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조 이야기를 틈틈히 연재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문종조의 양대강국 거란과 송의 사신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문종 당시 고려는 거란과의 선린우호를 잘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부왕 현종조부터 치열하게 거란과의 전쟁을 통해 획득한 평화외교였습니다.
이당시 고려와 거란은 때되면 사신을 통해 선물 보내주고, 왕족의 상을 당하면 서로 애도하고
여하튼 겉으로는 굉장히 좋은 사이였는데요, 국경지역에서 다툼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마냥 경계를 게을리한것도 아니였습니다.
일례로 거란이 국경지대에 객사를 짓고 사람들이 출입하자, 고려는 공손하게 좋은말 할때 여관 치우시죠?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성을 세울려고 하면, 고려는 공손하게 좋은말 할때 빨리 헐어버리시죠?
즉 좋은 사이긴 한데, 한계를 넘진 마라 그런 애매한 관계였습니다.
반면에 송은 고려와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는데, 이는 거란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종은 항상 문화대국 송을 연모?하였는데요, 국가적인 외교는 단절상태였으나
상인들의 왕래는 굉장히 빈번하였고, 송에서 귀화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문종은 송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상당히 우대했는데,
별 능력이 없어도 관직을 하사하기도 하자 고려 신하들이 반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여하튼 송을 동경하던 문종은 드디어 1058년(문종12년) 송과 통교하기로 작정하고
제주와 전남영광에서 목재를 잘라다가 큰배를 만들어 송으로 사신을 보내고자 합니다.
그러자 중서문하성(총리실?)에서 난리가 나게 됩니다.
" 성상폐하~ 거란하고 정말 잘지내고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송하고???
저번에 거란애들이 "너네 자꾸 송하고 친하게 지낼려고 한다며?" 라고 의심해서 식겁했는데
지금 진~짜 거란애들하고 사이좋게 잘지내고 있는 중이거든요?
게다가 지금 송나라 장사꾼들하고 교역해서 돈도 잘벌고 있는데
굳이 정식으로 송하고??? 아니~ 되옵니다~ "
이렇게 문종의 송사랑은 1차적으로 결렬되지만, 송나라 이민자들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게 됩니다.
말도 안통했을텐데, 상당히 높은 관직을 주는일이 허다했지요.
그렇게 10년의 세월은 흘러 1068년(문종22년), 문종의 송짝사랑을 눈치챈 송황제가 사신 황신(黃愼)을 보내게 됩니다.
문종은 대단히 기뻐하며 황신에게 온갖 금은보화를 주며 아주 후하게 대접해 줍니다.
황신은 1070년에 다시 사신으로 오게 되지요.
그러자 문종은 드디어 1071년 김제(金悌)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게 됩니다.
1년후에 김제는 고려로 돌아왔는데, 송황제는 의관 둘을 같이 보내 답례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와 송의 사신외교는 이후 꾸준히 이어지게 되는데요.
드디어 1078년 송과 고려는 정식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거란은 생무시?)
고려사절요 문종32년(1078년) 6월 기사中
○ 6월 송 나라가 좌간의대부 안도(安燾)와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보내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의대와 안마ㆍ비단ㆍ악기ㆍ금은 그릇을 내려주었다.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예를 마치고 좌우에게 이르기를, “황제 폐하께서 소국을 버리지 아니하고 멀리 사신을 보내서 특별히 후한 은혜를 보여 주실 줄 어찌 알았으랴. 영광과 감격이 비록 지극하나 두렵고 부끄러움이 실상 많도다." 하였다. 태자가 뭇 신하를 거느리고 진하를 올렸으며 동경ㆍ서경과 동북 양계 병마사, 8목과 4도호부 또한 표를 올려 축하하였다. 태자에게 명하여 사신을 접대하는 잔치를 건덕전에서 베풀었다.
헌데, 이때 왔던 사신 안도와 진목이 욕심이 많은 위인들이였나 봅니다.
명색이 황제가 보낸 최초의 정식사신들이란 작자들이 쪼잔하게 금은보화 긁어갈 생각만 하다니...
고려사절요 문종32년(1078년) 7월 기사中
○ 가을 7월에 안도(安燾) 등이 돌아가는 편에 왕이 표를 부쳐서 사례하였다. 또 몸에 풍비(風痹)의 병이 있음을 말하고 의관(醫官)과 약재를 청하였다. 그때에 송 나라와 절교한 지 오래였는데 안도 등이 처음으로 이르니, 왕과 국인이 기뻐하여 경사로 여겼다. 사신에게 전례대로 주는 의대와 안마 외에 기증한 금은 보화와 미곡ㆍ온갖 물품이 헤아릴 수 없어서 돌아갈 때에 배에 다 싣지를 못하자 안도 등이 받은 물건을 은으로 바꾸기를 청하니, 왕이 유사에게 그들의 청에 따라주도록 명하였다. 안도와 진목은 성질이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날마다 대접받는 음식 값을 덜어서 은으로 바꾼 것이 매우 많았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북송(北宋)의 시랑(侍郞) 여단(呂端)이 사신으로 왔다가 간 뒤로는 중국 사신을 못본 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이제 사신이 왔다는 것을 듣고 높은 인격을 우러러볼까 하였더니 그들의 하는 짓이 이와 같을 줄은 몰랐다." 하였다.
반면에 거란에는 고위관직인 우간의대부 왕종량(王宗亮)이란 사신이 있었습니다.
문종12년(1058년) 1월기사中
○ 내사사인 최상(崔尙)이 아뢰기를, “어제 거란의 사신 왕종량(王宗亮)을 전송하려고 밤에 금교역(金郊驛)에 도착하였는데 종량이 늘어선 횃불을 보고 말하기를, '성문 밖 전별에서 술에 취하여 밤이 늦었다. 그러나 횃불을 잡은 하인들이 옷이 엷어 민망스러우니, 이후로부터는 아침이 되거든 길을 떠나도록 준비하라. 일찍이 들으니, 귀국 조정에서는 객사(客使)를 인견할 때에 밤까지 술을 권한다더니, 이제 예악을 보니, 중화와 꼭 같음은 탄복하고 칭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왕궁 잔치에 세 번 나아갔는데 반드시 등불을 죽 켜 놓았던바, 우리나라 법에는 오직 어두운 저녁에만 촛불 쓰기를 허락하며, 신하들이 손을 접대하는 데에는 비록 밤이 되어도 촛불은 켜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신 또한 생각하건대, 왕자(王者)는 밝은 데를 향해서 다스리나니 대낮에 빈객을 접견함이 마땅하고, 하물며 등촉 역시 백성들의 고혈로 된 것이겠습니까. 너무 많이 허비하면 검소한 성덕에 흠이 될까 두렵습니다. 옛날에 진경중(陳敬仲)이 환공(桓公)과 술을 마시다가 환공이 불을 켜고 계속하자고 하니, 경중이 사양하면서, '신은 낮 잔치만을 준비하였고 밤 잔치는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하였으니, 이제부터는 잔치를 하는 예는 낮으로 정하도록 하고 전송하는 예도 조회하는 때를 이용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요약하면 왕종량이 거란사신으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나 내일 아침에 갈껀데, 날도 추운데 저녁부터 나모신다고 생고생들이여~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그리고 저번에 국왕께서 나 접대한다고 궁궐에다가 조명을 쫙 깔으셨던데, 그럴필요 없어~ 아껴 써야지~"
그러자 문종은 "그래? 그렇다면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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