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69) ─ 신사의 나라

 


런던 동인도 회사 본사


 중앙에서 아편이라는 악마에 대한 논의가 심도 있게 벌어지고, 이에 대안 대책으로 임칙서가 선임될 무렵, 중국을 향한 영국의 움직임은 점점 노골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당시 광저우만을 외국 무역의 창구로 삼고, 외국의 거주를 제한했습니다. 광저우의 무역에 대해서는 따로 국적의 제한은 없었는데, 대다수는 영국 상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여기에 미국 상인들이 도전하는 형태였습니다. 영국 상인들의 주된 움직임은 물론 동인도 회사의 손에 이루어졌고, 그 동인도 회사의 뒤에는 대영제국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19기 초 무렵, 상황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광저우에 선하(船荷) 감독 및 사무원 20명, 의사 2명, 목사 2명을 상주시켰고, 이는 셀럭트 코미티(Select Committee)라고 불렸습니다. 


 고대로부터 강력한 중화 제국이 외국에 대한 교역을 벌일때, 이는 오직 단 한가지의 형태 밖에 없습니다. 중국이 다른 나라와 외교를 맺는 형태는, 정말 드문 몇가지의 이변을 제외하면 오직 조공 밖에 없었고, 모든 공식적인 무역은 조공 무역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의 무로막치 막부는 중국에 조공할 권리를 오직 막부에게로 제한하였는데, 이는 공식적인 무역의 창고를 자신들만이 독점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소위 '오랑캐'가 중국에 물품을 가지고 오면, 서로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황제가 "은혜"를 하사하거나, 혹은 장사를 할 수 있게 정해 놓은 구역에서, 자신들이 가져온 물품을 팔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예컨대, 광저우의 무역 창고가 가지는 근본적인 개념은 명나라의 영락제가 오이라트에 대해 열어 놓은 마시장과 비슷한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무역의 과정에서 청이 일방적으로 자신들의 조치를 취해 통보할 경우, 영국은 이를 그대로 따라야만 했습니다. 아편 무역은 대단한 규모의 '사업' 이었지만, 그 기반 자체는 상당히 불안했습니다. 이를테면, 1821년 12월, 영국 군함인 토페즈 호의 승무원들이 중국인과 난투를 벌이다가 2명의 중국인을 살해했고, 영국 수병은 14명이 다쳤습니다. 이 살인사건에 대해 양광 총독은 범인 인도를 요구했고, 동인도 회사는 자신들은 영국 해군의 군함을 감독하는 권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양광 총독은 무역을 중지시켜버렸습니다.


 국가간의 무역이, 중앙 정부도 아닌 지방 총독의 견해로 중지되어버린 것입니다. 동인도 회사는 무역을 하지 않게 되면, 그 주변에 붙은 중국 상인들도 타격을 입을 것이고, 이는 중국 조정을 흔들 수 있는 무기라고 판단하여 자신들도 철수했습니다. 하지만 양광 총독은 되려 이렇게 일갈했습니다.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라. 천조는 세은 따위를 중히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무역의 기반이 불안정한 원인은 양국의 위치가 불평등하기 때문입니다. 하여, 영국은 이전부터 매카트니, 애머스트 등의 사절을 보내 이러한 조공 무역 체제를 정부간의 대등한 통상관계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런 시도를 하려온 사절들 조차 모두 청나라는 조공을 하러온 사절사로 기록했습니다. 애시당초 그 밖의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영국 내에서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진전되었고 이에 따라 무역의 자유화가 대세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동인도 회사는 점점 권리를 잃었고, 1813년 인도 무역 독점권을 잃은 후, 1834년 대청 무역 독점권도 잃어버렸습니다. 동인도 회사의 손길이 사라진 후, 영국은 정부 차원에서 직원을 보내 광저우의 통상 감독과 거류민 보호를 책임지게 했습니다. 일종의 총영사입니다. 하지만 보통 영사관은 상대 나라의 수도에 세우는 법이지만, 대청제국과 대영제국은 서로 교류는 하면서도 정식 국교는 맺지 않는 상태라,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이 '총영사' 에서 베이징에 보낸 사람들도, 모두 조공사 취급을 받았습니다.


 동인도회사가 있던 시절, 이를 관리하던 선하 감독은 대반(大班)이라고 불리었는데, 그 대반은 철수 하면서 영국 정부 차원의 대표가 온다는 이야기를 하고 갔습니다. 그 정부의 대표는 이목(夷目)이라고 불리었는데, 영국의 체제와 동인도 회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청나라 입장에선, 왜 대반이 가고 이목이 오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새로 부임한 그 '이목'은, 윌리엄 네이피어(William John Napier)라는 인물이었습니다. 해군 출신으로 당시 48세의 그는 중국으로 부임하기 전, 영국 국왕 윌리엄 4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첫째. 평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청나라를 자극하거나, 의심이나 악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
 둘째. 영국 신민이 청나라에 일으킨 분쟁을 해결할 것.
 셋째.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섣불리 제국 육해군의 원조를 청하지 말 것.


