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비정은 비정일 뿐입니다. 합당하고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나 동북9성 위치 비정은 말들이 많아 어렵기도 하고요.
허나 고려 말에 수복한 길주 이남에 관한 기록, 고려사와 조선초의 기록은 어느 정도 수용하고
조선초에 새롭게 획득한 길주 이북에 관한 기록은 선별적으로 수용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게 제 의견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길주가 (이동로의) 최전방이라고 현재로서는 생각이 들고요.
현재 동북9성에 대한 4대 학설 중 일제 초기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함흥평야설의 근본 원인이
4군 6진이후의 [동북9성에 관한 기록이 날조되었다]는 전제가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일정 부분은 맞다고 봅니다.
길주 이북에 관한 기록은 납득이 안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어,
명과의 국경 확정 문제 및 선조와 관련된 회령 지역 등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허나 날조라기보다는
고려와 조선이 한 번도 다스리지 못한 지역, (제가 생각하는) 길주 이북을 점령하면서
[이전에 윤관이 점령한 적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분명하지 않게 넘긴 대목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듯싶습니다.
잡설이 길었는데요, 요는 가려 쓸건 가려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의주(宜州) → 현 강원도 덕원
고려사 지리지
○ 의주(宜州).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하였음.】 으로 신라 문무왕(文武王) 21년에 이곳을 취하여 고쳐 정천군(井泉郡)이라 하고 고려(高麗) 초에 용주(湧州)라 칭하였으며 성종(成宗) 14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갈았고 예종(睿宗) 3년에 책성(策城)하였다. 별호(別號)를 동모(東牟)【성종(成宗) 때에 지정한 것이다.】 라 하며 또 호(號)를 의춘(宜春) 또는 의성(宜城)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로 철관(鐵關)이 있고 해도(海島)로 죽도(竹島)가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 의천군(宜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영흥도 좌익 병마(永興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일명 어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용주(湧州)라고 일컬어,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의성(宜城), 또는 동모(東牟)라고 일컫는다. 속현(屬縣)이 1이니, 진명(鎭溟)이다. 혹은 원산현(圓山縣)이라 하고, 또는 수강(水江)이라 이름하는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진명 현령관(鎭溟縣令官)을 두었다가, 뒤에 속현(屬縣)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7리요, 남쪽으로는 안변부(安邊府) 경계까지 25리이며, 서쪽으로는 통부 관내 영풍현(永豐縣) 경계까지 30리이며 북쪽으로는 문천군(文川郡)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천정군(泉井郡)이었는데 일명 오을매(於乙買)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정천군(井泉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는 용주(湧州)라 일컬었으며 성종(成宗) 14년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뒤에 의주(宜州)로 고쳤으며 예종 3년에 성을 쌓았다. 본조 태종 13년에 딴 곳의 예에 의하여 의천(宜川)이라 고쳤고, 세종 1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군(郡)으로 만든 지 27년 만에 목(穆)ㆍ익(翼)ㆍ도(度)ㆍ환(桓) 4대의 어향(御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도호부(都護府)로 만들었다.
2. 함주(咸州) 대도독부(大都督府) → 현 함경남도 함흥
고려사 지리지
○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던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고 3년에 주(州)를 두어 대도독부(大都督府)로 삼고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였으며 큰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948명을 옮겨 살게 하였다가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았겨 합란부(哈蘭府)라 칭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옛 땅을 다시 찾아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으나 이어 만호부(萬戶府)로 고치고 영(營)을 두어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 등의 도(道)의 군마(軍馬)와 방수(防守)를 모았으며 18년에 올려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를 함평(咸平)이라 하였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함관령(咸關嶺)【부(府)의 북쪽에 있다.】 과 대문령(大門嶺)【홍헌(洪獻)에 있다.】 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 함흥부(咸興府)
윤(尹)이 1인이니, 도관찰사(都觀察使)가 겸하고, 소윤(少尹)이 1인이니, 함흥도 중익 병마 단련 부사(咸興道中翼兵馬團練副使)를 겸한다.
