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별적인 시민 의식의 양상에서 청나라가 얼마나 문자의 옥으로 인해 사상적 옥죄임을 일반 백성들에게 강요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말 한 바 있습니다. 물론 전제군주정에서 국가가 여러 학문과 사상에 과도한 개입을 하는 일은 일반적인 일이나, 그 정도로 강도가 극렬했던것은 청나라 자체가 소수가 다수 위에 군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연적이었습니다. 지배층인 만주족은 절대적 소수임에 반면에 국민의 절대적 다수는 또 한족입니다. 수억명 한족이 단결해 싸우자면 만주족 정권은 견뎌낼 방법이 없습니다.
따라서 탄압을 받는것은 문자의 옥 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조직하는 결사(結社) 역시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국가는 이에 대단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반체제라고 부를 수 없는 온건한 형태의 조직이라고 해도 정부는 아예 결성 자체를 막아세웠고, 따라서 청나라의 결사들은 모조리 비밀결사의 형태가 되었습니다.
청나라의 치안이 엉망을 향해 달려가자 뱃사람이나, 짐꾼이나, 행상이나, 도붓장수나 일개 수부나 모두 자신들이 살기 위해선 일치단결하여 자기 방어를 위한 조직을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지키기 위한 길드를 만드는 일 조차도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러한 조직이 반체제적 성격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초에 어느정도는 그냥 눈감아주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이 백련교의 난, 또 분명한 반청복명 세력인 천지회 등이 활개를 치자 정부도 극렬하게 결사를 탄압했습니다. 극단적으로, 천리교 조직이 자금성 내에 침입하여 용종문 편액에 화살까지 박아 넣게 되자, 이는 매우 당면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탄압받는 당사자들도 살기 위해선 뭉쳐야 합니다. 하지만 드러낼수는 없으니, 자연히 비밀결사가 되고, 따라서 저도 모르게 반체제적 사상이 강화되게 됩니다. 그래도 겉으로 실체가 드러날 정도로 규모가 크던 단체인 안청방(安淸幇)의 경우에는 뱃사람들끼리의 광역 조직이었는데, 안청방이라는 의미는 "청나라 왕조를 편안케 하는 방" 이라는 말이므로, 최대한 자신들이 반체제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이 그 유명한 조직 "청방"의 시초가 되었다는 식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뱃사람들은 거친 사람들이 꽤 많고 사염, 나중에 이르면 아편까지 밀매하면서 더욱 위험한 쪽에 손을 대었습니다.
청방의 경우 본래 반체제 사상과는 별개로 출발했다고 쳐도, 천지회는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인 조직입니다. 천지회의 조직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방대하며, 국공내전 기간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천지회와 한다리 걸치고 있는 가로회(哥老會)에 연결되어 있고, 천지회 - 가로회의 회원 확대 방식은 쑨원의 동맹회(同盟會)가 비밀 조직으로 중국 내부에 깊이 자리잡아, 군인 - 학문의 교사 여러 방면에서 은밀히 회원을 확대하며 사상을 전파할때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그토록 역사가 깊고 방대한 조직에 대해, 여러 수많은 문건이 그 존재를 전하고 있지만, 그 정확한 기원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천지회는 극비의 조직이었고, 회원들 자신들끼리도 비밀 유지를 위해 그 실체를 알지 못했으며, 남은 방대한 문서들도 정부의 일방적인 서술과, 또 붙잡힌 회원 ─ 과연 진짜 천지회 회원일지도 확실치 않을 ─ 들이 고문을 받고 아무렇게나 줄줄 말한 식의 내용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진짜 천지회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조직이 완전 소멸되거나, 혹은 그 '천지회' 라는 조직마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각지에서 천지회를 자처하는 조직들이 남부에서 대단한 숫자였는데, 그들이 과연 진짜로 천지회였는지, 다만 천하에 이름이 높은 천지회의 이름을 빌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천지회에 가입되었다고 믿는 사람조차 사실은 전혀 엉뚱한 단체에 가입되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시초에 대해 대만의 정성공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소림사의 잔당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하간에, 달리 '비밀결사' 가 아니므로, 그 은밀함과 신비스러움을 정확히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천지회이건, 혹은 천지회의 이름을 내건 다른 비밀결사건, 아예 그 시초가 완전히 다른 조직이건, 가정 연간은 그러한 비밀결사들이 어둠 속에서 밝은 세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점점 드러내었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서로 연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까지 얽혀 들어가면서 상황은 혼돈으로 변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둠 속에서 양지로 나온 존재들에 비해, 지난 2세기 동안 양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만주족은 그 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만주족 장교들의 무능과 태만은 이미 강희제 시절, 삼번의 난 진압 과정에서도 몇번이나 보였던 일들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이 무렵 만주족의 대체적인 모습은 괴이할 정도로 대다수가 사치, 무능, 방종, 겁쟁이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치스럽거나, 특별히 무능하거나, 특별히 방종하고 겁쟁이인 민족 따위가 세상에 있을리 만무하므로 이러한 '일반적' 인 모습은 후천적인 이유일 테고, 만주족이 절대 소수의 위치에서 군림하는 존재였다는 점이 어느정도 이유가 있을 듯 합니다.
