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저우, 1830년대 후반, 조지 치너리(George Chinnery, 1774 ~ 1852)
임칙서가 가슴 속에 사명을 새기고, 광저우로 내려오기 8년여 전.
한 서양인 목사는 1832년 10월 이후부터, 줄곧 이 광저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드윈 스티븐스(Edwin Stevens) 였고, 예일 대학에서 종교적인 경험을 했으며, 뉴헤이븐 신학교에서 공부하여 목사의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국선원동우회(the American Seaman's Friend Society) 소속의 목사로서 광저우에 부임했습니다. 그는 13행가의 미국 상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학습, 예배, 책자 배포의 시간을 엄격하게 지켰고, 토요일이면 외국인 소유의 작은 배를 타고 주로 원양선박이 정박해 있는 포구까지 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외국선박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19km를 항해하는데 필요한 스페인 은화 4달러를 내고 중국인 사공을 고용 했습니다. 약 3시간에 지나지 않는 이 여정 조차도, 불안정한 치안으로 인해 해적이나 도적등이 도사리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물론 종교인으로서 그런 수고와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 설교, 그리고 선교 활동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스티븐스가 설교할 대상은 바로 선원들이었는데, 리버풀이나 필라델피아에서 온 선원들은 오랜 시간의 항해로 인해 심신이 지쳤다가, 육지에서 사흘간 머무를 동안 미친듯이 날뛰며 쾌락을 즐겼던 탓입니다. 중국인들은 그렇게 날뛰는 '홍모귀' 들에게 '화주(火酒)' 라고 불리우는 술을 주었는데, 이 술은 온갖 코담배즙, 설탕, 비소 등이 섞여들어가, 지독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다른 어떤 독주보다도 더 지독한 만취상태로 이끈다."
라고 스티븐스는 화주에 대한 인상을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화주를 처음 마신 선원들은 극도의 광란 상태가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중국인 깡패에게 속옷까지 털리는 일도 일상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한 한 그리스도교 박애주의자가 좀 더 '점잖은' 유흥을 위해 퉁원가 19호루(號樓) 지역에 보다 안전한 찻집과 커피숍을 만들었지만, 대부분 선원들은 - 중국 정부가 외국인에게 술을 파는 일을 금지하고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 보다 지저분하고 난장판인 신더우란의 술집에서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화주의 취기보다 스티븐스를 방해하는 일이 있다면, "아마 광저우에 8천여명은 있을 것이다." 라며 서양인들이 수근거린, 매춘부들이었습니다. 광저우 성안에 있는 중국인 매춘부들을 서양인들이 만날 일은 없었지만, 근방의 외딴 섬에서는 서양인에게 고용받고 일을 하는 중국인들과, 또 '다른 방법' 으로 일을 하는 여자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혹은 선원이나 성직자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다보면, 조수에 따라 위아래로 흔들리는 배의 갑판 위에서, 한껏 멋을 부린 여자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전족을 한 여자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있었으며, 서너명의 여자들은 노를 젓는 작고 빠른 배를 타고 유혹을 했습니다. 전통적인 어두운 색깔의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포르투갈인들에게 배운, 밝은 색의 두건을 맨 패션을 한 이들은, 외국 선박이 정박하자마자 노를 저어 접근하고는, 애교 넘치는 인사를 하면서 유혹을 했습니다. 한 기록에서는, 아마도 자신의 기억에 남았던듯한 인삿말 중 하나까지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봐요! 그리운 선원 아저씨, 잘 지냈어요? 나는 지난 번 황푸 강에서 당신을 만난 뒤부터, 오랫동안 당신을 그리워했어요."(Ah, you missee chiefee matee, how you dooa? i saavez you long tim, when you catchee Whampoa last tim.)
