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틈틈히 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문종조 유일한 역모사건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외세의 큰 침입이 없었고, 주변 강국들과 선린우호를 정립하며 사관이 <태평성대>라 규정한 고려 문종조에도
딱 1번의 역모사건이 있었습니다.
본시 현종이 즉위하고, 이어서 현종의 세아들이 연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고려국통은 형제에게로 잇는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습니다. 훗날에 이런 형제상속 전통은 큰 화를 부르게 되지요.(숙종즉위의 예)
현종은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 소생인 왕흠(王欽/덕종), 왕형(王亨/정종)
원혜왕후(元惠王后) 김씨 소생인 왕휘(王徽)[초명 왕서王緖/문종], 왕기(王基)
궁인(宮人) 한씨 소생인 왕충(王忠) 다섯아들을 두었습니다.
현종은 총9명의 왕후를 두었고, 외에도 6명의 부인을 더 두었습니다.
이중 원성태후와 원혜왕후는 자매로, 소생들인 덕종,정종과 문종,왕기는 모친이 다르긴 하나
혈통이 매우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남다른 우애를 가진것으로 짐작되는 4형제는 큰형 덕종이 재위 3년째인 19세때 죽음에 직면하여
동생 왕형에게 왕위를 이어주게 됩니다.
뒤를 이은 정종은 재위 12년째인 28세에 죽음에 직면하니, 역시 이복동생 왕휘에게 왕위를 이어주게 됩니다.
이때 정종에게는 왕방(王昉), 왕경(王璥), 왕개(王暟) 세아들이 있었습니다만,
통상적으로 이당시 왕자의 경우 4~5세에 군(君)으로 봉해지고, 10~11세 무렵에 후(侯)로 봉해졌는데
첫째 아들 왕방(王昉)이 애상군(哀殤君)에 봉해져있고, 왕경과 왕개가 문종6년(1052년)에 각각 낙랑후(樂浪侯)와 개성후(開城侯)에 봉해진것을 보면 왕경과 왕개는 1041~1042년 출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정종이 흉한 1046년 당시에는 왕방은 10세이하, 왕경과 왕경은 5~6세 였던것으로 추정됩니다.
첫째 아들 왕방은 후로 책봉받은 기록이 없는것과 고려사 종실열전에 사(史)에 빠졌다라는 기록을 살펴보면
일찍 요절했던것 같습니다.
여하튼 정종은 어린아들들에게 왕위를 전해주는 대신, 이복동생 문종에게 왕위를 이어줬는데요,
정종과 문종의 우애는 정종의 유언을 통해 알아볼수가 있습니다.
정종은 특이하게 문종에게, 총애하던 궁녀 노씨(盧氏)에게 궁을 하나 내려달라는 유언을 남기게 됩니다.
이에 문종은 노씨에게 연창궁(延昌宮)을 내려 주었는데요, 당연히 대소신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정식비도 아닌 한낱 궁녀에게 궁을 내어줄수도 없고, 선왕이 정신이 오락가락할때 내린 명이니 따라서는 안된다고 간언하나
문종은 강하게 밀어부쳐 형님이 사랑하던 여인에게 궁을 내려주게 됩니다.
문종은 즉위후 형님의 아들들에 대한 예후도 지극히 하여, 왕경에게는 낙랑후(樂浪侯) 식읍 3천호로 봉작하고
관직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 태보(守太保) 겸(兼) 상서령(尙書令) 상주국(上柱國)을 제수하였으며,
왕개에게는 개성후(開城侯) 식읍 2천호로 봉작하고, 관직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 태위(守太尉) 겸(兼) 상서령(尙書令) 상주국(上柱國)을 제수합니다.
물론 10~11세에 받은것이니 관직은 명예직인셈 이였지요.
문제는 문종의 친동생 왕기(王基)로부터 시작됩니다.
