭州。
郡守棄城走,州即陷,殺制置使陳建、廉訪使趙約,縱火六日,死者不可計。
凡得官吏,必斷臠支體,探其肺腸,或熬以膏油,叢鏑亂射,備盡楚毒,以償怨心。
警奏至京師,王黼匿不以聞,於是兇焰日熾。
蘭溪靈山賊朱言吳邦、剡縣仇道人、仙居呂師囊、方巖山陳十四、蘇州石生、歸安陸行兒皆合黨應之,東南大震。
發運使陳亨伯請調京畿兵及鼎、澧槍牌手兼程以來,使不至滋蔓。
徽宗始大驚,亟遣童貫、譚稹為宣撫制置使,率禁旅及秦、晉蕃漢兵十五萬以東,且諭貫使作詔罷應奉局。
11월에 청계(青溪)을 함락(陷落)하고, 12월에 목주(睦州)와 흡주(歙州)의 2주를 함락(陷落)하였다.
남으로 구주(衢州)를 함락(陷落)하고, 군수(郡守) 팽여방(彭汝方)을 죽였다.
북으로 신성(新城)과 동려(桐廬) 및 부양(富陽)의 각 현(縣)들을 약탈(掠奪)하고, 항주(杭州)를 핍박(逼迫)하였다.
(항주의) 군수(郡守)가 성(城)을 버리고 도주(逃走)하니, 주(州)가 즉시 함락되었고,
(방랍이) 제치사(制置使) 진건(陳建)과 염방사(廉訪使) 조약(趙約)을 죽이고,
(항주를) 6일 동안이나 종화(縱火/방화放火)하니, 죽은 자를 셀 수가 없었다.
무릇 관리(官吏)를 사로잡으면, 반드시 지체(支體/팔과 다리)를 끊어 고기로 만들고, 그 폐장(肺腸/허파와 창자)을 꺼내거나,
혹(或)은 고유(膏油/고깃기름)로써 삶거나, 화살촉을 모아 난사(亂射)하고,
비진(備盡/있는 힘을 다함)으로 초독(楚毒/괴롭히고 해침)하니, (이는 관리를) 원심(怨心/원망하는 마음)으로 갚은 것이다.
경주(警奏/경계하여 아뢰는 서신)가 경사(京師/개봉)에 이르자, 왕보(王黼)가 숨기고 이문(以聞/임금께 아룀)하지 않으니,
이에 (방랍의) 흉염(兇焰/흉악한 기세)이 날마다 치(熾/성盛함)하였다.
난계령(蘭溪靈) 산적(山賊) 주언(朱言)과 오방(吳邦), 섬현(剡縣)의 구도인(仇道人), 선거(仙居)의 여사낭(呂師囊),
방암산(方巖山)의 진십사(陳十四), 소주(蘇州)의 석생(石生), 귀안(歸安)의 육행아(陸行兒)가
모두 합당(合黨/무리를 합침)하여 (방랍에) 응(應)하니, 동남(東南)이 대진(大震/크게 위세를 떨침)하였다.
발운사(發運使/조운 책임관) 진형백(陳亨伯)이 청(請)하여 경기(京畿)의 병(兵)과 함께
정(鼎) 과 예(澧)의 창패수(槍牌手/부대의 전후에 배치된 창병)를 골라 겸정(兼程/길을 재촉함)한 이래(以來),
사신이 자만(滋蔓/늘어져 퍼짐)하여 이르지 못하였다.
휘종(徽宗)이 비로소 대경(大驚/크게 놀람)하여, 긴급(緊急)하게 동관(童貫)과 담진(譚稹)을 선무제치사(宣撫制置使)로
삼아 보내고, 금려(禁旅/금군禁軍)와 함께 진번(秦蕃)과 진번(晉蕃)의 한병(漢兵) 15 만을 인솔(引率)하여 동진하게 하였고,
또한 동관(童貫)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지어 응봉국(應奉局/화석강을 주관하던 관청)을
파(罷)하여 (방랍을) 타이르게 하였다.
