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 본기1 1세 시조(始祖) 함보(函普) http://cafe.naver.com/booheong/80490
2편 : 본기1 2세 덕제(德帝) 오로(烏魯)
3세 안제(安帝) 발해(跋海)
4세 헌조(獻祖) 유가(綏可)
5세 소조(昭祖) 석로(石魯)
6세 경조(景祖) 오고내(烏古乃) http://cafe.naver.com/booheong/80574
3편 : 본기1 7세 세조(世祖) 핵리발(劾里缽) http://cafe.naver.com/booheong/81056
4편 : 본기1 7세 숙종(肅宗) 파자숙(頗刺淑) http://cafe.naver.com/booheong/81345
6편 : 본기1 8세 강종(康宗) 오아속(烏雅束) http://cafe.naver.com/booheong/81570
7편 : 본기2 8세 태조(太祖) 아골타(阿骨打) 1부 http://cafe.naver.com/booheong/81679
사전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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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癸巳十月,康宗夢逐狼,屢發不能中,太祖前射中之。
계사년(癸巳年/1113년) 10월에, 강종이 이리를 쫓는 꿈을 꾸었는데,
여러발이 명중하지 못하니, 태조가 앞서 쏘아 명중하였다.
旦日,以所夢問僚佐,衆曰:
「吉。兄不能得而弟得之之兆也。」
是月,康宗即世,太祖襲位爲都勃極烈。
이튿날 아침에, 요좌(僚佐/보좌관들)에게 꿈꾼 바를 가지고 물으니, 무리가 말하길
「길(吉)입니다. 형이 능히 얻지 못한 것을 동생이 얻는다는 점괘입니다.」
이달에, 강종이 즉세(即世/세상을 떠남)하니,
태조가 도발극렬(都勃極烈/발극렬은 여진어로 부족장을 뜻함)으로 습위(襲位/위를 이어받음)하였다.
遼使阿息保來,曰
:「何以不告喪?」
太祖曰
:「有喪不能吊,而乃以爲罪乎?」
他日,阿息保復來,徑騎至康宗殯所,閱賵馬,欲取之。太祖怒,將殺之,宗雄諫而止。
요나라 사신 아식보(阿息保)가 와서, 하는 말이
「어찌 상(喪)을 고(告)하지 않았는가?」
태조가 말하길
「상중인데 조문은 하지 않고, 이내 죄있다는 말만 하느냐?」
다른날, 아식보가 다시 왔는데, 곧바로 말을 타고 강종의 빈소(殯所)에 이르러,
봉마(賵馬/부의마賻儀馬)를 보고, 취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노하여, 장차 죽이려 하였는데, 종웅(宗雄)이 간(諫)하여 그치게 하였다.
既而遼命久不至。遼主好畋獵、淫酗,怠于政事,四方奏事,往往不見省。
이윽고 요의 명령이 오랫동안 이르지 않았다.
요나라 임금이 전렵(畋獵/매사냥)을 좋아하고, 음란하고 주정을 부리며, 정사(政事)에는 게으르자,
사방에서 일을 아뢰어도, 때때로 살피어 보지 않았다.
紇石烈阿疏既奔遼,穆宗取其城及其部衆,不能歸。
흘석렬부(紇石烈部)의 아소(阿疏)가 이윽고 요에 달아 났는데,
목종이 그 부족 무리들에게 영향을 미치어 그 성을 취하자 , 돌아 올수 없었다.
遂與族弟銀朮可、辭里罕陰結南江居人渾都僕速,欲與俱亡入高麗。
드디어 (아소의) 족제(族弟/친척 동생) 은출가(銀朮可)와 사리한(辭里罕)이 남강(南江)에 거주하는 사람
혼도부(渾都部) 복속(僕速)과 음결(陰結/남몰래 결탁)하여, 고려로 들어가 모두 도망 가고자 하였다.
事覺,太祖使夾古撒喝捕之,而銀朮可、辭里罕先爲遼戍所獲,渾都僕速已亡去,撒喝取其妻子而還。
일이 발각되자, 태조가 협고살갈(夾古撒喝)을 보내 잡게 하였는데,
이에 은출가와 사리한이 먼저 요의 수소(戍所/군대가 주둔하던 요충지)에서 포획 되자,
혼도복속이 벌써 도망가, 살갈이 그 처자를 취하여 이에 귀환했다.
*협고(夾古)는 금대의 성씨로, 요대에는 가고(加古)씨 였다고 추정됨.