고려 예종(睿宗) 3년 무자【송나라 대관(大觀) 2년.】 2월에 진동군 함주 대도독부(鎭東軍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고 큰 성(城)을 쌓아서,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이주시켜 이를 채웠다. 뒤에 그 땅이 모두 원(元)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고 일컬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 영(營)을 설치하고, 강릉(江陵)·경상(慶尙)·전라(全羅) 등의 도(道)에서 군마(軍馬)를 모아다가 방수(防守)하였으며, 18년 기유【명나라 태조(太祖)홍무(洪武) 2년.】에 목(牧)으로 승격시켜, 별호를 함평(咸平)이라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6년 병신에 함흥부로 승격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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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부(咸興府)
동쪽으로는 홍원현(洪原縣) 경계까지 70리, 남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경계까지 2백 80리, 북쪽으로는 삼수군(三水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1백 7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占據)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에 윤관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3년에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일컫고 성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옮겨 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 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져 쌍성에 속해 있었다. 공민왕 5년에 우리 환조(桓祖)에게 명하여 쌍성을 격파하고 옛 강토를 수복하여 지함주사(知咸州事)로 삼았다가, 곧 만호부(萬戶府)로 고쳐 병영을 설치하고 강릉(江陵)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 등 각 도의 군마(軍馬)를 모아다가 변경을 지켰다. 18년에는 목(牧)으로 승격시켰으며, 본조 태종 16년에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부(府)로 승격시켜 관찰사의 본영으로 삼고 토관(土官)을 두었다. 세조 13년에 부내(府內) 사람이 이시애의 사주(使嗾)에 따라 관찰사ㆍ수령 등을 살해하였으므로 성종 원년에 군(郡)으로 강등시키고 토관을 혁파하였다. 영흥부(永興府)로 옮겼던 관찰사의 본영을 금상전하 4년에 복구시켰다.
3. 웅주(雄州) → 현 함경남도 홍원
고려사 지리지
○ 웅주(雄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 구사(舊史)를 상고하면 9성(城)의 땅은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여 거주한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니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것을 우리 강역(疆域)으로 삼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곽(城廓) 990간(間)을 쌓아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간(間)을 쌓아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間)을 쌓아 이름을 복주(福州)라 하였다. 궁한촌(弓漢村)에 670간(間)을 쌓아 이름을 길주(吉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04년 5월19일 기사中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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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현(洪原縣)
동쪽으로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53리이요, 남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4리이며, 서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37리이며 북쪽으로도 함흥부 경계까지 6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9백 75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홍긍(洪肯), 혹은 홍헌(洪獻)이라고 일컬었는데, 고려 말기에 비로소 현(縣)을 두었다. 본조 태조 7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쳐 함흥부(咸興府)에 붙였다가 태종 2년에 다시 쪼개어 현령(縣令)을 두었다. 얼마 안 되어 이를 없애고, 다시 함흥으로 붙였던 것을 세종 15년에 다시 현감(縣監)을 두었다.
4. 영주(英州) → 현 함경남도 북청
고려사 지리지
○ 영주(英州).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이름을 안령군(安嶺郡)이라 하였으나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가 뒤에 길주(吉州)에 병합하였다.
○ 구사(舊史)를 상고하면 9성(城)의 땅은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하여 거주한 곳으로 예종(睿宗) 2년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에게 명하여 군사 17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女眞)을 쳐서 쫓고 군사를 나누어 땅을 경략(經略)하니 동으로는 화곶령(火串嶺)에 이르고 북으로는 궁한령(弓漢嶺)에 이르며 서로는 몽라골령(蒙羅骨嶺)에 이르러 이것을 우리 강역(疆域)으로 삼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곽(城廓) 990간(間)을 쌓아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화곶산(火串山) 아래에 992간(間)을 쌓아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74간(間)을 쌓아 이름을 복주(福州)라 하였다. 궁한촌(弓漢村)에 670간(間)을 쌓아 이름을 길주(吉州)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404년 5월19일 기사中
계품사 김첨이 여진 지역을 조선에서 관할하기를 청하는 주본과 지도를 가지고 명에 가다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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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청 도호부(北靑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함길도 우익 병마(咸吉道右翼兵馬)를 겸한다.