三年正月,臘將方七佛引衆六萬攻秀州,統軍王子武乘城固守,已而大軍至,合擊賊,斬首九千,築京觀五,賊還據杭。
二月,貫、稹前鋒至清河堰,水陸並進,臘復焚官舍、府庫、民居,乃宵遁。
諸將劉延慶、王稟、王渙、楊惟忠、辛興宗相繼至,盡復所失城。
四月,生擒臘及妻邵、子毫二太子、偽相方肥等五十二人於梓桐石穴中,殺賊七萬。
선화(宣和/휘종의 #6 연호) 3년 (1121년) 1월에,
방랍(方臘)의 장수 방칠불(方七佛)이 무리 6만을 인솔(引率)하여 수주(秀州)를 공격하니,
(수주의) 통군(統軍) 왕자무(王子武)가 성(城)에 올라 고수(固守)하였는데, 이윽고 (관군의) 대군(大軍)이 이르자,
적(賊)을 합격(合擊/합하여 공격함)하니, 참수(斬首)가 9천이고, 경관(京觀/적군의 시체를 쌓아올려 만든 무덤) 5곳을 만드니,
적(賊)이 거항(據杭)으로 돌아갔다.
2월에, 동관(童貫)과 담진(譚稹)의 전봉(前鋒/선봉先鋒)이 청하(清河)의 둑에 이르러, 수륙병진(水陸並進)하자,
방랍(方臘)이 다시 관사(官舍/관청에서 만든 관리가 거주하는 집)와 부고(府庫/창고) 및 민거(民居/민가)를 불사르고,
곧 밤에 달아났다.
(관군의) 제장(諸將) 유연경(劉延慶), 왕품(王稟), 왕환(王渙), 양유충(楊惟忠), 신흥종(辛興宗)이 잇따라 이르자,
모든 잃어버린 성을 회복하였다.
4월에, 방랍(方臘)과 더불어 처(妻) 소(邵)와 아들 호이태자(毫二太子) 및 위상(偽相/거짓 재상) 방비(方肥) 등 52인을
재동(梓桐)의 석혈(石穴/광산鑛山/동굴)에서 생금(生擒/생포生捕)하니, 죽인 적이 7만(萬)이었다.
四年三月,餘黨悉平。
進貫太師,徙國楚。
臘之起,破六州五十二縣,戕平民二百萬,所掠婦女自賊峒逃出,裸而縊於林中者,由湯巖、椔嶺八十五里間,九村山谷相望。
王師自出至凱旋,四百五十日。
선화(宣和/휘종의 #6 연호) 4년 (1122년) 3월에, 여당(餘黨/남은 무리)을 모두 평정하였다.
동관(童貫)이 태사(太師)로 진급하고, 초국공(楚國公)으로 진봉(進封/올려 봉함)되었다.
방랍(方臘)이 일어나, 6주(州) 52현(縣)을 깨트렸고, 죽인 평민(平民)이 200만(萬)이었는데,
소략(所掠/약탈)한 부녀(婦女)가 적의 산굴에서 도출(逃出/도망쳐 나옴)하여, 산속에서 나체(裸體)로 목매 죽은 자가,
이로 말미암아 탕암(湯巖)과 치령(椔嶺) 85 리(里) 사이의, 산곡(山谷/산골짜기)의 9 촌(村)에 이어졌다.
왕사(王師/임금의 군대)가 출발하여 개선(凱旋)에 이르기까지, 450일이었다.
臘雖平,而北伐之役遂起。
既而以復燕山功,詔解節鉞為真三公,加封徐、豫兩國。
越兩月,命致仕,而代以譚稹。
明年復起,領樞密院,宣撫河北、燕山。
宣和七年,詔用神宗遺訓,能復全燕之境者胙本邦,疏王爵,遂封廣陽郡王。
방랍(方臘)이 비록 평정되었지만, 이어 북벌지역(北伐之役)이 마침내 일어났다.
이미 연산(燕山)을 회복한 공(功)으로써,
조(詔)하여 절월(節鉞/옥절과 부월/임금이 출전하는 장수에게 내리는 임명장과 도끼)을 풀고,
(동관을) 진삼공(真三公)으로 삼았으며, 서(徐)와 예(豫)의 양국(兩國)을 가봉(加封)하였다.
두 달이 넘어가자, 치사(致仕/나이 70에 이르면 은퇴함)의 명(命)이 내렸고, 그리고 담진(譚稹)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명년(明年/다음 해)에 (치사에서) 복기(復起/다시 일어남)하여,
추밀원(樞密院)을 거느리고, 하북(河北)과 연산(燕山)을 선무(宣撫/베풀고 어루만짐)하였다.