금사 고려전에 의하면 1115년 9월에 아골타가 가고살갈(加古撒喝)에게 고려와의 접경지역에 있던 요의 보주성을 공격하게함.
금사에는 가고(加古)와 협고(夾古)가 혼용 되었는데, 가고부(加古部) 사람들이 부족명을 따라 성씨로 사용한듯 보임
흥미로운 것은 중국의 백과사전에 의하면
요대(가고加古) → 금대(가고加古/협고夾古) → 원대(협고夾古) → 명대(협온夾溫) → 청대(각라覺羅)
로 되어 있음.
據考證,原遼國的加古氏,到金國時期仍爲夾(加)古氏,元朝亦爲夾古氏。
而到了明朝,則諧音爲夾溫氏,清朝時期又演變爲覺羅氏。
고증(考證)에 근거하면, 원래 요나라때의 가고씨(加古氏)는, 금나라 시기에 협(가)고씨가 되었고,
원나라에서는 또 협고씨가 되었다. 명나라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자, 곧 음이 변하여 협온씨(夾溫氏)가 되었고,
청나라 시기에는 또 각라씨(覺羅氏)로 변하였다.
→ 결론 : 노이합적(奴爾哈赤/누르하치)의 조상은 가고부(加古部) 사람?
二年甲午六月,太祖至江西,遼使使來致襲節度之命。
2년째 되던 갑오년(甲午年/1114년) 6월에, 태조가 강서(江西)에 이르자,
요나라 사자가 습절도(襲節度/절도사직을 잇게함)의 명을 이르기 위해 왔다.
初,遼每歲遣使市名鷹海東青于海上,道出境內,使者貪縱,征索無藝,公私厭苦之。
처음에, 요에서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해상(海上)에서 이름난 매와 해동청(海東青/고려 송골매등)을 거래 하였는데,
길이 (여진) 경내(境內)로 나 있었는바, 사자가 탐종(貪縱/탐내고 방자함)하고,
징삭(征索/찾아서 탈취함)하며 무예(無藝/법도가 없음)하니, 공사(公私/관청과 개인)가 염고(厭苦/싫어하고 고통스러함)하였다.
康宗嘗以不遣阿疏爲言,稍拒其使者。太祖嗣節度,亦遣蒲家奴往索阿疏,故常以此二者爲言,終至于滅遼然後已。
강종이 일찍이 (요나라가) 아소(阿疏)를 보내지 않는다고 말하며, 점차 그 사자를 거부하였다.
태조가 절도사를 이어받자, 역시 포가노(蒲家奴)를 파견하여 아소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항상 이 연고로서 두사람(오아속,아골타)이 (아소 송환을) 말하니, 요를 멸한 연후(然後)에야 끝나게 되었다.
至是,復遣宗室習古乃、完顏銀朮可往索阿疏。習古乃等還,具言遼主驕肆廢弛之狀。
이에 이르러, 다시 종실(宗室) 습고내(習古乃)와 완안은출가(完顏銀朮可)를 보내 아소를 수색하게 하였다.
습고내등이 돌아와서, 자세히 말하길
요 임금(천조황제天祚皇帝)이 교사(驕肆/교만하고 방자함)하여 폐이(廢弛/쇠퇴하고 게으름)의 형상이다 하였다.
于是召官僚耆舊,以伐遼告之,使備沖要,建城堡,修戎器,以聽後命。
이로부터 관료(官僚)와 기구(耆舊/장로)를 소집하여, 요를 정벌할 것이라고 고(告/발표)하고,
충요(沖要/요지要地)를 방비토록 하고, 성보(城堡/성과 요새)를 건설하며, 융기(戎器/병기)를 수리토록 하고,
후명(後命/뒤에 있을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遼統軍司聞之,使節度使捏哥來問狀,曰:
「汝等有異志乎?修戰具,傷守備,將以誰禦?」
요의 통군사(統軍司)가 이를 듣고, 절도사 날가(捏哥)를 보내 상황을 물으며 말하길
「너희들에게 딴마음이 있느냐? 전쟁 도구를 수리하고, 상한곳을 수비하니, 장차 누구를 막고자 함인가?」
太祖答之曰:
「設險自守,又何問哉!」
태조가 답하여 말하길
「설험(設險/요충지에 방비시설을 함)하여 스스로를 지키고자 함이니, 또 어찌 묻는것인가!」
遼復遣阿息保來詰之。
太祖謂之曰:
「我小國也,事大國不敢廢禮。大國德澤不施,而逋逃是主,以此字小,能無望乎?若以阿疏與我,請事朝貢。苟不獲已,豈能束手受制也。」
요가 또다시 아식보를 보내와 따져 물었다.