본래의 이름은 삼산(參散)이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어 왔는데,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城)을 설치하였으나, 그 이름은 미상(未詳)이다.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쌍성(雙城)의 옛 지경을 수복하고 안북 천호 방어소(安北千戶防禦所)를 두었다가, 21년 임자에 북청주 만호부(北靑州萬戶府)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청주(靑州)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6년 병신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청주목(淸州牧)과 이름이 같은 까닭이었다.
5. 복주(福州) → 현 함경남도 단천
고려사 지리지
○ 복주(福州). 오래 여진(女眞)이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오림금촌(吳林金村)이라고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았으나 4년에 성(城)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 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독로궤(禿魯)라 칭하였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미쳐 옛 땅을 다시 찾고 신우(辛禑) 8년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삼았다. 요해처(要害處)가 두 곳 있으니 이판령(伊板嶺)【주(州)의 동북(東北)에 있으니 즉 마천령(磨天嶺)이다.】 과 두을외령(豆乙外嶺)【주(州)의 남쪽에 있으니 즉 마운령(磨雲嶺)이다.】 이다.
세종실록 지리지
◎ 단천군(端川郡)
지군사(知郡事)가 1인이니, 길주도 좌익 병마(吉州道左翼兵馬)를 겸한다.
오랫동안 호인(胡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는데, 별호(別號)를 두을외(豆乙外)라 하고, 또는 독로올(禿魯兀)이라고도 한다. 고려 대장(大將) 윤관(尹瓘)이 호인(胡人)을 몰아내고 9성(九城)을 설치하여,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로 삼았다가, 우왕(禑王) 8년 임술【홍무(洪武) 15년.】 단주 안무사(端州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 7년 무인에 지단주군사(知端州郡事)로 고쳤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에 따라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천군(端川郡)
동쪽은 길성현(吉城縣) 경계까지 66리, 남쪽은 이성현(利城縣) 경계까지 37리, 서쪽은 이성현 경계까지 45리, 갑산부(甲山府) 경계까지 1백 86리, 북쪽은 야인지(野人地) 경계까지 1백 7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2백 78리이다.
【건치연혁】 본시 오림금촌(吳林金村)으로 오랫동안 여진(女眞)이 점령하고 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이 여진을 축출하고 성을 쌓고 복주 방어사(福州防禦使)를 두었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함몰되어 독노올(禿魯兀)이라 일컫던 것을 공민왕(恭愍王)이 수복하였고, 신우(辛禑) 때에 단주 안무사(端州安撫使)로 고쳤다. 본조 태조(太祖) 7년에 지단주사(知端州事)로 고쳤고,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6. 길주(吉州) → 현 함경북도 길주
고려사 지리지
○ 길주(吉州). 오래 여진(女眞)의 점령한 까닭에 이름을 궁한촌(弓漢村)이라 하였다. 예종(睿宗) 3년에 주(州)를 두어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6년에 중성(中城)을 쌓았으나 이어 그 땅을 여진(女眞)에게 돌려주었다. 뒤에 원(元) 나라에 빼앗겨 해양(海洋)【해양(海陽)이라고도 하였다 함.】 이라 칭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때에 옛 땅을 되찾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웅․길주 등처 관군민 만호부(雄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두었다.【길주(吉州)는 북쪽에 있고 웅주(雄州)는 남쪽에 있다.】 난도(卵島)가 있다.
고려사 지리지 첨부中
또한 의주(宜州) 땅은 정주(定州) 남쪽에 있어 반드시 여진(女眞)을 쳐서 쫓은 뒤에 설치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 설치한 것이다. 꼭 이에 이르러 성곽을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함께 9성(城)으로는 칭하였으나 철거한 수(數)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종실록 지리지
⊙ 길주목(吉州牧)
사(使)가 1인이니,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가 겸하게 되고, 판관(判官)이 1인이니, 길주도 중익 병마(吉州道中翼兵馬)를 겸한다.
