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1세기 전한 시대, 한나라 전성기의 압도적인 위상과 패왕색의 패기

 대북방전선


BC 133년, 30만 대군이 북방으로 진출, 전략 노출로 작전 실패

BC 130년 혹은 129년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이 각각 1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진, 위청만 승리
위청은 전한 건국 이래 최초로 장성을 넘어 흉노가 제사지내는 용성(蘢城)까지 진군

BC 129년, 위청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진, 흉노군 수천 격파

BC 127년, 흉노의 공격에 전한이 역습, 위청이 감숙성 난주시 위치까지 진군, 처음으로 삭방군(朔方郡)이 설치

BC 124년, 위청이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진격, 흉노 우현왕 격파, 가축 수백만 마리를 획득

BC 123년, 위청이 정양(定襄)에서 출발하여 흉노 병사 1만명을 격파

BC 121년, 초대 표기장군(驃騎将軍) 곽거병이 농서(陇西)에서 출발하여 흉노땅 1천리를 나아가며 절란왕과 노호왕을 격파, 휴저왕의 금인(金人) 탈취

그해 여름, 곽거병이 기련산 공격, 흉노의 다섯 왕을 모두 격파, 맞붙었던 흉노군 7할을 분쇄, 혼야왕의 항복을 받아냄

BC 119년, 곽거병과 위청이 각각 5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북진, 수십만의 보병과 치중대가 뒤이어 진군, 위청이 흉노 선우를 격파, 곽거병이 고비 사막 1천여리를 지나며 흉노 좌대장을 격파하고 흉노의 왕 세명을 참살, 7만 4천이 넘는 흉노군 격파, 바이칼호 근처까지 진군



대남방전선

BC 111년, 노박덕, 양복 등의 장수가 호남성 부근에서 현재 북베트남 부근인 남월로 진군, 자세한 규모는 불명이나 양복이 수만명을 이끌고, 노박덕이 1천명으로 합류, 순식간에 정복


 
대동방전선

BC 109년, 누선장군 양복, 좌장군 순체가 수륙병용으로 5만의 부대를 요동과 산동반도를 통해 진군, 왕검성 공성전 끝에 조선 멸망


대서방전선 

BC 104년, 이광리가 수만명의 불량배(직업 없는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와 속국 병사 6천여명을 거느리고 현재 우즈베키스탄 북부의 페르가나(대완) 공격, 

(대완의 수도 귀산성의 위치에 대해, 구와바라 지쓰조는 타지키스탄의 호젠트에 있다고 하고, 시라토리 구라키치는 이란에 있는 카산일 것이라고 추측)

처음 공격 실패 후 6만 이상의 지원군과 10만이 넘는 가축의 보급을 받아 군사 작전 성공  








이 시대 전한의 대외적인 위상이 정말 압도적이라는것은,

불과 20년 사이에 동, 서, 북, 남으로 제국의 전국경을 통해 대외원정을 시도하고, 또한 이를 성공시킨다는 점입니다.

원정군의 규모도 모두 수만을 웃도는 숫자로, 흉노를 제외하고는 대완, 조선, 남월 어느쪽도 그 엄청난 물자와 병력을 상대로 버티는게 불가능에 가깝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북방전선과 서방전선입니다.





수만 이상의 부대를 고비 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나드는 대원정을 BC 1세기에 시도하고, 또 이를 성공시킨다는 점입니다.
 

'원정' 이라는게 일반적인 전투에 비해 엄청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또한 사막을 넘는 원정은 보급 등의 여건이 사상최악이라는 측면에서, 단순히 부대를 진군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곽거병의 경우는 바이칼 호 부근까지 진격하면서 승리를 거두었고, 서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결은 간단합니다. BC 119년 흉노와의 전쟁의 경우, 10만의 기병과 말 14만 필을 동원하여 압도적인 물자를 바탕으로 진격했고, 


이광리의 경우, 처음에 너무나 먼 거리 등으로 인해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전력이 지리멸렬해지는데, 그 상황에서 6만의 병력과 10만이 넘는 소떼를 또다시 급파해서 결국 힘으로 눌러버리는데 성공합니다.



일반적인 유목민의 싸움 방식이 적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오도가도 못하고 보급조차 불가능 해진 적을 격파하는 것(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한문제 시절에 장군들의 진격이 황제의 명령으로 제한되었고) 임을 생각해보면, 되려 수십마느이 부대를 사막을 가로질러 진격하여, 절정기의 유목제국의 근간을 뒤흔들어 버릴 정도였던 전한 시기의 대외 위상이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실감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당시 몽골 고원의 기후가, 현재보다는 높은 편이라 진군이 수월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당시 전한의 힘이나 여타 측면으로 보면, 특수한 경우인 흉노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주변의 나라들과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천년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심지어 그 '특수한 경우' 인 흉노조차(물론 내부 분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미래 동서돌궐의 갑작스러운 분열같은 극심한 대혼란이 벌어지지 않았음에도) 순수한 '군사적인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치게 될 정도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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