선화(宣和/휘종의 #6 연호) 7년 (1125년), 조(詔)하여 신종(神宗)의 유훈(遺訓)을 인용(引用)하여,
능(能)히 연(燕)의 국경(國境)을 온전히 회복하는 자는 본방(本邦/우리나라/송)이 보답하여,
왕작(王爵/왕의 작위)를 올리게 하였는데, (이로인해 동관을) 마침내 광양군왕(廣陽郡王)으로 봉(封)하였다.
*북벌지역(北伐之役) : 송이 요에게 빼앗겼던 연운 16주를 회복하기 위해, 금과 해상동맹(바다를 건너 여진족과 동맹을 맺음)을
체결하여 요를 협공하면서 벌어지는 전쟁, 동관이 이끄는 20만 송군이 요의 연경을 공격하였으나
요군 기병 1만에 참패하니, 금군이 연경을 함락하였고 이에 동관 등은 돈을 내어
금에게서 6성을 교환하였고 금군은 송군이 연약함을 깨닫게 됨.
연지역을 회복한 공으로 동관은 왕에 책봉되었으나, 곧이어 금이 요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 붙치자
연운의 나머지 지역도 회복할 요량으로 동관이 천조제를 송에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이를 알고 분노한 금 태종 오걸매는 곧장 송을 공격하여 개봉을 두 차례 포위하고 결국 북송은 멸망함.
*1054년 생인 동관은 1123년 70세에 이르러 치사(은퇴)함
是年,粘罕南侵,貫在太原,遣馬擴、辛興宗往聘以嘗金,金人以納張覺為責,且遣使告興兵,貫厚禮之,謂曰:
「如此大事,何不素告我?」
使者勸貫速割兩河以謝,貫氣褫不能應,謀遁歸。
이해에, 점한(粘罕/금사에는 종한宗翰/오걸매의 조카)이 남침(南侵)하니, 동관(童貫)이 태원(太原)에 있다가,
일찍이 금(金)에 왕빙(往聘/보내 안부를 물음)하였던 마확(馬擴)과 신흥종(辛興宗)을 (금에) 보냈는데,
금인(金人)이 (송이 요의 항장인) 장각(張覺)을 받아들였음을 책망(責望)하였고,
또 (금이) 사신을 보내어 (송을 치겠다며) 흥병(興兵/군사를 일으킴)을 고(告)하였는데,
동관(童貫)이 후례(厚禮/후하게 예의를 차림, 후한 선물)하고, 이르며 말하길
「여차(如此/이와 같음)한 대사(大事)를, 어찌 평소에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사자(使者)가 사례(謝禮)로써 동관(童貫)에게 속(速)히 양하(兩河/하동과 하북)를 할양(割讓)할 것을 권(勸)하니,
동관(童貫)이 (영토 할양을) 응(應)함이 불능(不能/할 수 없음)하니 기치(氣褫/기운이 빠짐)하여,
모략(謀略)으로 둔귀(遁歸/도망하여 돌아옴)하였다.
太原守張孝純誚之曰:
「金人渝盟,王當令天下兵悉力枝梧,今委之而去,是棄河東與敵也。河東入敵手,奈河北乎?」
貫怒叱之曰:
「貫受命宣撫,非守土也。君必欲留貫,置帥何為?」
孝純拊掌嘆曰:
「平生童太師作幾許威望,及臨事乃蓄縮畏懾,奉頭鼠竄,何面目復見天子乎?」
貫奔入都,欽宗已受禪,下詔親征,以貫為東京留守,貫不受命而奉上皇南巡。
태원(太原)을 지키던 장효순(張孝純)이 꾸짖어 말하길
「금인(金人)이 투맹(渝盟/맹세를 어김)하니, 왕(王/동관)은 마땅히 천하(天下)의 병(兵)으로 하여금
실력(悉力/힘을 다 함)하여야 하는데 지오(枝梧/머뭇거림)하여, 지금 내버려 두고 가니,
이를 버림은 하동(河東)을 적에게 주는 것이오.
하동(河東)이 적의 손에 들어간다면, 하북(河北)은 어찌하겠소?」
동관(童貫)이 노질(怒叱/몹시 성을 내 꾸짖음)하여 말하길
「이 동관(童貫)은 선무(宣撫/베풀고 어루만짐)하라 수명(受命/명을 받음)하였는데, 수토(守土/국토를 지킴)하지 못하겠느냐.