 당시영국 외무부 장관, 파머스턴(Henry John Temple, 3rd Viscount Palmerston) 자작의 지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광저우에 도착하면 양광 총독에게 서면으로 통지할 것.
 둘째. 광저우 이외의 각지에 가급적 상업을 확대할 것.
 셋째. 북경 정부와 직접 교섭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할 것.
 넷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분간 청나라와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지 않게끔 할것.
         다만, 그런 기회가 생기면 먼저 정부에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릴것.
다섯째,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함을 호문에 들여보내지 말것.



 파머스턴 자작의 지시는 두번째와 세번째 지시가, 네번째의 견해와 상충되고 있습니다. 다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라는 단어 한마디가, 어쩌면 모든 사건의 전조극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이전까지, 동인도회사의 대반들은 먼저 마카오에 들린 뒤, 광저우행 허가증을 얻은 뒤에야 광저우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네이피어는 마카오에 내리기는 했지만, 출입증을 신청하지 않고 바로 광저우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외무부장관의 지시를 따라 자신의 도착을 양광 총독에게 전하려 했습니다. 한문에 능통했던 인물인 로버트 모리슨이라는 인물이 도착했다는 보고서를 쓰고, 서기관이었던 에스텔이라는 인물이 이를 전하려 했습니다. 네이피어는 외국인에게 허가된 성 밖의 거주지에 들어갔습니다. 총독은 성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규정상 외국인은 성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에스텔은 출입이 막혔고, 대신 편지를 사람에게 보내 전하려고 했지만, 이를 받는것도 규정 위반이라 아무도 상대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전까지 동인도회사의 대반들은 자신들의 도착을 알릴 시, 자신들과 교역할 수 있는 중국인 상인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들이 양광 총독에게 제대로 보고했는지 안했는지는 대반들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네이피어는 양광 총독에게 문서로 알리라는 지시를 받은 만큼, 중국인 상인들이 아닌, 직접 총독에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양광 총독은 노곤(盧坤)이라는 인물이었고, 그는 네이피어가 기존의 '대반' 대신 광저우에 도착했다는 사실 자체는 보고 받았습니다. 또, 그가 마카오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들어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 청나라는 지금까지 교역 문제에 있어서 정부가 직접 나서지 않고, 허가받은 중국인 상인 ─ 즉 공행(公行) ─ 에게 맡기고 있었는데, 노곤이 생각하기에 상대가 회사에서 나라로 바뀌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의 사정일 뿐이었고, 굳이 청나라가 이에 맞추어줄 필요는 없어보였습니다. 더구나, 상대는 허가도 받지 않고 왔습니다.


 다만, 노곤은 분쟁이 일어나는것은 원하지 않았으므로, 네이피어 출입 허가증도 없이 밀고 들어온 사실에 대해서는 따지지 않기로 했습니다. 얌전히 마카오로 떠나면 추궁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네이피어는 그곳에서 다시 출입 허가증을 받고 다시 오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네이피어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총독을 기어코 만나려는 네이피어. 그전까지의 관례를 따라, 이를 응하지 않으려는 양광 총독. 그 사이에 곤란해진것은 공행, 즉 허가받은 중국인 상인들이었습니다. 공행의 대표였던 오소영은 네이피어에게 지금까지의 "관례"를 따르면 문제가 생길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지만, 네이피어는 이 역시 따르지 않았습니다. 


 장사를 하려면, 이 외국인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간 장사를 위해 외국인을 감싼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소영은 이에 결심을 하여, 공행은 자발적으로 영국과 무역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일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를 줄이려면 네이피어가 뜻을 꺾은 뒤, 공행을 만나 설득을 해야 하겠지만, 네이피어는 '자신은 정부 관리이므로, 민간인인 공행 대표와 만날 수는 없다' 고 거부했습니다. 그는 오직 관 대 관의 대등한 관계만을 요구했고, 이에 공행 측에서 어찌어찌 부지사 급의 청국 관리와 네이피어의 회담을 성사시켰습니다. 본래 청나라 정부는 관리가 외국인과 접촉하는 일을 엄금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대략 '외국인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회담' 자리를 만드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렇게 자리가 마련되고 나자, 별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네이피어는 회담을 캔슬시켜 버렸습니다. 조사의 형식이므로 청나라 관리가 상좌에 앉게 되지만, 네이피어는 이는 용인할 수 없다면서 거절해버린 겁니다. 이 시점에서 벌써 그는 정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무력으로 압박하는 것이, 말로써 담판 짓는 것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청나라 쪽의 입장에선 그전까지의 관례가 있는데, '이목이 온다.' 라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은 상대방이, 다짜고짜 밀어부치다가 일이 통하지 않자 성질을 부린다고 밖에 여길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네이피어는 강경파였고, 상황을 어색하게 지켜보고 있는 영국 상인들에게 단결하여 대항하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자신의 견해를 중국어로 번역해 사방에 배포했습니다.