이와 같은 일은 물론 불법적이었지만, 그러한 규칙은 그다지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기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한다' 는 선교사의 일이, 쉬울리 없을 것입니다. 스티븐슨은 열심히 설교를 했지만, 일기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늘 스플렌디드 호에서 80~100명의 청중에게 설교를 했다. 설교내용은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이다.(잠언 14장 9절) 나는 상당히 자유롭게 강연을 했고, 모두 내 말을 경청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죄에 대해 분명한 자각을 한다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일주일 후, 스티븐슨은 오터스풀 호라는 곳에서 항해사를 비롯한 고급선원들과 일반선원을 대상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은 11장 28절) 라는,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주제로 연설을 했지만, 스티븐슨은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것 같았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낙담하지 않았고, 서양인들을 넘어 중국인들에게 포교를 할 방법에 대해 궁리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중국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할 것인가? 선교사로서의 그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은, 바로 양아발이었습니다.
양아발
양아발은 1789년에 태어났고, 스티븐슨과 만나던 그 시점에서는 43세의 나이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양아발은 단 4년간의 교육만을 받은 채 일자리를 찾기 위해 떠돌았고, 붓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인쇄용 목판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공(刻字工)이 되었습니다. 1815년 무렵,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윌리엄 밀른(William Milne)에게 고용되었습니다.
밀른이 양아발을 고용한 이유는 자신들이 중국어로 번역하고 있던 소책자와 성서를 목판에 새기기 위함이었고, 이곳에서 양아발은 '신명기(申命記)'와 '여호수아(Joshua)' 의 중국어 번역본을 출판하는 일을 처음으로 맡았습니다. 양아발 본인은 독실한 불교도 였지만, 밀른은 자신에게 고용되었다면, '그리스도교를 믿던, 혹은 믿지 않던' 상관없이 매일 예베에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고, 양아발은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예배를 들었습니다.
물론 대다수 중국인들은 예배에서 잡담을 했고, 교리에 대해 대놓고 싫은 기색을 보였으며, 누군가는 담배를 피웠지만, 양아발은 내적인 갈등을 겪다가 1816년 11월, 어느 주일을 이용해 밀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양아발은 그 후 직접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쓴 37페이지의 소책자에 '구세록촬요약해' 라는 제목을 붙였고, 조물주로서의 하느님의 권능과 십계명, 사도 바울의 여러 편지와 하느님의 분노와 자비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양아발은 이 책을 직접 200부 만들어서 배포했지만, 곧 당국에게 체포되어 두들겨 맞은뒤 벌금을 물었고, 집이 수색당한 후 목판등이 모두 불에 탔습니다. 하지만 양아발은 아랑 곧 하지 않고 아내를 개종시켰고, 직접 세례 하였습니다.
밀른이 사망한 1822년 이후, 양아발은 런던선교회에서 복음전도사 겸 중국어 강사로 일하다가, 1827년에 선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어 책자를 쓰는데 몰두하여, 1832년에 '권세양언' 을 작성하고, 광저우에서 간행했습니다.
양아발은 책자와 인쇄와 배포에 관련된 문제는 전문가 였기 때문에,작은 배를 타거나 걸어서 광저우 주변의 마을을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400km 이상을 움직였고, 한번 움직일때마다 7천 부 이상의 그리스도교 책자들을 배포했습니다. 그 무렵에, 스티븐스는 양아발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 인쇄된 책자를 배포하는데 선교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바로 깨우쳤습니다.
