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9성 고려군이 두만강을 한 번쯤 넘었을 가능성 2부

 1103년 11월 이후 완안부에서 파견된 석적환은 1104년 1월 사이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일을 시행합니다.

1. 오수 中  성현(星顯)과 통문(統門)의 부족들의 병력을 차출
2. 성현, 통문의 군사를 거느리고 을라골령, 현 길주 근방으로 내려와 근방 부족들에게서 더 모병
3. 활열수, 현 홍원 근방까지 내려가 고려로 붙은 7성을 다시 완안부로 귀속시킴

(위치 비정은 전편을 참고하세요)

이렇게 석적환이 갈라전 북부의 부족 병력을 동원하여, 길주 이남의 친 고려 지역을 순행하자,
(당시 갈라전의 친고려파 부족의 수장은 부내로(夫乃老)였나 봅니다.)
고려사 1104년 1월 6일 기사를 살펴보면 이날 갈라전에서 
여진인 1753명이 고려 최동북단 정주로 의탁하여 들어오게 됩니다.
또한 이날 석적환의 부대가 정주 관문 밖에 진을 치게 됩니다.
즉, 부내로의 세력인 여진인 1753명을 쫓아온 것이었지요.

고려사에서는 이때 여진의 장수를 공형지조(公兄之助)라고 하는데, 
고려사 1106년 1월 18일 기사를 살펴보면 이때의 장수를 지훈(之訓)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훈(之訓)은 1106년 3월 5일 기사에서 기병 2천을 이끌고 정주성 밖에 와 화친을 청한 인물입니다.
일부 논문에서는 공형과 지조를 별개의 인물로 보기도 하던데요,
저는 혹 여진 병사들이 석적환을 태사 오아속의 종형으로 칭하여, 고려 정주성에 소리쳐 말하기를
<공(公/오아속)의 형제(兄弟)인 지조(之助)다>라고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네요.

당시에 고려에는 여진 통역관들이 다수 있었나 봅니다.
문종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1073년 5월 나갈촌 전투에 낭장 문선이 통역들과 대동하여 참관하였다는 구절과
1073년 7월에는 여진족 출신 통역관 고가서로가 여진 귀부에 공을 세워 벼슬을 내리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동북9성 여진 정벌 초기인 1107년 12월 15일에는 석성에 통역을 보내 항복을 권고하기도 
하였지요.

금사에는 석적환을 오아속의 족제라 표현하였는데, 
여진어로 형제(兄弟)는 axu dou [아후 도우]라고 발음하더군요.

[봉오선생]님은 석적환(石適歡) 中 적환(適歡)의 여진 발음이 [시훈][shi hoon] 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여진문사전에서 확인한 바로는 석(石)의 발음은 [쉬][ʃĩ ] 입니다.
또한 워싱턴 대학의 Chad D. Garcia씨의 논문을 보면 
석적환의 여진어는 Shi shi huan [쉬 쉬 후안]이라고 하더군요.
즉 석적환의 여진 발음은 [쉬시훈], [쉬쉬후안] 이었고, 
이를 고려인들이 지훈으로 표기한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지조는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대략 이러지 않았을까요?
1104년 1월 6일 석적환이 기병을 이끌고 부내로의 1753명을 쫓아옴
정주의 고려 통역관 : 너는 누구냐?
석적환 : <태사의 형제인 석적환이다.>
<taifĩ ni axu dou ʃĩ shi hoon>
<타이 수 니 아후 도우 쉬! 시! 훈!>
정주 도령(현 대령급) : 야 뭐라고 하냐?
통역관 : 공의 형인 지훈이라고 하는뎁쇼!
정주 도령 : 고래? 공형 지훈? 

물론 추측일 뿐입니다. 혹여나 공형이 1106년 1월에 입조한 공아(公牙)일 수도 있습니다.

고려사 숙종 9년 1104년 1월 6일 기사中
신사일. 동여진(東女眞)의 남녀 1,753명이 귀부해 왔다.
○ 동여진의 추장(酋長) 오아속(烏雅束)이 별부(別部)의 부내로(夫乃老)와 사이가 벌어지자 공형지조(公兄之助)를 시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하게 했는데, 기병(騎兵)이 정주(定州 :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 관문 밖까지 와서 진을 쳤다.