특별히 부유한 만주 기인들은 그 부유함을 유지하여 나태해졌고, 빈곤했던 만주 기인들은 다른 활동을 제한받으면서 무력해졌고 빈곤해졌습니다. 여하간에, 사천 총독이자 경략대신이었던 늑보(勒保)는 백련교를 진압하면서 "만주족 군대가 규율을 따르지 않고, 고생이 익숙치 않아, 한족 부대인 녹영에게 경시당할 뿐" 이라고 보고 하였고, 전원 북경으로 송환하고, 이러한 부대는 더 보충 해줄 필요도 없다고 일갈했습니다. 늑보 본인은 만주족이었는데, 만주족인 자신이 보기에도 만주족 군대가 한심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이 늑보가 탄핵당하고 대신 투입된 사람이 복녕(福寧)이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복녕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백련교의 신도 2천여명이 항복하였는데, 복녕은 이를 숨기고 그들을 모조리 학살했습니다. 싸우다 적들이 항복한것과, 전투로 그들을 몰살 시키는 경우 중에 후자가 더 공이 크다고 여겨 그렇게 한 것인데, 문제는 저 초나라의 항우부터 일본군의 섬광 작전에 이르기까지 대학살에 직면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 궁지가 없어진 그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항전하였고, 정부군의 항복 권고 따위는 이제 믿지 않았습니다. 반란은 더욱 진압하기 힘들어졌고, 복녕은 형부에 넘겨져 처별을 받았습니다.
이 무렵, 청군은 이미 사방에서 엉터리 협잡꾼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총병이었던 마유(馬瑜)는 비적을 200여명 죽였다고 보고 했는데 사실 그들은 전혀 관계없는 난민이었습니다. 힘없는 난민을 몰살하여 놓고, 이를 비적 진압이라고 중앙에 보고했던 것입니다. 일이 발각되어 그는 처형되었는데, 발각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청나라는 이미 부패에 찌들었고, 특히 만주 팔기군은 그 정점에 있었습니다. 베이징의 장교들은 매일 매일 여자를 끼고 술을 마시는데 열중했으며, 가을에 있는 군대 사열에서만 딱 한번 갑옷을 입고 거드름을 피우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갑옷은 꽤 무거운 물건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반란군을 진압할때도, 현지에서 의용병을 적당히 세워 총알받이로 앞에 세우고는, 그 뒤에 한족 부대인 녹영을 두고, 자신들은 만주족 부대를 이끌고 맨 후방에서 유유자적하게 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가장 먼저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렇게 의용병을 모집하여 전투를 치루다보니, 반란이 진압되어도 특별하게 무기를 지니고 귀농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훗날 반란이 다시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전투 능력을 보존하려는 것이었는데, 이는 민간에 전투 능력을 심어주게 된 케이스입니다. 이전까지 청조가 전혀 이러한 모습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히 위험했지만 그렇게라도 안하면 무능하고 썩어빠진 팔기군은 적을 대적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만주 병사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사실을 청나라 군대가 스스로 자인한 일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바다에서도 채견(蔡牽)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 시대에서는 정말 드물었던 유능한 해군 지휘관인 이장경(李長庚)이 채견을 거의 전멸 직전으로 몰아넣었지만 전사해습니다. 하지만 이장경의 공격에 채견도 만신창이가 되어 베트남으로 잠시 도망갔다가, 나중에 다시 등장했지만 전사한 이장경의 부하들이 그를 격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채경이 이토록 세력을 떨쳤을때, 청나라 군대의 일부는 그에게 무기와 식량을 팔아 자신들의 돈을 챙겼습니다. 심지어 민절 총독 등은 이장경이 적을 토벌할때, 채견에게 뇌물을 받고 위기에서 빠져 나오게 하기도 했으며, 이장경의 오른팔이었던 인득방은 이들이 이장경을 무시하는것을 보고 분개하여 종적을 감추어 버리기도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반란 진압을 방해하는 단계에 까지 이른 것입니다.
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면서 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관리들은 수 차례 백성들의 집을 뒤졌고, 수많은 재물을 얻어내거나 조사를 하지 않는 대가로 뇌물을 뜯어내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제 국가에 대해 증오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데, 내가 그들에게 호의를 품을 이유따윈 없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도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담뱃대를 들어올렸습니다. 깊게 들어마신 아편 연기 속에 아지랑이처럼 보이는 세상만이, 오직 이 파국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