예전에는 삼해양(三海陽)이라 하였는데,【일명 해양(海洋)이라 한다.】 오랫동안 야인(野人)에게 점거(占據)되었었다. 고려 예종(睿宗) 2년 정해에 원수(元帥) 윤관(尹瓘)과 부원수(副元帥) 오연총(吳延寵)이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여진(女眞)을 몰아내고, 장군(將軍)을 나누어 보내어서 지역의 경계를 획정(畫定)하여, 동쪽으로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으로 궁한령(弓漢嶺)까지, 서쪽으로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 나라의 강토(疆土)로 삼고,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성곽(城郭) 9백 52간(間)을 쌓고 이름을 ‘웅주(雄州)’라 하고,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복주(福州)’라고 하고,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9백 52간을 쌓고 이름을 ‘영주(英州)’라 하고, 궁한촌(弓漢村)에 6백 74간을 쌓고 이름을 ‘길주(吉州)’라고 하였는데, 길주가 북쪽에 있고, 웅주가 남쪽에 있다. 3년 무자 2월에 또 공험진(公險鎭)에 성을 쌓고 이택(李澤)으로써 함주 대도독부사(咸州大都督府使)를 삼아서, 비로소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의 4주(州)와 공험진(公險鎭)의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윤관(尹瓘)이 북계(北界)에 여러 성(城)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옮겨서 이를 채웠는데, 함주(咸州)를 ‘진동군(鎭東軍)’이라 하여 1만 3천 호(戶)를 두고, 영주(英州)를 ‘안령군(安嶺軍)’이라 하고, 웅주(雄州)를 ‘영해군(寧海軍)’이라 하여 각각 1만 호(戶)를 두고, 길주(吉州)·복주(福州)·의주(宜州)의 3주(州)에는 각각 7천 호(戶)를 두었고, 공험진(公險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 3진(鎭)에는 각각 5천 호(戶)를 두었다. 4년 기축에 동계(東界)의 숭령진(崇寧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의 3진(鎭)과 영주(英州)·복주(福州)의 두 주성(州城)을 철폐하고, 또 함주(咸州)·웅주(雄州) 2주(州)와 선화진(宣化鎭)의 성(城)을 철폐하였다. 6년 신묘에 중성(中城)을 주(州)에 쌓고, 산성(山城)을 공험진(公險鎭)에 쌓았다.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명나라 홍무(洪武) 23년.】에 웅주(雄州)·길주(吉州) 등처에 관군민 만호부(管軍民萬戶府)를 두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7년 무인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예전에는 주치(州治)가 서지위(西之委)에 있었으나, 지금은 부서평(夫瑞坪) 남쪽으로 옮겼는데, 구치(舊治)와의 거리가 40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길성현(吉城縣)
동쪽은 명천현(明川縣) 경계까지 10리, 북쪽은 명천현의 경계까지 32리, 남쪽은 바다까지 1백 27리, 서쪽은 단천군(端川郡) 경계까지 1백 19리, 서울까지는 1천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데 오랫동안 여진(女眞)에게 점령되었다가, 고려 예종(睿宗) 2년에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을 보내어 군대 17만을 거느리고 여진을 쫓아내고, 지역을 구획하여 정하였는데 동쪽은 화관령(火串嶺)까지, 북쪽은 궁한령(弓漢嶺), 서쪽은 몽라골령(蒙羅骨嶺)까지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고, 궁한촌(弓漢村)에다 6백 70칸을 쌓고 길주(吉州)라고 이름 붙였다. 3년에 방어사(防禦使)을 두었고, 6년에 중성을 쌓았다가 바로 그 땅을 여진에 돌려주었다. 뒤에 와서 이 지역이 원(元) 나라에 편입되어 해양(海洋)이라고 이름 붙였다. 또 삼해양이라고도 한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註)에, “해양(海洋)은 땅 이름인데, 지금은 길주(吉州)에 있다. 해양에서 북쪽으로 50리를 가면 태신(泰神)이요, 태신에서 동쪽으로 60리를 가면 적알발(的遏發)이다. 해양ㆍ태신ㆍ적알발의 3개소에는 모두 맹안(猛安)이 있는데, 속설에 이것을 3해양(三海洋)이라 한다. 공민왕(恭愍王) 때에 수복되었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길주등처관군민만호부(吉州等處管軍民萬戶府)를 설치하고, 영주(英州) 및 선화(宣化) 등의 진(鎭)을 모두 이 주(州)에 예속시켰다. 우리 왕조 태조(太祖) 7년에 길주목(吉州牧)으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13년에 이시애(李施愛)가 이 주(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고, 예종(睿宗) 원년에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어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주(州)의 북쪽인 영평(永平) 등의 지역을 분할하여 따로 명천현(明川縣)을 설치하였다.