"1~2천만의 사람들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접근해서, 그들에게 성서 관련 책자를 남겨두는 것은, 그들을 완전히 배제하는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렇게 하면 신앙이 깊은 선교사가 전혀 없는 동안에도 그들에게 선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난 년 동안 그곳에서 굴러다니던 그 수천권의 책들이 모두 신보다 먼저 잊혀지고, 결국 "무용하게 될 것" 이라고 누가 확신하겠는가? "
이러한 의도에 따라, 1835년 봄과 가을, 스티븐슨은 중국어에 능통한 동료 선교사와 함께 상해까지 다녀오는 여행을 떠나 수백권의 책자를 배포했고, 이후에 다시 여행을 떠나 2만권 이상의 책자를 배포했습니다. 그의 행보는 성공적이었고, 스티븐슨은 어느날에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담을 넘어서 달아나으며, 어느날에는 머리 위로 손을 흔들어대는 인파위로 책을 마음껏 내던졌고, 소나기를 맞으면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속에 스티븐슨은 순찰선의 미행을 받았고, 범선이 연속포격을 받은 적도 있었으며, 말을 탄 중국인 군관의 재지를 받거나, 포졸들이 사복을 입고 군중 틈에 끼어들어 오는 위협을 당했습니다. 혹은 유생들이 반유교적인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발하여 항의를 하기도 했으며, 또 어느 지독한 날에는 지방관리들이 스티븐슨의 책을 빼앗아, 그가 보는 앞에서 모든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뒤, 바구니에 담아 불태워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아랑 곧 하지 않고 배포 작업을 계속 했습니다. 분명히 대중들에게 그가 "뿌리는" 책은 인기가 많았지만, 그렇게 열광적으로 책을 가져가는 중국인들의 절대 다수가, 실제적인 목표와는 다른 이유로 가져간다는 사실은, 스티븐슨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책을 하나 받은 중국인들은, 그러나 동일한 내용의 책을 또 받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내다 팔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중국인은 책을 받자마자, 스티븐슨이 떠나기도 전에 마을거리에 나가 책을 팔아버리기도 했습니다. 혹은 아편을 얻기 위해 몰려오거나, 스티븐슨에게 의약품을 나눠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자신의 일을 계속했으며, 동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의 군주가 내세울 수 있는 권한보다도 더 확실한 명령인 전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졌다. 무슨 권리로 수많은 중국인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그들은 현세와 내세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조차도 부당하게 거의 박탈당하고 있다. 당국은 그들에게서 기회를 빼앗았지만, 그들은 이것에 저항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우상숭배자로 살아왔고, 현재도 그런 상태이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을 축복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고 있다. 인간의 양심을 억압하는 정신적인 압제와 고귀한 천국을 거부하는 반란에 맞서, 나는 항거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정부 차원의 보복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결과를 감수한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할지라도,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던 스티븐슨은, 1836년 이른 봄에 새로운 직함인 '중국선교단'의 목사직을 맡았습니다. 당시의 그에 대해, 한 친구는 "성서와 책자의 배포"를 당시 스티븐스가 가장 큰 관심사로 가지고 있었다고 기억했습니다. 그 시점에서, 스티븐슨은 더 많은 책자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1836년의 이른 봄. 22세의 청년 홍인곤(洪仁坤), 자로 말하자면 화수(火秀)였던 인물은, 부시(副試)를 치르기 위해 광저우로 떠났습니다.
한달 전, 홍인곤은 자기가 살고 있던 작은 고을에서, 현시(縣試)를 통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1차적인 단계였고, 그는 광저우 전역에서 온 우수한 학생들과 경쟁해야만 했습니다. 광저우 부에는 총 14개의 현이 있었고, 수천명의 응시생이 모였지만, 합격자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과거를 준비하는 동안, 홍인곤은 집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쌓여 있었습니다. 홍인곤의 아버지는 재혼을 했지만 새로운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인곤에게는 두명의 형과 두 명의 형수, 한 명의 누나가 있었고, 라이(賴) 씨를 가진 아내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유일하게 학자라고 할 수 있는 홍인곤에게 가족들은 모두 기대했고, 잘되기를 바랬지만,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는 학업에만 전념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그는 서당을 열었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약간의 돈이나 음식을 얻었습니다.
이제 광저우에 온 홍인곤은 공원(貢院) 근처에 있는 포정사(布政司)의 관저 근처에 있는 길에서 동료 학생들 사이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독특한 차림새의 인물을 만났습니다.
한 남자는 광둥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광동말을 잘 못하는 사람에게 통역을 해주고 있었고, 통역의 대상이 다른 한 남자는 마치 명나라 의복과 같은 소매가 넒은 도포를 입었고, 두발을 마치 상투처럼 비틀어 매고 있었습니다. 이 괴이한 모습의 사람의 주변으로 수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는데, 구경꾼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통역을 통해)그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들의 바람은 꼭 이루어질 것입니다."