왕기는 현종21년(1021년) 태어났는데, 1031년 10세 되던해에 개성국공(開城國公)에 봉해졌고,
정종 초에 수태보(守太保)에 제수되었습니다.
친형 문종이 즉위하자, 평양공(平壤公)으로 개봉(改封/바꾸어 봉해짐) 됩니다.
문종은 즉위원년에 왕기가 병에 걸리자, 의원을 보내 병을 치료하게 하고, 생일에는 예폐를 선물하는등 형제의 정을 나눕니다.
관직도 계속 올려줘, 문종15년에는 중서령(中書令 정1품 현 총리급)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무난히 잘 지내던 왕기는 문종23년(1069년)에 죽게 됩니다.
문종은 특이하게 왕기에게 정간왕(靖簡王)을 추봉(追封)하게 됩니다.
고려의 전통엔 사후에 왕으로 봉해진 인물은 후손이 왕이 되었을때, 조상을 왕으로 봉하곤 하였으나
왕의 동생을 왕으로 추봉한 경우는 상당히 독특한 경우라고 볼수 있지요.
물론 광종의 동생 왕정(王貞)도 별다른 이유없이(황제?왕?의 동생이라서? 경종의 장인이라서?)
문원대왕(文元大王)에 추봉되긴 하였지만요,
여하튼 문종의 아우 사랑은 지극했던 것이였습니다.
이렇듯 역모의 기미라고는 찾아볼수 없을듯 싶었던 이일은 3년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키게 됩니다.
문종 26년(1072년) 가을 7월에 한병사가 역모를 고변하면서 사건의 실태가 밝혀지게 됩니다.
고려사절요 문종26년(1072년) 7월 기사中
○ 가을 7월에 병사 장선(張善)이 고변하기를, “교위(校尉) 거신(巨身)이 그 도당 천여 명과 더불어 왕을 폐위시키고 왕제(王弟) 평양공(平壤公) 기(基)를 세우려 꾀하고 있습니다." 하니, 명하여 잡아다가 거신은 처형하고 그 가족도 모두 죽이며, 기는 이미 죽었으므로 기의 아들 진(璡)은 남해현(南海縣 경남 사천군(泗川郡))에, 정(珵)은 안동부(安東府 경북 경주(慶州))에 귀양보냈다가 얼마 뒤에 모두 죽였고, 막내 아들 영(瑛)은 어리므로 죽음을 면하였다. 장선을 발탁하여 장군으로 삼고, 선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각각 벼슬 1급을 내려주었다. 윤달에 평장사 왕무숭을 안동부에,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는 곡주(谷州 황해 곡산(谷山))에 내쳤는데, 역시 거신의 역모에 관련된 때문이었다.
좀 뜸금없지요. 3년전에 죽은 왕기를 왕으로 세울려고 한다니...
아마 왕기가 살아 생전에 획책한 역모가, 왕기가 갑작스레 죽음으로서 중단 되었고,
3년만에 내부고발로 진상이 밝혀진듯 싶습니다.
보통 공작으로 봉작되게 되면, 부(府)를 개설하고 부의 정식관리를 배정받게 됩니다.
부의 소속된 관리들은 어떤 때는 공작과 주종관계를 맺게 되는데요,
훗날의 숙종이 계림공일때 계림부 무뢰배?였던 척준경이나,
명종이 익양공일때 익양부 전첨이였던 최여해 같은 인물이 있지요.
문제는 도당이 천여명이란 것입니다. 보통 고려 중앙군에서 교위(현 중위급)가 거느리는 휘하병력은 2대 약 50여명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역모에 연루된 고위관리가 정2품 평장사 왕무숭(王懋崇)이였고,
여기에 왕족으로는 당시 태위(太尉)였던 왕기의 첫째 아들 왕진(王璡), 셋째 아들 왕정(王珵)
그리고 장녕궁주(長寧宮主) 이씨와 수안택주(遂安宅主) 이씨가 연루되어 있습니다.