【군명】 해양(海洋)ㆍ삼해양(三海洋) 양(陽)으로 쓰기도 한다. 궁한촌(弓漢村)ㆍ길주(吉州)ㆍ웅성(雄城).
참고로 1107년 당시 고려의 동북면 최북방은 정주였습니다. 의주는 정주 아래에 있었지요.
※ 정주(定州) → 현 함경남도 정평
고려사 지리지
○ 정주(定州). 옛 칭호(稱號)는 파지(巴只)【선위(宣威)라고도 하였음.】 로 정종(定宗) 7년에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삼고 관문(關門)을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올렸다. 별호(別號)를 중산(中山)이라 하였다. 비백산(鼻白山)이 있다.【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 정평 도호부(定平都護府)
사(使)가 1인이니, 함길도 좌익 병마 단련사(咸吉道左翼兵馬團練使)를 겸한다.【대개 각 익(翼)의 2품(品)이면 모익 병마 절제사(某翼兵馬節制使)라고 일컫고, 3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사(某翼兵馬團練使)라고 하며, 4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부사(某翼兵馬團練副使)라 하고, 5, 6품(品)이면 모익 병마 단련 판관(某翼兵馬團練判官)이라 한다.】
예전에는 파지(巴只)라고 일컬었다. 고려 정종(靖宗) 7년 신사【송나라 인종(仁宗) 경력(慶曆) 원년.】에 비로소 성(城)·보(堡)를 쌓고 정주 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다가, 공민왕(恭愍王) 5년 병신에 도호부로 고쳤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정평(定平)으로 고쳤으니, 평안도 정주목(定州牧)과 이름이 같음을 피해서였다. 별호(別號)는 중산(中山)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장곡(長谷)이다. 고려 현종(顯宗) 3년 임자【송나라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에 성(城)을 쌓고, 9년 무오【천희(天禧) 2년.】에 장주 방어사(長州防禦使)라 일컫다가, 뒤에 장주현(長州縣)으로 고쳐서 본부(本府)의 임내(任內)를 삼았고, 금상(今上) 4년 임인【명나라 영락(永樂) 20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정평도호부(定平都護府)
동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30리, 남쪽으로는 영흥부(永興府) 경계까지 45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영원군(寧遠郡) 경계까지 1백 25리, 북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21리이다.
【건치연혁】 옛날에는 파지(巴只) 선위(宣威)라고도 불렀다. 라고 일컬었는데, 고려 성종 2년에 천정만호부(千丁萬戶府)를 두었다. 정종 7년에 비로소 성보(城堡)를 쌓고 관문(關門)을 설치하고는 정주방어사(定州防禦使)로 하였는데, 고종 때에 원 나라에 함몰되었다. 공민왕 5년에, 군병을 보내어 이를 수복하고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르다가, 태종 13년에 평안도 정주(定州)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이 6성이 길주 이남으로 추정되는 동북 12성 중에 제가 알고 있는 사서에 위치가 비정된 곳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문제가 되는 길주 이북에 관해서,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
기록이 두리뭉실하고 미흡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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