 "……대영 무역으로 생계를 꾸리는 수천 명의 중국인은, 물정 모르는 완고한 정부 때문에 파탄과 고통을 겪어야 한다. 영국 상인은 호해 평등의 원칙 아래 청국 전체와 거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영국 상인은 영국과 청국, 양국이 평등함을 인정받을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총독은 곧 공행의 정신 나간 결심(무역 중단)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주강(珠江)의 흐름을 막는 것처럼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정부의 허가없이 민간인이 함부로 포고문을 뿌리고 다니는것은 내란의 문제가 있어 당시 청나라에서는 금지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외국인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노곤은 그전까지는 온건하게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상황이 이에 이르자 격분하여 모든 무역을 전부 중지시켜버렸습니다. 그 이전에 공행이 무역 중단을 선언 한바 있지만, 이는 자발적인 결정이었고, 노곤의 결정은 공식적인 정부의 명령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는 통역, 중개업자, 요리사, 잡역부 등 모든 중국인이 퇴거하였고, 영국 상관에 식료품을 제공하는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자 네이피어는 네이피어 대로, 호문 밖에 있던 안드로마케호, 이모젠호 두 개의 영국 군함에게 당장 광저우로 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사태가 순식간에 무력 충돌의 여지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네이피어는 분명한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나는 영국 황제의 이름으로, 총독과 순무가 선언한 전대미문의 포악하고 부당한 행위에 항의한다. 그 권력 남용에 대해 항의한다. 나는 귀하(상업회의소 소장)가 그들(공행)에게 영국 황제가 위대한 군주이고, 청국보다 더 넒고 강한 세계 영토를 통치하고 있으며, 가는 곳마다 정복하지 못하는 곳이 없는 용감한 군대를 이끌고 있고, 청나라의 백성이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바다 위를 조용히 항해하는, 120문이나 되는 대포를 갖춘 큰 배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하도록 요구한다…… 이 서신에 서술된 사실에 따라, 답변이 15일 월요일까지 도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온 거리에 널리 알리고, 그 사본을 사람들에게 배포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중 한장은 틀림없이 베이징에 있는 황제의 면전에 다다를 것이다."


 네이피어가 전함과 영국의 국토를 말하는 부분에서 보면, 애시당초 그가 사태를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 그다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네이피어의 협박에 대해, 양광총독 노곤은 조곤조곤 이에 대한 반박을 했습니다. 물론, 이 역시 관 대 관의 형식이 아닌, 공행에 통보하는 형식을 집요하게 지키면서 말입니다.


 "……영국이 바란다면, 물론 동인도회사의 대반 대신, 국가 관리, 즉 이목을 파견하는 것은 그 쪽의 자유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 청국이 공향을 통해서만 이인과 접촉하는 옛 제도를 지속하는 것도 우리의 자유 아닌가."


 "(예로부터)예방이나 조공을 위해 건너 온 사절을 제외하고, 우리나라는 외국과 직접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네이피어의 임명에 대하여, 사전에 아무런 정식 통고를 보내지 않았으며, 그 자신(네이피어) 역시 아무런 신임장도 지참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문제에 대하여, 총독이 베이징에 훈령을 구할 시간조차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청국의 법률을 어기고, 상관 안으로 병사와 무기를 들이고 포대에 포격을 가하고, 막무가내로 내하에 쳐들어왔다……"


 여기까지가 네이피어의 주장들에 대한 노곤의 반박이었고, 그 개별적인 이야기들 역시 모두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목이 온다는 사실 역시 동인도회사의 대반이 떠나면서 알린 사실이지, 영국 정부 차원에서 알린 적이 없습니다. 네이피어는 마카오에서 출입증도 받지 않고 광저우로 왔고, 중국이 이전까지 다른 절차로 외국과 관계를 맺은 적이 없던 일도 분명한 사실이었으며, 그는 노곤이나, 더 나아가 청나라에 시간 조차 주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해서 일을 서두르고 있었습니다. 


 반박 후에, 노곤은 네이피어에게 경고하는 의미의 말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조의 병마, 가공할 군대, 총포, 무기는 산처럼 쌓여 있다. 군대를 움직이면 작은 군대는 도저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네이피어가 죄를 뉘우치고, 군함을 철수해 청나라의 옛 제도를 지킨다면, 좀 더 기다릴 의향이 있다. 만일 그가 아직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천조의 군대가 한번 움직이면 값진 보석도 그들의 면전에서 불타고 말 것이다."


