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금사 본기1~본기3까지 국역하고 있는데요,
내친 김에 요사 해당 부분을 국역하고 있습니다.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5년 (1115년) http://cafe.naver.com/booheong/82157
요사(遼史) 천조제(天祚帝) 천경(天慶) 6년 (1116년) http://cafe.naver.com/booheong/82410
사전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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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春正月甲寅,減廄馬粟,分給諸局。
是月,女直軍攻春州,東北面諸軍不戰自潰,女古、皮室四部及渤海人皆降,複下泰州。
(천경天慶/요 천조제의 연호) 7년(1117년) 봄 1월 갑인일(甲寅日)에,
구마(廄馬/마굿간 말)의 곡식을 줄여, 제국(諸局/각 관청)에 분급(分給/나누어 줌)하였다.
이달에, 여진군이 춘주(春州)를 공격하여, 동북면(東北面)의 각 군이 싸우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지고,
여고(女古)와 피실(皮室) 4부(部)가 발해인(渤海人)과 더불어 모두 항복하였고, 거듭하여 태주(泰州)도 항복하였다.
二月,淶水縣賊董龐兒聚眾萬餘,西京留守蕭乙薛、南京統軍都監查剌與戰於易水,破之。
2월에, 내수현(淶水縣)의 적 동방아(董龐兒)가 무리 만여명을 모으자, 서경유수(西京留守) 소을설(蕭乙薛)과 남경통군도감사(南京統軍都監) 사랄(查剌)이 역수(易水)에서 함께 싸워, 격파하였다.
三月,龐兒黨複聚,乙薛複擊破之於奉聖州。
3월에, 동방아(董龐兒)가 무리를 거듭 모으니, 소을설(蕭乙薛)이 봉성주(奉聖州)에서 다시 격파(擊破)하였다.
夏五月庚寅,東北面行軍諸將涅里、合魯、涅哥、虛古等棄市。
乙巳,諸圍場隙地,縱百姓樵採。
여름 5월 경인일(庚寅日)에, 동북면행군(東北面行軍) 제장(諸將) 열리(涅里), 합로(合魯), 열가(涅哥), 허고(虛古)등을 기시(棄市)하였다.
을사일(乙巳日)에, 각 위장(圍場/국립 사냥터)의 극지(隙地/공터)는, 백성(百姓)에게 초채(樵採/땔나무를 채취함)하도록 하였다.
六月辛巳,以同知樞密院事餘里也為北院大王。
6월 신사일(辛巳日)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여리야(餘里也)를 북원대왕(北院大王)으로 삼았다.
秋七月癸卯,獵秋山。
가을 7월 계묘일(癸卯日)에, 추산(秋山)에서 사낭하였다.
八月丙寅,獵斯那里山,命都元帥秦晉王赴沿邊,會四路兵馬防秋。
8월 병인일(丙寅日)에, 사나리산(斯那里山)에서 사냥하고, 명하여 도원수都元帥 진진왕(秦晉王)을 연변(沿邊/국경)에 가게하여,사로(四路)의 병마(兵馬)를 모아 방추(防秋/오랑캐를 막음)하게 하였다.
九月,上自燕至陰涼河,置怨軍八營:
募自宜州者曰前宜、後宜,自錦州者曰前錦、後錦,自乾自顯者曰乾曰顯,又有乾顯大營、岩州營,凡二萬八千餘人,屯衛州蒺藜山。
丁酉,獵輞子山。
9월에, 상(上)이 몸소 연(燕)의 음량하(陰涼河)에 이르러, 원군(怨軍) 8영(營)을 두었다.
의주(宜州)에서 모병한 자를 전의(前宜)와 후의영(後宜營)라 말하고,
금주(錦州)에서 모병한 자를 전금(前錦)과 후금영(後錦營)이라 하고,
건주(乾州)와 현주(顯州)에서 모병한 자를 각각 건영(乾營), 현영(顯營)이라 말하여,
또 건현대영(乾顯大營)과 암주영(岩州營)이 있어, 무릇 2만8천여인이니, 위주(衛州) 질려산(蒺藜山)에 둔(屯)하였다.
정유일(丁酉日)에, 망자산(輞子山)에서 사낭하였다.
冬十月乙卯朔,至中京。
겨울 10월 초하루 을묘일(乙卯日)에, 중경(中京)에 이르렀다.
十二月丙寅,都元帥秦晉國王淳遇女直軍,戰於蒺藜山,敗績。女直複撥顯州旁近州郡。
庚午,下詔自責。
癸酉,遣夷離畢查剌與大公鼎諸路募兵。
丁醜,以西京留守蕭乙薛為北府宰相,東北路行軍都統奚霞末知奚六部大王事。
12월 병인일(丙寅日)에, 도원수(都元帥) 진진국왕(秦晉國王) 순(淳)이 여진군과 조우하여,
질려산(蒺藜山)에서 싸웠는데, 패적(敗績/패전)하였다.
여진이 또 현주(顯州)와 가까운 주군(州郡)을 다스렸다.
경오일(庚午日)에, 조(詔)를 내려 자책(自責)하였다.
계유일(癸酉日)에, 이리필(夷離畢/요 관명) 사랄(查剌)를 보내 대공정(大公鼎)과 함께 각 지역에서 모병(募兵)하였다.
정추일(丁醜日)에, 서경유수(西京留守) 소을설(蕭乙薛)을 북부재상(北府宰相)으로 삼고,
동북로행군도통(東北路行軍都統) 해왕(奚王) 하말(霞末)을 지해육부대왕사(知奚六部大王事)로 삼았다.
是歲,女直阿骨打用鐵州楊樸策,即皇帝位,建元天輔,國號金。楊朴又言,自古英雄開國或受禪,必先求大國封冊,遂遣使議和,以求封冊。
이해에, 여진 아골타(阿骨打)가 철주(鐵州) 양박(楊樸)의 계책을 사용하여, 곧 황제(皇帝)의 위(位)에 오르니,
건원(建元/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제정)하여 천보(天輔)라 하고, 국호(國號)는 금(金)이다.
양박(楊朴)이 또 말하길, 예로부터 영웅(英雄)이 개국(開國)하거나 수선(受禪/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하면,
반드시 먼저 대국(大國)의 봉책(封冊)을 구(求)하여야 하니,
마침내 사신을 보내와 화의를 의논하며, 이로써 봉책(封冊)을 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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