태조가 이르며 하는 말이
「우리는 소국이고, 감히 대국에 폐례(廢禮/예를 폐함, 무례함)한 일이 없었다.
대국이 덕택(德澤/은덕과 혜택)을 아니 베풀고, 임금이 도망간 사람을 숨겨주며,
이와 같이 자소(字小/약한 사람을 대함)하니, 능히 (무엇을) 바랄수가 있겠는가?
만약 아소를 내게 보내 준다면, 조공으로 섬길것이다.
진실로 획득하지 아니 하고서, 어찌 속수 무책으로 수제(受制/제약을 받음)를 받겠는가.」
阿息保還,遼人始爲備,命統軍蕭撻不野調諸軍于甯江州。
아식보가 귀환하자, 요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방비하기 시작하고,
통군(統軍) 소달부야(蕭撻不野)가 명을 내려 영강주(甯江州)에서 각군을 조달하기 시작했다.
太祖聞之,使僕聒剌復索阿疏,實觀其形勢。僕聒剌還言:
「遼兵多,不知其數。」
태조가 듣고서는, 복괄랄(僕聒剌)을 보내 다시 아소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실제로는 그 형세(形勢)를 보고자 함이였다.
복괄랄이 귀환하여 하는말이
「요나라 병사가 많아, 부지기수(不知其數/매우 많음)입니다.」
太祖曰:
「彼初調兵,豈能遽集如此。」
태조가 말하길
「저쪽이 처음으로 조병(調兵/병력을 점검하고 훈련함) 하였는데,
어찌 이와 같이 급하게 모집 할수 있단 말인가」
復遣胡沙保往,還言:
「惟四院統軍司與甯江州軍及渤海八百人耳。」
다시 호사보(胡沙保)를 파견하니, 돌아와서 말하길
「오직 4원(院/고을)의 통군사(統軍司)가 영강주(甯江州) 군대와 더불어 발해인 800명이 참여할 뿐입니다.」
太祖曰:
「果如吾言。」
태조가 말하길
「과연 내 말과 같다.」
謂諸將佐曰:
「遼人知我將舉兵,集諸路軍備我,我必先發制之,無爲人制。」
衆皆曰:
「善。」
각 장좌(將佐/장군 및 보좌관)에게 이르러 말하길
「요인(遼人)이 우리가 장차 거병(舉兵)할 것을 알고, 제로(諸路/각 지역)의 군대를 소집하여 우리를 방비하니,
우리가 반드시 먼저 떠나 제압해야 한다.」
무리들이 모두 말하길
「좋습니다.」
乃入見宣靖皇后,告以伐遼事。后曰:
「汝嗣父兄立邦家,見可則行。吾老矣,無貽我憂,汝必不至是也。」
이내 선정황후(宣靖皇后)을 입견(入見/임금이나 모후를 뵘)하여, 요를 정벌하는 일에 대하여 고(告)하였다.
모후(母后)가 말하길
「너는 부형(父兄/핵리발과 오아속)이 세운 방가(邦家/국가)를 이어 받았으니, 옳다고 보인다면 곧 행(行)하여라.
나는 늙었구나, 나의 근심을 전하지 않겠으니, 너는 반드시 이에 올 필요는 없다.」
太祖感泣,奉觴爲壽。即奉后率諸將出門,舉觴東向,以遼人荒肆,不歸阿疏,並己用兵之意,禱于皇天后土。
태조가 감읍(太祖)하여, 잔을 올려 장수를 빌었다.
곧 모후를 받들어 제장(諸將)을 거느리고 문을 나서, 동쪽을 향해 술잔을 들며,
요나라 사람이 황사(荒肆/거칠고 방자함)하고, 아소를 돌려 보내지 않아,
몸소 용병으로 물리친다는 뜻을, 황천후토(皇天后土/하늘과 땅의 신령)에게 기원하였다.
酹畢,后命太祖正坐,與僚屬會酒,號令諸部。
제사를 마치고, 모후가 명하여 태조를 정좌(正坐)토록 하니,
요속(僚屬/관리)와 더불어 주연을 베풀고, 각부족을 호령(號令)하였다.