군(君/공경대부를 부를 때 호칭)이 반드시 이 동관(童貫)을 머물라 하는데, 수신(帥臣/재상)을 두어 어찌하겠느냐?」
장효순(張孝純)이 부장(孝純/박수를 침)하며 탄식(嘆息)하며 말하길
「평생(平生) 동태사(童太師)는 어느 정도 위망(威望/위세와 명망)을 이루었으니,
급기야 일을 임(臨)하면 이내 모은 것을 축(縮)낼까 외섭(畏懾/매우 두려워 함)하고,
봉두(奉頭/머리를 싸맴)하고 서찬(鼠竄/쥐처럼 숨음)하니, 어찌 천자(天子)를 다시 볼 면목(面目)이 있겠소?」
동관(童貫)이 급히 도읍(都邑/개봉)에 들어갔는데, 흠종(欽宗)이 이미 수선(受禪/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하여,
친정(親征/임금이 직접 정벌에 나섬)을 하조(下詔/조서를 내림)하였는데,
동관(童貫)을 동경유수(東京留守)로 삼으니,
동관(童貫)이 수명(受命/명을 받음)하지 않고 이에 상황(上皇/휘종)의 남순(南巡/남쪽으로 순행)을 받들었다.
貫在西邊募長大少年號勝捷軍,幾萬人,以為親軍,環列第舍,至是擁之自隨。
上皇過浮橋,衞士攀望號慟,貫唯恐行不速,使親軍射之,中矢而踣者百餘人,道路流涕,於是諫官、御史與國人議者蜂起。
初貶左衞上將軍,連謫昭化軍節度副使,竄之英州、吉陽軍。
行未至,詔數其十大罪,命監察御史張澂跡其所至,蒞斬之,及於南雄。
既誅,函首赴闕,梟於都市。
동관(童貫)이 서변(西邊/서쪽 변경)에 있을 때 장대(長大)한 소년(少年)을 모아 승첩군(勝捷軍)이라 호칭(呼稱)하니,
기만인(幾萬人/몇 만 명)이었는데, 친군(親軍)으로 삼아, (동관의) 제사(第舍/제택)를 환열(環列/둥글게 둘러쌈)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들을 끼고 자기를 따르게 하였다.
상황(上皇)이 부교(浮橋)를 건넜는데,
위사(衞士/호위군사)가 반망(攀望/매달리며 바라봄)하여 호통(號慟/서럽게 울며 부름)하였는데,
동관(童貫)은 오직 빨리 가지 못할까 두려워, 친군(親軍)으로 하여금 (화살을) 쏘게 하니,
중시(中矢/화살에 명중됨)하여 넘어진 자가 100 여인이니, 도로(道路)에서 (위사와 사람들이) 유체(流涕/눈물을 흘림)하였고,
이에 (분노한) 간관(諫官)과 어사(御史)와 함께 국인(國人)이 (동관의 죄를 논하는) 봉기(蜂起)를 의논하였다.
(흠종이 동관을) 처음에 좌위상장군(左衞上將軍)으로 폄(貶/관직을 깎음)하고,
잇달아 소화군(昭化軍)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유배(歸養)하여, 영주(英州)와 길양군(吉陽軍)으로 내쳤다.
(동관이 유배지로) 미처 이르지도 않았는데, (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그 열 가지 대죄(大罪)를 하나하나 들어 책망하고,
명(命)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어사대의 6품 관원) 장징(張澂)에게 그 이르는 곳을 추적(追跡)하여,
다다르자마자 참하게 하니, (동관이 있는) 남웅(南雄)에 도달하였다.
이윽고 주살(誅殺)하여, 함수(函首/머리가 담긴 함)가 궐(闕)에 이르니, 도시(都市/개봉의 저잣거리)에서 효시(梟示)하였다.
*동관의 10죄
1. 임금에게 화석강을 권한 죄
2. 거란을 멸한다며 조양사를 천거한 죄
3. 건복궁 등을 지은 죄
4. 흠종이 태자에 있을 때 여러 번 흔든 죄
5. 흠종이 태자에 있을 때 책립에 딴 말을 한 죄
6. 방랍의 난 당시 명이 이르지 않았는데도 멋대로 백성을 죽인 죄
7. 동경유수로 임명을 거부한 죄
8. 동경의 포위가 풀어졌다는 것을 듣고는 그제서야 간 죄
9. 불법으로 재물을 모은 죄
10. 사사로이 기른 군사들을 죽인 죄
貫握兵二十年,權傾一時,奔走期會過於制敕。
嘗有論其過者,詔方劭往察,劭一動一息,貫悉偵得之,先密以白,且陷以他事,劭反得罪,逐死。
동관(童貫)이 병권(兵權)을 쥔지 20년에, 권세(權勢)가 일시(一時)에 기우니,
(동관이) 제칙(制敕/조칙詔勅)에 의한 화를 피하기 위해 분주(奔走/급히 달아남)하였다.