고려사 예종 원년 1106년 1월 18일 기사中
신해일. 동번(東蕃)의 공아(公牙) 등 10명이 입조해 오자 국왕이 선정전(宣政殿)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술과 음식 및 전례에 따른 물품을 하사하였다. 애초 임간(林幹)이 정벌에 나서자 동번의 추장 연개(延盖)가 지훈(之訓) 등을 시켜 역습하게 해서 우리 군사를 패전시켰는데 지금 와서 지훈이 공아(公牙)를 보내 입조해 온 것이다. 


여하튼 석적환(공형지조, 지훈 등)이 이끄는 여진 기병이 정주성 밖에 진을 치자, 
이 소식은 곧장 고려의 개경으로 전해집니다.
하니 1104년 1월 8일에 숙종은 임간을 판병마사로 임명해 부월을 주어 현지로 떠나게 합니다.
정말 신속한 조치가 아닐 수 없지요. 
석적환의 여진 기병이 정주성 밖에 진을 친지 이틀도 지나지 않아 
군대를 편성해 정주로 향하게 한 것입니다.
제가 생각키로는 임간의 파병은 여진기병이 정주성 밖에 진을 치기 이전에 
이미 갈라전에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있는 것을 감지한 숙종에 의해 준비되고 
결국 1월 8일에 예정된 일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고려사 숙종 9년 1104년 1월 8일 기사中
계미일. 왕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임간(林幹)을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선정전(宣政殿)에서 그에게 부월(斧鉞)을 준 후 가서 대비케 하였다. 또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위(李瑋)를 서북면행영병마사(西北面行營兵馬使)로, 위위경(衛尉卿) 김덕진(金德珍)을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했다.
무자일. 서여진의 종곤(從昆) 등 30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판병마사는 일반적으로 종2품 이상의 재상이 임명되며,
병마사는 3품이 임명되지요. 행영은 임시로 조직된 부대를 뜻합니다.
하면 과연 개경에서 중앙군이 파병되어 정주로 향하였는가? 
아니면 정주 인근의 진에서 병력을 빼내 정주에 합하였는가?
아니면 임간만이 정주에 파병되어 정주성의 병력만으로 싸운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자 그럼 당시 고려의 최동북방 동계에 편성된 13개 성에 배치된 병력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려 여진정벌전 동북면 13진 포진 + 병력 배치도 http://cafe.naver.com/booheong/89357





당시 고려 동계에 편성된 주진군은 총 32성 약 24000 병력입니다.
이중 최동북면 13성에 배치된 병력은 약 7000 이구요.

한편 이때 석적환의 병력이 사서에 파악되는 부분은 아래와 같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금사 고려전 1104년 기사中
○ [강종(康宗)] 2년 갑신(甲申)(1104)에 고려(高麗)가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크게 쳐부수어 죽이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고려(高麗) 국경까지 추격하여 들어가 진지를 불살라 버리고 돌아왔다. 4월에 고려(高麗)가 다시 쳐들어오자 석적환(石適歡)이 군사 5백명을 거느리고 벽등수(闢登水) 에서 방어하여 또 크게 쳐부수고 추격하여 벽등수(闢登水)로 들어가 그 패잔병들을 국경너머로 쫓아버렸다. 이에 고려왕(高麗王)은 “국경의 분쟁을 충동질한 자는 모두 [갈라전(曷懶甸)의] 관속(官屬) 상단(祥丹)· 방도리(傍都里)· 석필한(昔畢罕) 무리들이었다.” 고 하며, 단련사(團練使) 14명과 6로(路)의 사자(使者)로서 고려(高麗)에 있던 자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동시에 사신을 보내와 강화(講和)하자고 요청하였다. 마침내 사갈(斜葛)로 하여금 국경을 바르게 정하도록 하니, [그는] 을리골수(乙離骨水)와 갈라전 활치수(曷懶甸 活襧水)에 이르러 2개월을 머물렀다.


고려사 예종 원년 1106년 3월 5일 기사中
○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동여진의 지훈(之訓)이 기병 2천 명을 거느리고 관성(關城) 밖에 와서 진을 친 다음 화친을 청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해의 전투는 새 왕께서는 모르시는 일로서, 제가 공아(公牙)를 입조시키자 이 뜻으로 타이르신 후 후한 상까지 주어 돌려보내셨으니 그 큰 은혜를 어찌 잊고 배신하겠습니까?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근실히 조공을 바치기를 원합니다.”

금사에는 500, 고려사에는 2000 으로 되어 있네요.
즉 500 ~ 2000 병력이 석적환이 이끌던 기병으로 생각되네요.
그렇다면 갈라전의 규모는 얼마나 되고, 여기서 모병할 수 있는 병력은 얼마나 될까요?
다음 편에 알아보겠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