使婆盧火征移懶路迪古乃兵,斡魯古、阿魯撫諭斡忽、急賽兩路系遼籍女直,實不迭往完睹路執遼障鷹官達魯古部副使辭列、甯江州渤海大家奴。
파로화(婆盧火)로 하여금 이라로(移懶路/이뢰로) 적고내(迪古乃)의 병력을 취하도록 하고,
알로고(斡魯古)와 아로(阿魯)는 알홀(斡忽) 및 급새(急賽) 양로(兩路)의 요적(遼籍)에 묶여 있는 여진을
무유(撫諭/어루만지고 타이름)토록 하며,
실부질(實不迭)을 완도로(完睹路)로 보내 요의 장응관(障鷹官) 달로고부(達魯古部) 부사(副使) 사열(辭列)과
영강주(甯江州)의 발해인 대가노(大家奴)를 잡아 오게 하였다.
*이라로(移懶路) : 다산시문집에 의하면 이라(移懶/이뢰)는 야뢰(耶懶), 갈뢰전(曷懶甸)과 같은 말로 6진(鎭)의 땅으로
함흥, 영흥을 뜻함
해동역사 함경도 관남지역편에 의하면 정평(定平/고려 정주定州)을 기점으로,
남쪽으로는 고려 동계 소속이고,
북쪽으로는 갈라전(曷懶甸), 이라로(移懶路), 야라로(耶懶路)로 불림
즉 윤관의 9성 지역
*적고내(迪古乃) : 금사 본기1 세기 초입부분에 시조 함보의 동생인 보활리(保活里)의 후손이라고 기록됨
*장응관(障鷹官) : 매 조공을 담당하던 관리
于是達魯古部實里館來告曰:
「聞舉兵伐遼,我部誰從?」
이에 달로고부(達魯古部)에서 실리관(實里館)이 와 고(告)하여 말하길
「거병하여 요를 정벌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부족은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
太祖曰:
「吾兵雖少,舊國也,與汝鄰境,固當從我。若畏遼人,自往就之。」
태조가 말하길
「나의 병력은 비록 적지만, 구국(舊國/역사가 오래된 나라)이니, 너의 이웃과 더불어, 나를 따름이 진실로 마땅하다.
만약 요인(遼人)이 두렵다면, 스스로 나아갈 바를 정하라.」
九月,太祖進軍甯江州,次寥晦城。婆盧火徵兵後期,杖之,復遣督軍。
諸路兵皆會于來流水,得二千五百人。
9월에, 태조가 영강주로 진군하여, 요회성(寥晦城)에 머물렀다.
파로화가 징병(徵兵)을 후로 기약하자, 곤장을 때리고, 다시 보내어 군을 독촉하게 하였다.
각지의 병력이 모두 내유수(來流水)에 모이었는데, 2500 인에 이르렀다.
致遼之罪,申告于天地曰:
「世事遼國,恪修職貢,定烏春、窩謀罕之亂,破蕭海里之衆,有功不省,而侵侮是加。
罪人阿疏,屢請不遣。今將問罪于遼,天地其鑒佑之。」
요의 죄를 이르러, 천지에 신고(申告/거듭 고함)하여 말하길
「요국의 일에 있어, 직공(職貢/공물,조공)을 정성을 다해 닦았으며, 오춘(烏春)과 와모한(窩謀罕)의 난을 평정하였고,
소해리(蕭海里)의 무리를 격파하였는데, 공이 있음을 아니 살피고, 침모(侵侮/침해하고 업신여김)로서 이에 더해졌다.
죄인 아소(阿疏)를, 여러번 청하였으나 아니 보냈다.
이제 장차 요에 문죄(問罪/죄를 물음)하려 하니, 하늘과 땅이 보살필 것이다.」
遂命諸將傳挺而誓曰:
「汝等同心盡力,有功者,奴婢部曲爲良,庶人官之,先有官者敘進,輕重視功。苟違誓言,身死梃下,家屬無赦。」
드디어 제장(諸將)에게 몽둥이(挺은 梃의 오기로 보임)를 전하여 맹세하길 명하며 말하길
「너희들은 한마음으로 진력(盡力/있는 힘을 다함)하여,
공이 있는 자, 노비(奴婢)와 부곡(部曲/천민층이 살던 고을)은 양민(良民)으로 할것이며,
서인(庶人/서민,양민)에게는 벼슬을 줄 것이고, 이미 관직에 있는자는 서진(敘進/차례를 더함, 진급)할 것이니,
공(功)의 경중(輕重/가볍고 무거움)을 볼것이다.