일찍이 그 화(過)에 대한 논의(論議)를 하여, 조(詔)하여 방소(方劭)에게 조사하여 가게 하였는데,
방소(方劭)가 하루를 움직이고 하루를 쉬니, 동관(童貫)이 모두 정탐(偵探)하여 이를 얻게 되었고,
이전에 친밀(親密)하게 지내다 탄핵(彈劾)하고, 또한 다른 일로 모함(謀陷)하니,
방소(方劭)가 (동관 자신을) 배반하여 죄를 얻었다 하여, (동관이) 뒤쫓아가 죽였다.
貫狀魁梧,偉觀視,頤下生須十數,皮骨勁如鐵,不類閹人。
有度量,能疏財。
後宮自妃嬪以下皆獻餉結內,左右婦寺譽言日聞。
寵煽翕赫,庭戶雜遝成市,岳牧、輔弼多出其門,厮養、僕圉官諸使者至數百輩。
窮姦稔禍,流毒四海,雖葅醢不償責也。
동관(童貫)의 용모(容貌)가 괴오(魁梧/몸집이 장대함)하고, 위관(偉觀/훌륭한 용모)이 볼만하였고,
턱 아래에 수(須/수염鬚髥)가 십수 개가 났고, 피골(皮骨/살가죽과 뼈)이 철(鐵)과 같이 굳세니,
엄인(閹人/고자)의 부류(部類)가 아니었다.
도량(度量/너그러운 마음과 깊은 생각)이 있고, 재물(財物)을 모으는데 능(能)하였다.
후궁(後宮)에서 비빈(妃嬪) 이하에까지 모두 음식을 바치고 결내(結內/궁중의 여인들과 좋은 관계를 맺음)하니,
좌우(左右)의 부사(婦寺/궁중의 여자와 환관)가 예언(譽言/칭찬하는 말)함을 일문(日聞/매일 들음)하였다.
(휘종의) 총애(寵愛)가 흡혁(翕赫/성대함)하여,
(동관의) 정호(庭戶/정원)가 잡답(雜遝/난잡亂雜)하게 성시(成市/시장을 이룸, 시끌벅적함)하였고,
악목(岳牧/지방관)과 보필(輔弼/임금의 근신)이 그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는데,
시양(厮養/하인과 수양아들)과 복어(僕圉/종복과 마부) 중에 관리가 된 자가 수백(數百) 무리에 이르렀다.
간악(奸惡)함이 극에 달하여 화(禍)가 쌓여, 사해(四海)에 유독(流毒/독이 흐름)하였으니,
비록 저해(葅醢/죽여 젓 담그는 형벌)하여도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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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동관은 1054년에 신종조 환관이던 이헌의 문하에서 태어나, 이헌의 양자가 되었고
20세 즈음에 스스로 거세하고 환관이 되었다.
몸집이 남들에 비해 크고 단단하고 용모가 훌륭하였으며
늦은 나이에 거세한 탓으로 턱수염이 10가닥 이상 있었다.
성격이 약삭빠르고 아첨을 잘하였으며, 마음 씀씀이가 관대하여 자못 주변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다.
환관이 된지 25년 즈음에, 19세의 휘종이 즉위하자 본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휘종이 명품과 예술을 좋아하는 것을 눈치챈 동관은 전국에서 명품을 끌어모으기 시작하였고
스스로도 항주에 내려가 명품을 골랐다.
이를 화석강이라 하며, 백성들의 크나큰 원성을 사게 되고, 훗날 방랍의 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항주에서 좌천 중이던 신법당 채경을 만나 의기 투합하여
개봉으로 올라와 휘종에게 채경을 천거하게 된다.
개봉에 올라와 요직에 앉은 채경은 달콤한 말로 휘종을 꼬였으며
부국강병책으로 신법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채경과 동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폐지되었던 신법이 강력하게 시행되었으며
구법이 폐지되었고, 구법당 인사 109명의 명단이 적힌 원우간당비를 전국에 세우는 등
구법당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게 된다.