홍인곤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 자신이 시험해 합격할 것인가, 를 물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홍인곤이 미처 말을 열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최고의 공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탄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비탄에 빠진 나머지 당신은 병이 들어버릴 것이니까요. 나는 덕행 높은 당신의 아버지를 축복합니다."
이튿 날, 룽장 가(龍藏街)라는 거리에서 이 괴이한 두 사내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룽장 가는 그들이 어제 있었던 장소보다는 조금 남쪽에 있었지만, 그리 먼곳은 아닙니다. 이때는 그들은 별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다만 손에 들고 있던 책 하나를 홍인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홍인곤은 그 책의 제목을 보았습니다. '권세양언' 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홍인곤의 언급은 모호하고, 애매합니다. 조너선 스펜스는 그 중 '광동 말을 잘 못하던 인물' 이 에드윈 스티븐슨이 틀림없다고 '확언' 했습니다. 광저우에서 오래 지낸 스티븐슨이 '광동 말을 잘 못할' 리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조너선 스펜스는 스티븐스가 기록으로 남긴 "중국어에 능통하기란 거의 어렵다." 는 말을 토대로, 그가 중국말을 유창하게 하지는는 못했을 것이라는 일입니다.
반면에 데오도르 함버그가 묘사한 당시 정경에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습니다. 고지마 신지(小島晉治)는 이 책을 나눠준 인물이 양아발이 아니었는가, 하고 말을 하였는데, 이에 대해 조너선 스펜스는 (중국 말을 못하던 인물은 에드윈 스티븐슨이라고 확언하고 있기 때문에) 통역을 해주던 인물이 "양아발 일 가능성은 없다." 고 확언했습니다. 근거가 있는데, 이 무렵에는 이미 당국에서 위험분자로 찍힌 양아발은 그리스도교 서적 불법 유포로 당국에 다시 체포되었고, 보석으로 풀려난 후 1835년 무렵에 이미 광저우를 떠나 말라카로 이주했었기 때문입니다.
고지마 신지 역시, 그 시점에서 양아발이 중국에 없었다는것을 모르진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것은, 그렇다면 이 일이 1836년 이전, 어쩌면 1834년의 일이 아닌가 하는 의견입니다.
홍인곤에게 '권세양언' 을 넘겨준 인물이 1834년의 양아발이던지, (1836년 말, 싱가포르 여행 중 열병으로 인해 34세의 나이로 사망한)스티븐슨이던지, 유일하게 확실한 한 가지는, 그 시점에서 '권세양언'을 넘겨준 그 사람은, 자신이 넘겨준 그 책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한 사건 ─ 200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 이 발생하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홍인곤 ─ 미래의 천왕, 홍수전 ─ 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목차를 "대충 흝어" 보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약 홍인곤이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약간이라도 내용을 보았다면, 그는 책에 실려 있는 노아의 이야기를 보았을 것입니다. 신이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령했을때, 노아의 나이는 이미 600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즉시 신의 말에 따랐고, 세 아들이 그를 도왔습니다. 거대한 배는 3층의 높이였고, 길이가 90미터 였으며, 폭은 15미터 였습니다. 배 안에는 창문이 있었고, 모든 포유동물이 암수 7쌍, 또는 암수 2쌍을 이루어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짝을 이룬 모든 조류와 파충류가 배에 올라탔습니다.
이윽고 신의 홍수가 온 세상을 뒤덮었습니다. 신의 홍수에 세상의 모든 거인들이 죽었고, 포유류와 파충류, 조류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노아의 일가족 8명만이 산꼭대기 위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나, 불안정한 면이 있던 양아발의 책은, 이후의 결말에 대해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8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길짐승과 날짐승들은 어찌되었는가? 영원히 떠돌았는가? 비에 젖은 하늘 아래에서, 언제까지나 커다란 배를 타고 파도 위를 표류했는가?
신의 본뜻은 무엇인가?
23세의 홍인곤은 과거에서 낙방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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