진실로 서언(誓言/맹세)를 어긴다면, 몸은 몽둥이(梃)로 죽을것이고, 가속(家屬)은 용서치 않겠다.」
師次唐括帶斡甲之地,諸軍禳射,介而立,有光如烈火,起于人足及戈矛之上,人以爲兵祥。
군을 이끌고 당괄부(唐括部) 대알갑(帶斡甲)의 땅에 머물렀는데,
각군이 양사(禳射/활을 쏘아 액운을 물리침)하며, 갑옷을 입고 서있자,
열화(烈火/맹렬하게 타오르는 불)와 같은 빛이 있어, 사람의 발(足)과 과모(戈矛/창)의 위에서 일어나니,
사람들이 병상(兵祥/군사가 상서롭다)이라 하였다.
明日,次紮只水,光見如初。將至遼界,先使宗幹督士卒夷塹。既度遇渤海軍攻我左翼七謀克,衆少卻,敵兵直犯中軍。
다음날, 찰지수(紮只水)에 머물러, 처음과 같은 광채가 보였다.
장차 요의 경계에 이르자, 먼저 종간(宗幹)을 보내 사졸(士卒)로 구덩이를 평탄하게 하는 감독을 맡게 하였다.
이윽고 통과하여 발해군(渤海軍)과 만났는데 (발해군이) 아군의 좌익(左翼) 7모극(謀克)을 공격하니,
(좌익) 무리가 조금 물러났고, 적병이 곧 중군(中軍)을 범(犯)하였다.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 : 아골타가 1114년에 10월에 제정한 군 및 부족 편제 단위
1모극(謀克)=300戶=100兵
1맹안부(猛安部)=10모극=3000戶=1000兵
금사 병지에 따르면 맹안, 모극은 본시부터 있던 용어로
아골타에 의해 처음으로 그 수가 명확히 정해졌음.
斜也出戰,哲垤先驅。
太祖曰:
「戰不可易也。」遣宗幹止之。宗幹馳出斜也前,控止哲垤馬,斜也遂與俱還。
사야(斜也)가 출전(出戰)하여, 철질(哲垤)이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태조가 말하길
「전쟁을 쉽게 생각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하니
종간을 보내 멈추게 하였다.
종간이 사야의 앞에 질주하여 나타나, 철질의 말을 급하게 멈추게 하여, 사야와 함께 모두 귀환했다.
敵人從之,耶律謝十墜馬,遼人前救。太祖射救者斃。並射謝十中之。有騎突前,又射之,徹紮洞胸。
적들이 쫓아 왔는데, 야율사십(耶律謝十)이 말에서 떨어지자, 요나라 사람이 앞장서 구원하였다.
태조가 구할려는 자를 쏴서 죽였다. 겸하여 쏘아 야율사십이 명중하였다.
말을 몰아 앞서 돌진하여, 또다시 쏘자, (화살이) 가슴골을 관통하여 머물렀다.
謝十拔箭走,追射之,中其背,飲矢之半,僨而死,獲所乘馬。宗幹與數騎陷遼軍中,太祖救之,免胄戰。
사십이 화살을 뽑아 달아나자, 추격하여 쏘니, 그 등에 명중하여, 화살이 반이나 머금어, 쓰러져 죽자, 탄 말을 획득했다.
종간이 수기(數騎/몇몇 기병)와 함께 요의 군중(軍中)에 빠지자, 태조가 구원하였는데, 투구를 벗고 싸웠다.
或自傍射之,矢拂于顙。太祖顧見射者,一矢而斃。
謂將士曰:
「盡敵而止。」衆從之,勇氣自倍。
어떤이가 방사(傍射/말을 질주하며 옆으로 화살을 쏨)하였는데, 화살이 이마에 스치었다.
태조가 쏜자를 옆으로 돌아보고, 화살 하나로 죽였다.
장사(將士/장졸)에게 이르러 말하길
「힘을 다해 적을 멈추게 하라。」
무리가 따르니, 용기(勇氣)가 배(倍)가 되었다.
敵大奔,相蹂踐死者十七八。撒改在別路,不及會戰,使人以戰勝告之,而以謝十馬賜之。
적이 크게 패주하여, 서로 짓밟혀 죽은 자만 열에 7, 8명이나 되었다.
살개(撒改)는 다른 길에 있어, 회전(會戰)에 따르지 못하였는데,
(아골타가) 사람을 보내 전승(戰勝)한 것을 고하며, 이에 사십의 말을 하사 하였다.
