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1405년 4월20일 기사中
명의 사신 왕가인이 여진인을 효유하여 데려 가기 위해 여진 지역에 도착하다
명나라 사신(使臣) 왕가인(王可人)이 거양(巨陽)사람 20여 명과 더불어 혐진(嫌進)·골간 올적합(骨看兀狄哈)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이들을 초유(招諭)하여 명나라로 함께 돌아가고자 함이었다. 탐주(耽州)·이주(耳州)·아적랑이(阿赤郞耳)·오음회(吾音會) 등처 사람이 지난해에 왕교화적(王敎化的)과 더불어 명나라로 들어간 자가 여섯 사람이었는데, 황제가 〈이들에게〉 옷을 내려 주었다. 이번에 왕가인과 더불어 함께 왔다.
명의 사신 왕교화적이 여진인을 회유하였으나 예전대로 조선을 섬기기로 하다
왕교화적(王敎化的) 등이 야인(野人) 땅에 이르렀다.
왕교화적 등이 이달 8일에 길주(吉州)에 이르러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와 파아손(把兒遜) 등이 사는 곳에 먼저 반인(伴人)을 보내니, 맹가첩목아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조선(朝鮮)을 섬긴 지 20여 년이다. 조선이 명나라와 친교(親交)하기를 형제(兄弟)처럼 하는데, 우리들이 어찌 따로 명나라를 섬김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달 14일에 왕교화적이 오음회(吾音會)에 이르니, 동맹가첩목아가 관하(管下)사람을 거느리고 명령을 받지 않으려 하였고, 파아손(把兒遜)·착화(着和)·아란(阿蘭) 등 세 만호(萬戶)는 길에서 교화적(敎化的)의 반인(伴人)을 만나 말하기를,
“우리들이 조선을 섬기고 있는데, 너희들이 함부로 사신(使臣)이라 일컫고 난잡(亂雜)하게 왕래(往來)하므로 거절하고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하고, 〈이들 세 만호가〉 오음회(吾音會)에 이르러 맹가첩목아와 함께 언약하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본래의 뜻을 변치 말고 조선을 우러러 섬기되, 두 마음을 갖지 말자.”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를 중국 등에서는 협온(夾溫)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로 부르던데요,
제가 알기로 협온은 생여진 가고부(加古部)로 알고 있는데, 가고부는 완안부와 더불어 송화강 유역의 생여진인데,
이시기에 맹가첩목아는 조선 지역 회령, 경성 지역으로 넘어왔더군요.
맹가첩목아의 말마따나 20년을 넘게 조선을 섬겼는데 결국은 1411년 조선을 등지고 명으로 결국 넘어가더라고요.
그러면서 동(童) 씨를 하사받아 이후로는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라고 하더군요.
국조보감에서는 맹가첩목아가 명으로 넘어가서 국경이 텅 비었다고 표현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약 130건의 기사가 있습니다.
청태조와 맹가첩목아와 관련된 내용은 중국 위키나 바이두 백과사전에 많이 남아 있네요.
만약 맹가첩목아가 계속 조선에 남아, 조선 백성이 되었다면 후손 노이합적(奴爾哈赤/누르하치)은 선비가 되었을까요? ㅎㅎ
아니면 무장이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였을 지도..........
간략하게 맹가첩목아를 보실분은 한글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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