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히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문종조에 떨어진 운석 사건을 문종은 어찌 처리했는지와,
그당시에 인용된 송과 진나라의 경우는 어찌 했는지에 대해 간단히 알아 보겠습니다.
문종11년(1057년) 1월 기사中
○ 을미년에 황주(黃州)에 운석이 우레 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는데, 고을에서 그 운석을 바쳤다. 예사(禮司)가 아뢰기를, “옛날 송 나라에서도 운석이 떨어진 일이 있었고, 진(秦) 나라에서는 별이 떨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진(晉)ㆍ당(唐) 이래로 이러한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재앙이나 상서와는 관계 없는데 지금 이상한 일이라고 하여 아뢰는 것은 실로 망녕스러운 짓이니, 유사에게 내려 죄주소서." 하니, 제가(制可)하고 드디어 그 돌을 돌려보냈다.
결론1 : 문종은 운석은 별일 아니라며, 쓸데없이 일을 추진한 사람을 죄주라고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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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송(宋)나라의 경우
춘추좌씨전에 보면, 춘추전국시대인 기원전 644년 봄에 송나라에 운석 5개가 떨어집니다.
이때 송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春秋五覇)중의 한사람으로 유명한 양공(襄公)입니다.
마침 송나라에 사신?으로 와있던 주(周)나라 내사(內史) 숙흥(叔興)에게 양공은 대체 무슨일인가? 라며 운석이 떨어진것을
해석해 달라고 합니다. (명목상으로는 주나라가 제후국들을 거느리고 있었지요. 봉건제라 일본 막부시절의 일왕가와 비슷하다고 생각되네요. 일왕의 관리들이 관직등을 팔기위해, 영주들을 찾아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숙흥은 이에 "올해에는 노(魯)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것이며, 내년에는 제(齊)나라에 큰 난리가 날것입니다.
양왕께서는 한때 제후들을 거느리게 되시겠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것입니다"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물러나서 사람들에게 하는말이 "운석이 떨어진것은 자연현상일뿐, 길흉하고는 상관이 없는데
양왕이 그런 대답을 원했기에 그리 해줬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이후 제나라 환공이 죽자, 양공은 전국재패의 야망을 품고, 군사행동에 돌입해
한때 춘추오패로 불릴 정도로 강성해져, 제나라와 초나라의 맹주로 올라서게 됩니다.
송나라 재상 목이(目夷)는 소국이 맹주가 되는것은 절대 유리하지 않다고 역설했으나 양공은 무시했고,
훗날에 초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송나라를 침공하자, 목이는 초군이 강을 건널때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양공은 "군자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다" 며 초군이 강을 건널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결국 송나라는 대패하고, 양공은 부상을 입어 죽고 맙니다.
세상사람들은 쓸데없는 인정, 송양지인(宋襄之仁) 이라며 비웃습니다.
결론2 : 송나라 양공은 운석이 떨어진것을 패자의 징후로 여겼다가 참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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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된 진(秦)나라의 경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 36년(기원전 211년)에 동군(東郡)에 운석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진시황의 폭압정치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운석에
시황제사이지분(始皇帝死而地分) : 시황제가 죽고 천하가 갈라진다
고 글을 써놓게 됩니다. 이에 진시황은 어사를 시켜 범인을 찾게 하였으나 잡히지 않자
그 지방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하고 돌은 불에 태워 버리게 됩니다.
결론3 : 진나라 시황제는 운석에 쓰인 글귀에 분노하여, 그지방 사람들을 몰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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