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중 기병6기?에 무너진 1만 조선군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 일기中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왜적 기병(騎兵)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오자, 만여 명의 군사가 일시에 놀라 무너져 갑옷과 활을 던져 버리고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 익히 알고 있는 용인전투의 내용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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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당시 조선군의 약점을 강항은 군기가 약한데 기인한다고 하였지요.
 
간양록中
"우리 병사들의 체격 조건은 좋으나 군령(군기)가 약하여 사람 죽이는것을 잘하지 못한다. 또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
 

(왜적의) 그 창극(槍戟), 갑주(甲冑), 기장(旗帳), 주즙(舟楫)은 되도록 간편하고 화려하게 합니다. 대부분 호피(虎皮) 및 계미(鷄尾)로써 군복을 만들고, 또 금은으로써 가면을 만들어 말머리나 사람의 얼굴을 가장하는데 매우 해괴하게 하여 사람들의 눈을 현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이 처음에 보고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임진년에 싸움에 패하여 달아난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호표(虎豹)와 망량(魍魎 도깨비)이 한꺼번에 모두 발동하여 심장이 결단나고 넋이 빠졌다.”하였습니다.
 
아아! 죽은 범의 껍질과 죽은 닭의 꼬리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것이며, 목인(木人)의 얼굴과 목마(木馬)의 낯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겠습니까? 요컨대 우리나라 군령(軍令)이 죽은 범ㆍ죽은 닭ㆍ목인ㆍ목마만큼도 무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단소(短小)하고 힘이 없어, 우리나라 남자가 왜인과 더불어 힘을 다투면 왜인이 당장 굴복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른바 생명을 가벼이 여기고 죽음을 잊는다는 것 역시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유년 가을부터 무술년 봄ㆍ여름에 이르도록 천병(天兵)과 더불어 교전하여 사상자가 퍽 많았으므로, 독려하여 점호를 하게 되면 눈물을 흘리며 떠났고, 간간이 집을 버리고 도주하는 자가 있으면 그 어미와 아내를 잡아 가두고서 위협하여 보내기도 했습니다. 포를 쏘는 것도 열 사람 가운데 두세 명에 불과하였고 쏘아서 명중하는 사람은 더욱 적었습니다.
 
아아! 우리나라 사마(士馬)의 정예와 궁시(弓矢)의 장기(長技)를 가지고도 이들의 단병(短兵)에 굴(屈)하여, 차라리 군부(君父)의 원수를 놓아버리고, 차라리 자녀(子女)들을 적에게 넘겨줄망정, 목숨을 걸고 힘껏 싸우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신과 같이 사로잡혀와 구차히 사는 자가 있었으니, 죄가 만 번 죽어도 마땅합니다.
 
 
 
十五日癸卯忠淸巡察使尹先覺全羅巡察使李洸慶尙巡察使金晬之兵潰于水原喪軍之日在於六月之初而道路阻梗傳聞始到先是李洸自稱勤王率兵五千餘名尹先覺領兵數千餘人金晬
將帶率五十餘人陣于水原
 
倭賊六騎建旗揮釼躍馬而來萬餘之軍一時驚潰棄甲投弓而走糧餉弓矢旗鼓等物列如丘山其他喪失不可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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