 영국 상인들의 경우에는, 동인도회사가 사라진 후라 자본력이 약한 군소 무역업자들이 광저우에 많이 와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역이 재개되지 않고 이렇게 분쟁이 길어질 시, 모두 파산을 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 네이피어가 아무리 힘내라고 독려하며 뭉치라고 권고해도 반응이 미적지근했습니다. 네이피어 한 사람만 돌아가면, 모든 문제는 사라지고 이전처럼 일이 재개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자, 네이피어 역시 굴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때 마침,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있어 더 이상 나돌아 다니기도 힘들었습니다.


 네이피어는 두 척의 군함에게 철수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청나라 보낸 배를 타고 광저우를 떠났습니다. 마카오에 도착한 그를 포르투갈 당국이 힘써 돌봐주었고, 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교회의 종소리마저 금지했을 만큼 신경을 써주었지만 한달 쯤 지나 10월 11일, 그는 사망했습니다. 


 네이피어는 광저루를 떠나면서 제류하고 있는 영국인에게 다음과 같은 메세지를 남겼습니다.


 "……우리는 청나라 군대의 압박과, 영국 상인에게 가해진 모욕 때문에 지금 이 땅을 물러난다. 총독의 조치는 청나라와 황제와 똑같이 신성한 영국 황제의 위엄을 손상시켰다. 지금은 하고 싶은 대로 용감한 행동을 해도 좋다. 언젠가 영국 황제가 총독을 벌하는 날이 올 것이다."


 노곤이 보았다면, '적반하장' 이라고 분개했을 내용이지만, 그 내용은 섬뜻한 면이 있습니다. 




 굳이 네이피어의 막무가내와, 일이 풀리지 않자 다짜고짜로 협박부터 날리는 태도 등, 그 몰상식한 면모를 청나라 쪽의 입장에서 보지 않아도, 영국 측의 입장에서도 이 일은 사태만 요란하게 벌이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네이피어가 영국을 떠나고 문제를 일으킬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은 무적의 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무너뜨린 아서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으로 바뀐 후 였습니다. 웰링턴은 광저우에서 네이피어가 벌인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말을 전했습니다.


 "귀하(네이피어)가 청국 관헌의 허가 없이, 곧장 광저우로 간 것은 청국과 일절 새로운 관계를 만들지 말며, 종래의 접촉 방법을 바꾸지 말라고 명한 파머스턴 경의 훈령에 반하는 태도다."


 이 문서가 작성될 당시, 네이피어는 이미 죽었지만 웰링턴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네이피어는 내각에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전했습니다. 


 "기존 관례에 어긋나는 접촉 방법을 청나라에게 요구한 네이피어 경과 같은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고, 국민의 굴욕을 초래하며, 청국 관헌의 허가 없이 광저우로 가서 고압적으로 관의 이름을 내걸고 평등한 접촉을 요구한 사실은, 공연히 청나라 사람의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네이피어는 청나라의 노곤에게도 훈계받고, 상관이 되는 웰링턴에게도 훈계를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는 파머스턴의 읽기에 따라 의미가 오락가락하는 지시가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어쩌면 그 지시가 모든 문제를 일으키는 서곡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눈꼽만큼의 융통성도 발휘하지 않고, 일을 몰아부치다 사태가 불리해지자 협박부터 일삼고 보는 네이피어의 태도가 건달패의 태도나 다름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광제는 사건이 마무리 되고 나서, 자신의 상유를 반포했습니다. 외국인이 관례를 모른다는 사실을 굳이 크게 질책할 필요는 없으며, 이를 엄벌할 생각도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굳이 국가 남쪽의 '작은 일' 을 크게 만들어 요란하게 구는것도, 제국의 체면에 어긋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도, 도광제의 심기를 거느린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보았는데, 각 포대는 허수아비인가? 두 척의 외국 군함을 격퇴하지 못했다니 웃어야 할지, 한탄해야 할지. 무장의 해이함이 한결같으니, 외국인이 무시하는 것도 괴이쩍게 여길 일은 아니다."


 도광제가 더 신경을 쓴 부분은 두 척의 소형 구축함이 호문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데, 각 포대가 전혀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항해시대를 거친 전함에 대한 오랜 경험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발달 된 기술 등으로 영국을 비롯한 열강의 전함은 대단한 전력이 된 반면에, 청나라는 기술 수준은 차치하더라도 이미 군대의 질이 형편없어진지 오래였으며, 지휘관들 역시 무능해진 아편 중독자들이 태반이었습니다. 도광제가 이 문제에 집중한 것은 사태를 직시한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임칙서가 부임하기 5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도광 19년, 곧 1839년 1월 25일. 임칙서는 문제의 도시, 광저우에 도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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