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9성 고려군이 두만강을 한번쯤 넘었을 가능성 3부(끝)

 1. 갈라전의 규모는 약 2만호로 추정


한편 고려에 귀속한 성이 7개라고 하는데요, 문종조에 동여진에서 귀부한 여진 부락의 규모를 대략적으로 알수가 있습니다.

고려 문종조 여진1개 부락의 규모(호수, 인구, 병력등) 추정 http://cafe.naver.com/booheong/79996

결론적으로 1073년에 군현설치를 요구한 갈라전의 여진 부락, 촌수는 약 36촌이며 호수로는 대략 5500 호로 추정됩니다.
1촌당 평균 호수는 약 153호이지요.

훗날 17만의 고려군이 여진정벌전을 감행할 당시인
1107년 12월15일 ~ 12월24일간 격파한 갈라전의 촌수가 총 136 촌입니다.
고려 예종조 여진정벌 간략 상황요약 1부 http://cafe.naver.com/booheong/82074

이를 감안하면 갈라전의 대략적인 규모를 추정할 수 있지요.
즉 17만의 고려군이 개전 초기에 점령한 지역은 136촌, 1촌당 153호로 치면 약 20808 호입니다.

금사지리지를 살펴보면
갈라로는 합라로(合懶路) 총관부(總管府)가 설치되어 상경로(上京路)에 포함되었습니다.
금이 건국한 후 요와 북송을 멸하고 전국에 14총관부를 두었는데, 이중 상경로에는 회령에 총관, 갈라전에 총관을 두었지요.
그만큼 갈라전은 생여진에 있어서는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금사지리지의 상경로 예하의 호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회령부(會寧府) : 31270호
조주(肇州) : 5375호
융주(隆州) : 10180호
신주(信州) : 7359호
포여로(蒲與路) : 개국 후 만호(萬戶) → 절도사 → 절도부사 로 강등
휼품로(恤品路) : 개국 후 만호(萬戶) → 절도사 → 절도부사 로 강등
호리개로(胡裏改路) : 개국 후 만호(萬戶) → 절도사 → 절도부사 로 강등
갈소관로(曷蘇館路) : 절도사
합라로(合懶路)/갈라로(曷懶路) : 총관(總管) → 1153년 윤(尹)+병마도총관(兵馬都總管)  병마부총관

*남여진 갈소관은 국초에 상경로에 두었다가 후에 동경로에 예속시킵니다. 위치로도 동경로가 맞지요.

포여로, 휼품로, 호리개로 등은 국초에 만호 즉 맹안에 임명하였으나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
실제 10000 호에는 이르지 못할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선 이곳에는 거주 부족이 아주 적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갈라전의 규모는 적어도 융주이상 회령부에 근접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최소 1만호 이상 최대 3만호까지지요.
위의 제 계산이 맞고, 1107년 12월15일 ~ 12월24일, 약  10일간 파죽지세로 밀고가던 고려군의 진군이 길주에 멈추었다면
길주 이남의 호수는 약 2만호, 길주이북~두만강 유역에 1만호 정도 된다고 보입니다.

빠른 기병으로 진군하였다면 초기에 여진족이 속수무책으로 북으로 도주하던 것을 생각하면
꽤 깊숙이까지 진군하였다가, 회군하면서 길주 이남부터 축성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도출처 : 중국역사지도집 금대 지도中







본시 금의 총관은 5경과 14총관부를 두었습니다. 
이중 금사지리지에 한번이라도 총관부나 병마총관부를 설치한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會寧府 戶三萬一千二百七十
合懶路
咸平府 戶五萬六千四百四
遼陽府 戶四萬六百四
婆速府路
臨潢府 戶六萬七千九百七
大同府 戶九萬八千四百四十四
豐州 戶二萬二千六百八十三
開封府 ,戶二十三萬五千八百九十
河北東路
河間府 戶三萬一千六百九十一
真定府 戶一十三萬七千一百三十七
益都府 戶一十一萬八千七百一十八
東平府 戶一十萬八千四十六
大名府 戶三十萬八千五百一十一
河東北路
太原府 戶一十六萬五千八百六十二
平陽府 戶一十三萬六千九百三十六
絳州 戶一十三萬一千五百一十
京兆府 戶九萬八千一百七十七
鳳翔府 戶六萬三千三百三
延安府 戶八萬中九百九十四
慶陽府 戶四萬六千一百七十一。
臨洮府 戶一萬九升七百二十一



2. 사묘아리가 고려군을 험처로 끌어들여 고려군을 유인한후

    고려군이 회군하자 갈라수까지 추급하여 격파함


금사 사묘아리 열전中
高麗築九城於曷懶甸,渾坦攻之,遇敵於木里門甸,力戰久之,阿里挺槍馳刺其將於陣中,敵遂潰。
渾坦與石適歡合兵于徒門水,阿里首敗敵兵,取其二城。
고려(高麗)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城)을 축성(築城)하자, 혼탄(渾坦)이 공격(攻擊)하였는데,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敵)과 만나, 오랫동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정창(挺槍/창을 겨누어 듦)하여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치자(馳刺/질주하여 찌름)하자, 
적(敵)이 드디어 궤멸(潰滅)하였다.
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高麗入寇,以我兵屯守要害,不得進,乃還。
阿里追及于曷懶水,高麗人爭走冰上,阿里乘之,殺略幾盡,遂合兵于石適歡。
道遇敵兵五萬,擊走之。
又與石適歡遇敵七萬,阿里先登,奮擊大敗之。
石適歡曰:
「汝一日之間,三破重敵,功豈可忘。」
乃厚賜之。
고려(高麗)가 입구(入寇/적이 쳐들어옴)하자, 
아병(我兵/아군)으로써 요해(要害/요새, 방어가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에 둔수(屯守/주둔하여 수비함)하니, 
(고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곧 돌아갔다.
사묘아리(斜卯阿里) 갈라수(曷懶水)까지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는데,
고려인(高麗人)이 빙상(冰上/얼음 위)을 쟁주((爭走/다투어 도주함)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 승지(乘之/기세를 탐)하여, (고려군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기진(幾盡/거의 없어짐)케 하고는,
드디어 석적환(石適歡)과 합병(合兵)하였다.
길에서 적병(敵兵) 5만(萬)과 조우(遭遇)하여(사묘아리가) 격주(擊走/공격하여 나아감)하였다.
또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적(敵) 7만(萬)을 조우(遭遇)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등(先登/선봉으로 공격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
「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강한 적)을 세 번 격파(擊破)하였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
이에 후사(厚賜/후하게 하사함)하였다.

 

-필력이 난잡하여 1년만 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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