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조에 유달리 침입한 여진족을 용감무쌍하게 격퇴한 무용담이 많이 실려 있는데, 소개해 드립니다.
문종15년(1061년) 8월 기사中
○ 가을 8월에 동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정주 별장(定州別將) 경보(耿甫)가 20여 명을 거느리고 적을 염탐하다가 갑자기 적의 괴수 아하비(阿下費) 등 2백여 명을 만나 싸워서 격파하여 10여 급을 베었으니, 그 공을 포상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외에도 많이 있는데, 예전에도 소개 드렸던 11명으로 40명여을 격파한 유고(維古)도 있습니다.
문종3년(1049년) 6월 기사中
○ 동북로병마사가 아뢰기를, “운암현(雲嵒縣 강원 통천군) 절충군대정(折衝軍隊正) 유고(維古) 등 11명이 밤에 순라를 돌다가 천정수(泉井戍)에 이르자 번적 40여 명이 둔(屯) 가운데 돌입하였는데 우리 군졸들이 모두 도망하며 숨자 유고가 앞장서서 공격하여 적이 드디어 무너져 달아났으니, 그 공을 참작하여 직을 제수하소서." 하였다.
그리고 두번이나 공을 세워, 상급을 두번이나 받은 임희열(任希悅) 같은 장수도 있었지요.
문종22년(1068년) 6월 기사中
○ 동계 병마판관 임희열(任希悅) 등이 초도(椒島)를 순시하다가 적선 10척과 만나 싸워서 격파하여 7척을 노획하고, 사로잡거나 베어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이 가상히 여겨 희열 등에게 의대를 내려주고, 공이 있는 여러 사람에게 모두 작상을 올려 주었다.
문종22년(1068년) 7월 기사中
○ 동계 병마판관 임희열 등이 또 초도를 순시하다가 밤에 염라포(閻羅浦)에서 적선 8척과 만나 공격하여 3척을 깨뜨리니, 남은 적이 해안으로 달아나므로 뒤쫓아서 30여 급을 베었다. 왕이 작상을 후하게 더해 주었다.
이외에도 문종조에 여진족을 격퇴한 일화들입니다.
문종4년(1050년) 1월, 9월, 11월 기사中
○ 봄 정월에 동북면 병마사 박성걸(朴成傑)이 아뢰기를, “지난해 10월에 해적이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의 병선 2척을 약탈해 가자 병마녹사(兵馬錄事) 문양열(文揚烈)이 곧 병선을 이끌고 원흥도부서판관(元興都部署判官) 송제한(宋齊罕)과 더불어 적의 소굴까지 쫓아가 그 집들을 불질러 없애고 20급을 베었으니, 그 공을 상주어야 합니다." 하니, 제하여 도병마사에게 내려보
○ 9월에 동북면 병마사가 아뢰기를, “해적이 열산현에 침입하자 병마녹사 문양열(文揚烈)을 보내 전함 23척을 거느리고 초자도(椒子島 함남 홍성군(洪城郡))까지 추격해 가 대패시켜서 9급을 베고 그 부락 30여 곳을 불태우며, 전함 8척을 부수고 병기를 노획한 것이 백으로 헤아릴 정도이니, 그 공에 대해 상 주소서." 하니, 따랐다.
○ 11월에 진명(鎭溟 함남 덕원군(德源郡)) 도부서부사(都部署副使) 김경응(金敬應)이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열산도(烈山島)에서 해적의 배 3척을 깨뜨리고, 수십 급을 베어 바쳤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이 매우 많았다.
문종5년(1051년) 9월,10월 기사中
○ 9월에 여진이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부사 김화숭(金化崇)이 쳐부수고 59급을 베니, 옷과 비단ㆍ은기를 내려주고, 장리(將吏)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내려주었다.
○ 여진이 침입하자 서북면 병마사 박종도(朴宗道)가 쳐부수고 10여 급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20필과 병기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빼앗으니, 왕이 우대하고 장려하였다.
○ 겨울 10월에 여진이 침입하자 동북면 병마사가 군사를 보내 추격하여 쳐부수고 20여 급을 베었다.
문종6년(1052년) 5, 6월 기사中
○ 5월에 북로의 삼살촌(三撒村 함남 북청군(北靑郡)) 도적의 괴수인 고연(高演)이 번병과 더불어 치담역(淄潭驛)을 에워싸자, 병마녹사 김충간(金忠簡)과 자주방어판관(慈州防禦判官) 장입신(張立身)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워 대패시키고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50여 급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 6월에 동여진 고지문(高之問) 등이 바다를 건너와 삼척현(三陟縣 강원 삼척군) 임원수(臨遠戍)를 치자 수장(守將) 하주려(河周呂)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나가 군대를 돌며 말하기를, “적의 수효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으나, 만약 사람이 스스로 싸우면서 그 몸을 아끼지 않으면 싸움은 반드시 이길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방패를 끼고 칼을 빼어 나아갔다. 마침 안변(安邊) 도호판관(都護判官) 김숭정(金崇鼎)이 관할하고 있는 여러 수(戍)를 순시하다가 그 근처에 이르자 적이 뿔피리 소리를 듣고 구원병이 벌써 왔다고 여겨 마침내 놀라 어지러워졌는데 주려의 군대가 이긴 기세를 타고 들이쳐 10여 급을 사로잡거나 베니 적이 흩어져 달아났다.
문종15년(1061년) 9월 기사中
○ 도병마사가 아뢰기를, “적의 추장 아라불(阿羅弗) 등이 국경을 침범하여 변경의 백성을 약탈하자 평로진 병마록사(平虜鎭兵馬錄事) 강영(康瑩)과 서북면 병마록사 고경인(高慶仁)이 군사를 거느리고 뒤쫓아 항마진(降魔鎭)에서 격파하여 수십 급을 베고 병장기를 많이 노획하였으니, 포상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문종18년(1064년) 1월 기사中
○ 봄 정월에 서북로 병마사가 아뢰기를, “지난 임인년에 몽포촌(蒙浦村)의 도적떼가 우리 강역을 침범할 작정으로 몰래 평로진(平盧鎭)에 들어오려 하는데, 번장 제준나(齊俊那)가 와서 알려 진장(鎭將)이 먼저 군사를 풀밭에 숨겨놓고 기다렸더니, 적이 과연 돌입하므로 우리 군사가 일제히 일어나서 사로잡고 베어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준나에게 금백(金帛)으로 후하게 상주소서." 하니 따랐다.
문종27년(1073년) 6월 기사中
○ 병마사가 아뢰기를, “동번 해적이 동경 파잠부곡(波潛部曲)에 침입하여 백성을 약탈하자 원흥진군장(元興鎭軍將)이 전함 수십 척을 거느리고 초도에 나가 싸워서 12급을 베고, 포로로 잡혔던 16명을 탈환하였습니다." 하니, 왕이 기뻐하면서 지병마사 비서감(知兵馬事祕書監) 이성미(李成美)와 영군도부서장군(領軍都部署將軍) 염한(廉漢) 등에게 은약합(銀藥合) 한 벌씩을, 그 밖에 공이 있는 장수와 이속에게는 직상을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이후 문종34년(1080년) 3군 3만명으로 여진족을 정벌한 이후, 한동안 여진족의 침입은 잠잠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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