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6월 14일~7월 1일 고려개국 간략정리(이흔암 관련 포함)

 6월 14일 을묘일 → 밤에 왕건 거병, 궁예 도주

6월 15일 병진일 → 국호 고려, 연호 천수
6월 16일 정사일 → 궁예 피살, 1차조서(개국 천명)
6월 17일 무오일 → 청주인 사면
6월 18일 기미일
6월 19일 경신일 → 환선길 처형
6월 20일 신유일  2차조서(대신 임명, 서흥김씨 김행도 광평시중 임명)
6월 21일 임술일 → 평주박씨 박질영 시중 임명, 종간/은부 처형
6월 22일 계해일 → 춘천박씨 박유 알현
6월 23일 갑자일
6월 24일 을축일 → 3차조서(비축양식 조사령), 관리 임명
6월 25일 병인일
6월 26일 정묘일
6월 27일 무진일 → 4차조서(태봉관직 및 군현명칭 신라대로 복원), 민강 내군장군 임명
6월 28일 기사일  이흔암 처형
6월 29일 경오일
6월 30일 신미일
7월 01일 임신일 → 능식 순군낭중 임명


특이점 : 
1. 광평시중과 시중이 하루 간격으로 임명됨. 
   시중의 정원이 둘이상 된 경우는 성종조의 수시중 최승로의 경우가 있었으며, 이후에는 충렬왕 이후에나 볼수 있음.
   그러나 918년 9월에 전시중 구진을 대행대시중(大行臺侍中)으로 임명하여 나주로 부임하게 한것을 보면
   시중이 한시적으로 둘이상 존재했을 가능성도 높음
   혹은 국초 3성인 광평성(廣評省), 내의성(內議省), 내봉성(內奉省) 중, 한시적으로 내의성의 시중일 가능성도 있음
   내의성은 훗날 중서[내사]문하성으로 개편되며 문하시중이 수장.
   그러나 내의성과 내봉성은 령(令)이 수장이였음을 감안하면 가능성은 낮음.

2. 이흔암이 웅주의 진에서 상경한것은 6월20일~6월28일 사이임. 
   이유는 염장(閻萇)이 의형대령에 임명된 날이 6월20일 이기 때문임.
   같은 이유로 웅주의 진병졸들이 도주한 시기도 6월20일~6월28일 사이임.

3. 이흔암의 웅주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고 보여짐
   우선 웅주에 진을 설치한것은 궁예 말년임. 918년 당시 고려의 거점은 아산~천안~청주가 핵심이였으며
   여기서 남진하여 진을 설치한곳이 웅주(현공주)임.
   이에 따라 임존성(예산)과 운주(홍성)는 태봉에 귀부하였으나, 굉장히 느슨하였음.
   고려가 개국하고 이흔암이 웅주진을 포기하자 서북의 임존성과 운주, 동으로는 청주, 보은이 흔들리기 시작함
   후삼국 당시 진장휘하의 병력은 원윤이나 정조급은 500~1000 여명수준,
   주요 전장의 대장군급은 최대 3000 여명 수준.
   이흔암 상경후 백제에 귀부한 군현이 10여개 군현인데, 이흔암의 진의 병사가 3천명 수준이였으면
   충분히 10여개 군을 통제할 만한 수준이였음. 
   그러나 이흔암 상경후 진의 병사들이 다수 도주/도망한것을 보면 3천명 수준은 아니였던것으로 판단.
   진의 병력은 1천명 전후가 아닐까 생각됨. 
   웅주진의 병졸들 입장에서는 태봉국주가 살해되고, 웅주의 진이 설치된것은 최근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였음.
   중앙정부의 통제가 불안정하면 주변 군현이 언제든지 적대적으로 돌아설수 있는 상황에서 
   돌출되어 있는 웅주진은 인근군현 및 백제군에 포위섬멸되어 전멸의 가능성이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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