왕무숭은 1063년부터는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동북면 군 총사령관)를 지낸 인물로,
왕기가 죽기 1년전에는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현 법무부장관)에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즉 역모는 왕무숭이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적에 계획된 듯 싶습니다.
즉 1천여명으로 구성된 평양공 왕기의 무리들은, 왕위를 넘보려다 왕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계획이 틀어졌고,
3년이 흐른후 하부조직의 교위 거신 휘하 병사가 고변하여, 드디어 진상이 밝혀진 것이지요.
문종조가 평화로운 시대였음을 감안하면, 이 역모사건은 참 생뚱맞긴 한데
문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라는 전통이 슬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문종~숙종조까지 기록을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이 왕제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기 무리도 아마 이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생겨난 것은 아닌가 짐작이 되어 지네요.
이후 문종은 태자에게 왕위를 이어줬지만, 순종은 문종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 3개월만에 죽고,
역시 순종의 동생인 선종이 형제상속으로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선종은 10세의 아들 헌종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결국 정변이 벌어져 왕위를 숙부 숙종에게 빼았기게? 됩니다.
헌종의 즉위당시 기록을 보면, 형제상속이 당연시 되었는데 나이어린 헌종이 즉위한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말 이제현도 이일을 두고 후세에 나이어린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줄때는,
반드시 훌륭한 신하나 왕족에게 보필하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에는 훌륭한 신하(김종서?)나 왕족(세조?)에게 보필하게 하였어도
일이 틀어지는 것을 보면, 나이어린 왕에게 왕통을 이어주기란 참으로 힘든 일 인듯 싶습니다.
각설하고, 이후 왕기의 가문은 풍지박살이 날것 같았으나
다행히 넷째 아들 왕영(王瑛)이 어린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여 가문은 다시 살아 나게 됩니다.
*왕기는 네아들을 두었는데, 1왕진은 남해(南海)에 유배갔다가 곧 사형되었고, 2왕거는 사공(司空)직에 있다가 어릴적 요절하였고, 3왕정은 경주에 유배갔다가 역시 곧 사형되었고, 4왕영만이 살아남았습니다.
훗날 문종은 친조카 왕영만은 죽일수 없었는지,
형 정종의 딸 보령궁주(寶寧宮主)와 혼인시키고 낙랑백(樂浪伯)으로 봉작하여 지위를 회복시켜 줍니다.
왕영은 이후 헌종조에 낙랑후에 봉작되고, 숙종조에는 식읍 2천호를 받는등 호위호식하다가
예종7년에 70세의 나이로 자연사하게 됩니다.
왕영의 자손들을 왕족으로 대우 받으며 계속 번창하였으며, 훗날 몽고침략기에 그 유명한 홍복원(洪福源)을 죽게 만든 장본인인 영령공(永寧公) 왕준(王綧)도 후손입니다.
참, 마지막으로 역모를 고변한 병사 장선은 장군이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등병에서 원스타가 된셈이죠.
P.S) 현종의 막내아들 다섯째 왕충(王忠)의 어머니는 양주인 평장사(平章事) 한인경(韓藺卿)의 딸로, 이름이 한훤영(韓萱英)
으로, 고려사 후비열전에 특이하게 성과 이름이 적혀있습니다. 왕충은 이복형 문종 밑에서 순탄하게 살았으며
명예직인 검교태사(檢校太師)를 역임하다가 졸하였습니다.
연창궁주에 임명된 궁녀 노씨는 고려사 후비열전에 너무 아름다워 정종이 오직 노씨하고만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드디어 방연(房宴)을 오로지 하였다." 방연 : 잠자리
*3사(정1품) : 태사(太師), 태부(太傅), 태보(太保)
*3공(정1품) : 태위(太尉), 사도(司徒), 사공(司空)
☞ 3공과 3사는 공,후,백,자,남작에 봉작되지 못한 왕족들에게 주던 명예직
보통 위차는 태사>태부>태보>태위>사도>사공 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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