撒改使其子宗翰、完顏希尹來賀,且稱帝,因勸進。
太祖曰:
「一戰而勝,遂稱大號,何示人淺也。」
살개가 아들 종한(宗翰)과 완안희윤(完顏希尹)으로 하여금 와서 축하하게 하며,
또한 칭제(稱帝)하고, 이로인해 (제위에) 오르길 권(勸)하였다.
태조가 말하길
「한번 싸움에 이겼다 하여, 드디어 대호(大號/큰 이름, 황제)를 칭한다면, 어찌 사람들이 천(淺)하다 보지 않겠는가.」
進軍甯江州,諸軍填塹攻城。甯江人自東門出,溫蒂痕、阿徒罕邀擊,盡殪之。
영강주로 진군하여, 각군에 해자를 메우게 하고 성을 공격하였다.
영강인이 동문으로 부터 나오자, 온체흔(溫蒂痕)과 아도한(阿徒罕)이 요격(邀擊)하여, 진에(盡殪/전멸) 시켰다.
十月朔,克其城,獲防禦使大藥師奴,陰縱之,使招諭遼人。鐵驪部來送款。次來流城,以俘獲賜將士。
10월 초하루에, 그 성을 함락하니, 방어사(防禦使) 대약사노(大藥師奴)를 사로 잡았는데,
몰래 놓아주어, 요인(遼人)을 초유(招諭./불러서 타이름)하게 하였다.
내유성(來流城)에 머물며, 부획(俘獲/포로)을 장사(將士/장졸)에게 하사하였다.
召渤海梁福、斡答剌使之偽亡去,招諭其鄉人曰:
「女直、渤海本同一家,我興師伐罪,不濫及無辜也。」
발해인(渤海人) 양복(梁福)과 알달랄(斡答剌)을 불러 거짓으로 도망가게 하여,
그 마을 사람을 초유(招諭)하여 말하길
「여진과 발해는 본시 동일(同一)한 집안이니,
내가 군사와 함께 죄를 벌(伐)하면, 외람되지 말고 더불어 허물이 없어야 할것이다.」
使完顏婁室招諭系遼籍女直。師還,謁宣靖皇后,以所獲頒宗室耆老,以實里館貲產給將士。
완안누실(完顏婁室)로 하여금 계요적여진(系遼籍女直/거란 국적에 얶매여 있는 여진)을 초유하게 하였다.
군대가 돌아와, 선정황후를 알현하고, 이에 종실(宗室)과 기로(耆老/장로)에게 획득한 바를 나누었으며,
실리관(實里館)으로는 장졸들에게 자산(貲產)을 주게 하였다.
初命諸路以三百戶爲謀克,十謀克爲猛安。酬斡等撫定讒謀水女直。鱉古酋長胡蘇魯以城降。
처음으로 300호(戶)를 모극(謀克)으로 삼고, 10모극을 맹안(猛安)으로 삼음을 각 지역에 명하였다.
수알(酬斡)등이 참모수(讒謀水)의 여진을 무정(撫定/어루만지고 평정함)하였다.
별고(鱉古)의 추장(酋長) 호소로(胡蘇魯)가 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十一月,遼都統蕭糺里、副都統撻不野將步騎十萬會于鴨子河北。
11월에, 요의 도통(都統) 소규리(蕭糺里)와 부도통(副都統) 달부야(撻不野)가 장차 보기(步騎) 10만을
압자하(鴨子河)의 북쪽에 모이게 하였다.
太祖自將擊之。未至鴨子河,既夜,太祖方就枕,若有扶其首者三,寤而起,曰:
「神明警我也!」
태조가 자장격지(自將擊之/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하였다.
압자하에 이르지 못하여, 이윽고 밤에, 태조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그 머리를 어떤자가 세번이나 떠받치고 있는 거와 같아, 잠에서 깨어 일어나, 말하기를
「신명(神明/하늘과 땅의 신)이 나를 깨우치는 구나!」
即鳴鼓舉燧而行。黎明及河,遼兵方壞淩道,選壯士十輩擊走之。大軍繼進,遂登岸。甲士三千七百,至者才三之一。
즉시 명고(鳴鼓/북을 쳐 울림)하고 횃불을 들고 나갔다.
여명(黎明)에 하천에 도달하니, 요병이 능도(淩道/통행하는 길)을 무너뜨리고 있었는데,
가려 뽑은 장사(壯士) 십여 무리로 격주(擊走/달려나가 공격함)하였다.
대군(大軍)이 계진(繼進/이어 나아감)하자, 드디어 등안(登岸/기슭에 다다름, 상륙함)하였다.
갑사(甲士/갑옷을 입은 병사)가 3700 이니, 도달한 자가 겨우 셋중에 하나였다.