유림을 기반으로 하는 구법당을 요직에서 내치고, 유일한 언로였던 간관마저도 막아버린 채경과 동관 일행은 개혁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서북쪽 강족에게 빼앗겼던 희하난황 지역을 수복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강족은 서하라는 나라를 세워 중국의 서북쪽을 위협하였는데,
구법당 인사와 심지어는 신법당 인사들의 전쟁 반대론을 무시하고 기어코 전쟁 준비에 들어간다.
재상이던 채경은 동관을 총사령관으로 적극 추천하여 드디어 동관이 서쪽으로 간다.
진(秦)과 진(晉) 지역에 도착한 동관은 그곳의 병사 15만을 뽑았다.
이후 두진의 병사들은 송의 주력병으로 사용되었으며, 방랍과 거란과의 싸움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동관은 이 지역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덩치가 큰 소년병들을 수만 명 뽑아 친군이라 하여 호위 사병으로 삼았다.
동관은 군사적인 면에서는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특히 장수를 보는 눈이 탁월하여 유능한 장수들을 발탁하여 주장으로 삼았다.
동관의 주도로 1105년에서 1108년 사이에 서북쪽의 영토를 회복함에 따라, 휘종의 총애는 더욱 깊어졌고 동관의 권력 또한 더욱 확대되었다.
휘종은 동관에게 절도사에 재상의 직위까지 더해 줬는데, 조정의 채경은 동관이 조정을 무시하자
환관을 사상(절도사+재상)에 임명할 수 없다고 임명에 반대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동관은 1106년 혜성이 나타났다는 구실로 휘종을 선동해 채경을 파직하게 하였으며
신법을 중지시키고, 전국에 세웠던 원우간당비를 허물게 하였다.
즉 조정의 재상도 동관 한마디에 파리 목숨이 된 것이었다.
얼마 안 있어 채경은 다시 복권되고, 이후에는 동관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강족과의 전쟁에서도 동관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동관이 정예병을 이끌고 서북으로 나아갈 때, 개봉의 궁궐에서 불이 났다.
도교를 깊이 숭상했던 휘종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보고,
급히 칙서를 보내 동관의 군을 정지시키려 하였다.
칙서를 받아본 동관은 오히려 황제가 성공을 재촉한다고 장수들에게 알려 군의 사기를 올린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황명도 위조해버리는 강단을 지닌 동관이었다.
한편 송과의 전쟁에 지쳐버린 서하는 요에 구원을 요청하고, 요가 적극적으로 송과 서하의 중재 역할을 하여 결국 정전 협상을 이끌어 낸다. 이는 송도 막대한 피해를 입어 더 이상은 서하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상 하국과의 전쟁에 대패를 당해도 동관이 승전하였다고 올리니 휘종은 더욱 알 수가 없었다.
오직 동관의 뜻대로 모든 것이 돌아갔던 것이었다.
요의 천조제는 서하를 괴롭힌 동관이란 장수에 대해 관심을 보였고, 송에 동관을 보고 싶다고 전한다.
환관을 사신으로 보낼 수 없다는 일부 조정의 말이 있었으나,
휘종은 동관이 적격이라며 동관을 태위로 승격시켜 사신으로 보낸다.
요에 도착한 동관을 본 천조제는 그가 환관임을 알고 손가락질하며
<남조의 인재가 이와 같구나> 라며 비웃는다.
동관이 요에서 귀국할 무렵, 요 연경의 마식이란 자가 동관을 찾아와
연운 16주를 되찾을 계책을 올린다.
동관은 몰래 마식을 데리고 귀국하여 휘종에게 천거하였고
마식에게 조씨성을 하사하여 조양사로 개명한다.
이 계책이 유명한 해상동맹의 계책이었다.
해상동맹이란 바다를 건너 여진족과 동맹하고 요를 협공하여 연운 16주를 회복한다는 계책이었다.
이에 휘종은 동관을 군정의 총책임자인 추밀원사로 임명하고
두 진의 병사들을 조련하며 요와의 전쟁을 대비하게 한다.
또한 삼공 중 하나인 태부와 공작에 봉하니 세상 사람들은 조정의 재상인 채경을 공상이라 하고
동관을 할머니 재상이란 뜻의 온상(媼相)이라 불렀다.
