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9성 [길주이남설]을 뒷받침할 비문에 관한 내용을 써볼까 합니다.

 현재 동북9성의 최전방에는 약 4가지 설이 있는 거 맞지요?


1. 길주이남설 → 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주장
2. 함흥평야설 → 주로 일제 초기 일본 학자들의 주장
3. 두만강 인근설 → 주로 세종실록 지리지 등 조선조의 주장 (공험진 내방소)
4. 두만강 이북설 → 주로 세종실록 지리지 등 조선조의 주장 (공험진 외방소)

이중 길주 이남설은 실학자들이 진흥왕순수비를 윤관의 정계비로 오인한 것이라는 것과
함흥평야설은 함흥 일대의 산성에 국한한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연구라는 점과
두만강 인근설과 이북설은 경원군의 고려지경이라는 정계비의 구전이 있어 이를 공험진 내, 외방소로 해석한 
세종실록지리지의 무리한 주장이며, 이는 국경 확정의 명분을 위한 것이라는 점
등등의 반박이 있다는데 대략 맞지요?


일단 제가 파악한 동북9성 중에 최동북단, 
즉 송화강 유역의 생여진 → 두만강 유역의 생여진 → 갈라전 지방의 생여진 등의 여진족의 이동경로에서
가장 맨 먼저 만나는 9성은 바로 길주성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증빙할 비문과 고려사의 내용이 있어 글을 정리 중인데, 오늘 내일 중으로 글을 써볼까 합니다.

하도 말도 많은 설이라, 되도록 개인의견은 배제하고 많은 의견을 듣고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정주(현 정평)에서 출발한 고려군은 최동북단 길주성에 성을 축성하였고,
금사 등에 나오는 갈라수 유역 전투는, 금사 사묘아리전에서도 나왔듯이
여진군이 고려군을 험처로 유인한 작전이라고 생각됩니다.
즉 동북9성이 두만강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려군 수만을 두만강 유역으로 끌어들인 후 철벽 방어를 시전하였고,
이에 두만강이 얼었을 때를 기회로 퇴각하는 고려군의 후미를 쳐서 대승을 거둔 것이지요.

또한 동북9성의 키포인트가 된다는 공험진이 과연 최북단이 맞느냐 라는 것입니다.
여러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공험진은 길주로 가는 길목 중 하나입니다.

또한 여진에게 반환된 성중에 공험진은 명단에 없고, 훗날에 다시 증축하기까지 합니다.
공험진이 단지 북쪽으로는 여진과의 경계는 될지언정, 주전장은 될 수 없었고,
두만강 생여진이 집중적으로 근거하는 곳에서의 이동로를 살펴보면
여진과의 주전장은 바로 최동북단 길주이기 때문이지요.

별일 없으면 금일 내로 글을 써볼게요.^^

비문은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9성전투에 참전한 두 무장의 비문을 근거로 합니다.
당대에 건립되었고, 현직 임금의 교지 글이 포함되어 있어, 어느 사서 보다도 정확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