俄與敵遇于出河店,會大風起,塵埃蔽天,乘風勢擊之,遼兵潰。
잠시후 출하점(出河店)에서 적을 만났는데, 큰 바람이 일어나 진애(塵埃/먼지)가 하늘을 뒤덮으니,
바람의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요병이 무너졌다.
逐至斡論濼,殺獲首虜及車馬甲兵珍玩不可勝計,遍賜官屬將士,燕犒彌日。
안론락(斡論濼)에 이르기까지 쫓아가, 살획(殺獲/죽이고 사로잡음)한 수로(首虜/참수한 머리와 포로)와 더불어
차마(車馬/수레와 말), 갑병(甲兵/갑옷과 병기), 진완(珍玩/진귀한 물건)이 넘쳐 셀수가 없었는데,
두루 관속(官屬/관리)과 장사(將士/장졸)들에게 하사하고,
연호(燕犒/잔치를 열고 군사들에게 음식을 줌, 연회宴會)를 온종일 하였다.
遼人嘗言女直兵若滿萬則不可敵,至是始滿萬雲。
요나라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진의 병사가 만약 만을 넘으면 곧 대적할 수 없다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야 비로소 일만이 넘어 운(雲/구름과 같이 성盛함)하였다.
斡魯古敗遼兵,斬其節度使撻不野。僕虺等攻賓州,拔之。
兀惹雛鶻室來降。遼將赤狗兒戰于賓州,僕虺、渾黜敗之。鐵驪王回離保以所部降。
알로고(斡魯古)가 요병을 패주시키고, 그 절도사(節度使) 달부야(撻不野)를 참(斬)하였다.
복훼(僕虺)등이 빈주(賓州)를 공격하여, 쳐서 빼앗았다.
올야부(兀惹部) 추골실(雛鶻室)이 항복하여 왔다.
요의 장수 적구아(赤狗兒)와 빈주(賓州)에서 싸웠는데, 복훼와 혼출(渾黜)이 패배시켰다.
철려왕(鐵驪王) 회리보(回離保)가 부족을 들어 항복하였다.
吾睹補、蒲察復敗赤狗兒、蕭乙薛軍于祥州東。斡忽、急塞兩路降。
斡魯古敗遼軍于鹹州西,斬統軍實婁于陣。完顏婁室克鹹州。
오도보(吾睹補)와 포찰(蒲察)이 상주(祥州) 동쪽에서 적구아(赤狗兒)와 소을설(蕭乙薛)군을 다시 패주시켰다.
알홀(斡忽)과 급새(急塞)의 양 지역이 항복하였다.
알로고가 함주(鹹州) 서쪽에서 요군을 패주시키고, 진(陣)에서 통군(統軍) 실루(實婁)를 참(斬)하였다.
완안누실(完顏婁室)이 함주를 함락하였다.
是月,吳乞買、撒改、辭不失率宮屬諸將勸進,願以新歲元日恭上尊號,太祖不許。
阿離合懣、蒲家奴、宗翰等進曰:
「今大功已建,若不稱號,無以系天下心。」
太祖曰:「吾將思之。」
이달에, 오걸매(吳乞買), 살개(撒改), 사부실(辭不失)이 궁속(宮屬/궁에 딸린 관리)과 제장(諸將)을 인솔하여
(제위에) 오르길 권(勸)하며, 새해 설날에 존호(尊號/존귀한 호칭. 황제)를 받들어 올리기를 원(願)하니,
태조가 불허(不許) 하였다.
아리합만(阿離合懣)과 포가노(蒲家奴) 및 종한(宗翰)등이 나아가 말하기를
「지금 큰공을 이미 세웠는데, 만약 칭호(稱號)를 하지 않는다면, 천하의 마음을 이어맬수 없을것입니다.」
태조가 말하길
「내가 장차 생각해 보겠다.」
收國元年正月壬申朔,群臣奉上尊號。是日,即皇帝位。
수국(收國/금 태조의 연호) 원년(1115년) 1월 임신일(壬申日) 초하루에,
군신(群臣)이 존호(尊號)를 봉상(奉上/받들어 올림)하였다.
이날, 황제(皇帝)의 위(位)에 나아갔다.
上曰:
「遼以賓鐵爲號,取其堅也。賓鐵雖堅,終亦變壞,惟金不變不壞。金之色白,完顏部色尚白。」
상(上/임금)이 이르기를
「요나라는 빈철(賓鐵/강철)로 호(號)로 삼아, 그 견고함을 취하였다.