동관이 67세가 되던 1121년 10월에 화석강의 폐해로 강남에서 방랍이 난을 일으키니,
순식간에 농민 반란군이 10만에 이르렀다.
강남의 6주가 함락되고, 보낸 중앙군이 연패하자 휘종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요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육성되던 두진의 병사 15만을 동원한다.
동관은 15만을 이끌고 동진하여 강남으로 내려가 방랍의 난을 진압한다.
약 450일간의 진압작전으로 방랍의 난을 평정하였지만
강남 6주 52현이 초토화되고 사망자가 200만 명에 이르렀다.
허나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요금 전쟁이었다.
총 병력이 3만에도 미치지 못하던 여진군이 70만에 달하던 요군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서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골타는 해상동맹을 들어 송이 요를 협공하라 말하였고
이에 휘종은 방랍의 난을 토벌하고 돌아온 두진의 병사들을 다시 요와의 전쟁에 투입한 것이었다.
당시 요의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주한 후였고,
연경에서는 황족 야율순이 황제에 옹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야율순은 세폐 면제 등의 조건을 내세워 송에 동맹을 제의하였으나,
동관은 이를 무시하고 연경을 공격한다.
허나 고향을 떠나 오랜 전쟁으로 사기가 떨어져 있던 20만의 송군은 1만의 요군에 처참하게 격파당하고, 연경은 끝내 송의 사신이 참관한 상태에서 아골타의 지휘하에 금군에 함락 당한다.
참패한 동관은 금 태조 아골타에게 약속한 땅을 달라고 청하였고,
아골타는 다량의 세폐를 받는 조건으로 획득한 16주 중에 6주를 돌려준다.
1123년 개봉에 돌아온 동관은 삼공에 임명되었으며 다시금 공작에 가봉된다.
곧이어 동관이 70세가 되자 조정에서 치사, 은퇴하였다가
1124년에 다시 조정으로 불러져 추밀원을 거느리고 하북과 연지역을 통솔하였다.
1125년에는 마침내 동관은 휘종에 의해 광양군왕에 봉해진다.
이는 선황제였던 신종이 <연을 회복한 자를 왕에 봉한다>라는 유훈을 남긴 때문이었다.
허나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으니, 1125년 2월에 요를 멸망시킨 금의 창끝은 송을 향하게 된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송의 동맹파기에 있었다.
당초 금이 요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이자, 동관은 남은 연운 지역마저 회복하기 위해 계략을 꾸민다.
당시 연경을 다스리던 자는 장각이란 자로, 장각은 요의 장수로 금에 항복하였으나
이는 거짓 항복으로 속으로는 천조제를 다시 옹립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장각이 동관에게 귀부 및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송은 천조제를 구할 요량으로 천조제에게 서신을 보내게 된다.
금의 장수인 종한이 천조제를 사로잡았는데, 이때 송과의 내통 서신이 발각되게 된다.
이 서신은 금 태조 오걸매에까지 전달되었고,
요를 멸한지 7달도 되지 않아 1125년 9월 오걸매는 송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이에 종한이 이끄는 금군(여진+발해+거란 연합) 6만이 1125년 12월 국경을 넘고
1126년 1월 3일 황하를 건너게 된다. 이에 휘종은 태자에게 선위한다.
즉위한 흠종은 동관을 동경유수로 삼아 임지로 가게 하였으나 이미 동경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관은 이를 거부하고 친군을 동원하여 휘종을 모시고 개봉을 나와 남쪽으로 도주한다.
1126년 1월 17일 1차 개봉 포위전이 끝나고 송과 금의 강화협상이 체결되자, 흠종은 동관의 관직을 깎고 영주로 유배형을 내리게 된다.
유배지로 향하던 도중, 흠종은 다시 동관의 10가지 죄를 들어 다시 사신을 보내 동관을 죽이라 명한다.
명을 받은 장징이 남웅에 이르러 동관을 참하고,
그 목을 개봉의 흠종에게 바치니 개봉의 저잣거리에 효수하였고
동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73세에 멈추게 된다.
P.S) 본 글은 동의 없이 어느 곳에나 담아 가셔도 됩니다. 출처는 남겨주시면 고맙고요.^^
P.S) 이번 번역은 좀 많이 힘들었네요. 송사 휘종, 흠종 본기 번역이 완료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하여 애 좀 먹었습니다.
오역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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