빈철이 비록 견고하지만, 결국에는 또한 변괴(變壞/변하여 무너짐, 녹이 슬고 부러짐)하니,
오직 금(金)만이 변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다.
금(金)은 색은 백(白)이니, 완안부(完顏部)의 색 또한 백(白)이다.」
于是國號大金,改元收國。
이로부터 국호(國號)를 대금(大金)이라 하며, 수국(收國)이라 개원(改元/연호를 고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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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타 1,2부 요약
-아골타는 어릴적부터 힘이 좋고 활을 잘 쐈음
-성격은 저돌적이며 약간은 무모함
-정치에 있어서는 너그러움과 융통성이 있음
-형 오아속에 이어 절도사가 됨
-거란 관리가 오아속의 상중에도 거만하게 굴자 분노함
-거란과의 전쟁 명분
1. 흘석렬부 추장 아소를 거란이 송환치 않음
2. 매조공로를 거란 관리가 이용시 폐악이 심함
(송막기문에 의하면, 여진 풍습에 상급자가 오면 집안의 여인으로
잠자리를 돌보게 하는데, 거란관리가 여인의 신분을 고려치 않고
마구잡이로 요구하여 분노가 쌓임)
-거란 황제 천조제는 매사냥 및 음주에만 신경쓰고 정치에는 관심이 없음
-1114년 7~8월에 전쟁준비를 하자 요에서 알아채고 방비시작함
아골타 선제공격 계획세움
-1114년 9월말 거란 영강주로 2500명 진군.
찰지수 전투에서 요+해+발해군 조우(총 7천명) 승리
(요사에는 거란족+해족 3천명, 중앙금군 2천명, 각지의 용맹한 선발군 2천명
인데, 別選諸路武勇는 발해인을 뜻한다고 추정, 7월에 발해인 최소 800명이
선발되었음)
※찰지수 전투개황
-아골타가 각부족의 병력을 끌어모아 2500 명으로 거란 영강주 진입
-요의 천조제는 이당시 경주(慶州)에서 사슴 사냥중 이였는데, 여진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도 개의치 않음
-요에서는 수사공(守司空) 소사(蕭嗣)를 대장으로, 정강군(靜江軍) 절도사 소달(蕭撻)을 부장으로 삼아 7000 명으로 막게함
-이때 발해군을 이끈 이는 발해자사(海州刺史) 고선수(高仙壽)
-찰지수를 넘어 거란의 선봉 발해군과 격전
-초기에는 좌익(700명)이 발해군에 밀려, 중군까지 발해군이 쳐들어 옴
-발해군을 따라 난입한 요의 장수 야율사십을 아골타가 죽임
-아골타가 직접 전장으로 뛰어들어 분전
-요 대패
-1114년 10월 1일 영강주성 함락
거란 방어사 대약사노 풀어주고 거란인 회유 권함
발해인 양복,알달랄 풀어주고 발해인 회유 권함(여진과 발해는 한집안 운운)
거란 국적에 속한 숙여진 회유
-1114년 10월 완안부로 귀환. 맹안모극제 확립(모극100명, 맹안1000명)
-여진내 몇몇 부족이 귀부
-1114년 11월 요에서 소규리를 대장으로, 달부야를 부장으로 보,기병 10만을 압자하에 집결시킴
-아골타 1만 여진병을 모아 반격에 나섬
-급하게 3700명으로 야습에 나섬(나머지 6~7천명도 추가 참전 하였을 듯)
-새벽녘에 출하점에서 큰바람이 불어 시야가 어두워지자, 요군을 기습함
-대승 (총 1만명으로 10만 거란군 격파)
※ 원나라때 편찬된 금사 제25권 병지 초입에 이 당시의 금군을 이렇게 평가하였음
金興, 用兵如神, 戰勝功取, 無敵當世, 曾未十年遂定大業.
금이 흥할때, 용병(用兵)이 신(神)과 같아, 싸움에서 이겨 공을 취하였으니,
당시에 무적(無敵)하여, 일찍이 10년도 채 되지 않아 드디어 대업(大業)을 평정하였다.
-거란 상주에서 적구아, 소을설 요군 대파
-거란 함주 함락. 통군 실루 참수
-숙여진(알홀과 급새) 지역이 드디어 귀부
-오걸매(동생)/살개(사촌형제)/사부실/아리합만/포가노/종한등이 황제 권함
-1115년 1월1일 금건국, 황제 선포
-8세 아골타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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