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고의 황제 중에 한명, 당태종 이세민(4) - 정관의 정치

 피로서 즉위한 무인 황제....이세민이 당태종으로 즉위한것은 627년 10월이었습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에서 보면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는 소식을 위지경덕으로 하여금 당고조 이연에게 전하고, 이연이 측근인 소우(蕭瑀)와 진숙달(陳叔撻)에게 의견을 묻자 그 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도 없던 건성과 원길이 진왕을 시기해서 일을 벌였군요. 진왕이 그들을 처리했으니 이 공이 얼마나 막대합니까? 폐하께서는 이제 진왕에게 국사를 맡기십시오!"

그러자 이연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내 오랜 바램이었다!"

상식적으로 자기 아들들이 서로 죽이고 난리가 아닌데, 그게 바램이라고 하면 제정신이라고 할 수가 없죠. 하지만 기록이 이러한데 다른 기록이 없는한 무턱대고 넘겨 짚는것도 좋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기록이 있습니다. 비록 믿을 수 없는 소설 속의 내용이지만 말입니다.


돈황 장경동(藏經洞)에 나온 여러 문서 중에, S.2630의 일련번호를 지닌 문서에서는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저승에서 있던 이원길과 이건성의 영혼이 억울함을 고발하고, 저승에서는 이세민의 영혼을 잡아다 심문을 합니다. 이유인즉슨, 왜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후궁에 가두었는가?'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대답을 못하던 이세민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인해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은 대략 무측전 시기에는 존재했던것으로 추정된다는데, 실제로 이세민이 아버지를 가두고 협박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당대에 그러한 인식이 존재했던것을 알 수가 있다……라고 혹자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판단은 알아서 해야죠.



이렇듯 수군거리는 말도 있는 상황에서 이세민, 아니 당태종은 이제 자기의 노선을 보여야 했습니다. 황제로서의 노선이었죠.

 

잔인하게도 당태종은 태자와 이원길의 가족을 몰살시켰는데, 한술 더 떠 당태종의 측근에서 어떤 사람이 태종에게 백여명의 살생부를 보여주며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태자의 측근과 이원길의 측근들이었죠. 하지만 적극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위지경덕이었습니다.




"주요 인물들은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추격을 감행한다면 이는 사회에 커다란 불안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위지경덕의 주장은 먹혀들어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그 당일날에 이건성과 이원길을 꾸짖는 선언과 함께 가담했던 무리들의 죄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말 처럼 되는 일이 아니라서, 지방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당태종의 일파가 기회를 잡아 눈엣가시던 이건성 쪽 사람을 처리해버리는가 하면, 당태종을 따라 왕세충등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장수 왕군곽(王君廓)은 이연의 사촌이자 이건성 일파인 유주대도독 이원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공의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고, 여기에 수만명의 군사가 있으니 다른 이에게 의탁하시는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게 해놓고는, 왕군곽 스스로가 선수를 쳐 이원을 죽여버리고 조정에 보고해서 유주자사가 되었습니다. 아무튼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모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태종이 취해야할 가장 첫번째는 물론 민심을 얻는 일이었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 취한 조치가 환속 중지였지요.


그 당시 정부 정책으로 불교와 도교의 절, 사원들 대부분을 밀어버리고 도사와 승려를 환속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사회가 부정부패가 심해지면 이런 쪽에서 땡중들이나 사이비 도사가 설치는등 폐단도 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나쁘다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승려와 도사가 각각 20만을 훌쩍넘는 엄청난 인원인데,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런 신자들을 새로 즉위한 황제 당태종의 이름으로 다시 제 집을 찾아주게 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좋지가 않지만, 일단 당태종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릴 수가 있었지요.



둘째, 계급이나 서열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의견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상소로 정책을 올리도록 했습니다. 이건 모든 관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황제의 눈에 들 기회가 생긴 관료들의 여론을 단기간이지만 좋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셋째, 3천명이나 되는 궁녀들에게 자유를 주고 풀어주었습니다. 이렇듯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당태종은 노력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것이 과거 이건성의 일파였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것이었죠.



당태종은 앞서 말한것처럼 이건성와 이원길 일파에 대해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 그 일파들을 끌어안으려고 했습니다. 설만철, 그리고 위징 등이 대표적 입니다. 위징은 이건성의 책사로서, 적극적으로 나가 당태종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당태종은 위징을 불러서 말했지요.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의 사이를 어지럽혔는가?"

"모시는 사람이 주군을 위하는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 말을 따랐다면 이전의 태자께선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징의 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를 벌주지 않고 중용했습니다. 당태종은 상당히 포용을 중시했는데, 영락제하고는 이런 부분에서 조금 달랐던 것입니다. 일단 당태종의 정책 목표가 포용과 화합이라면, 위징만큼 적절한 대상도 없었습니다. 이건성 일파를 대표하는 사람이니까요. 위징을 끌어안으면 이건성 일파를 거진 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당태종은 위징을 하북으로 보냈고, 위징은 그곳에서 별 무리없이 이전 이건성의 사람들을 컨트롤하며 현재 당태종의 체제에 복속되도록 도왔습니다. 물론 아주 완벽하것은 아니라서 이건성의 측근이었던 이예의 반란이 있긴 했지만 어느정도 틈을 메꾸고 통합하는데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일단 정리가 끝나자 당태종은 다시 또다른 작업에 착수합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였습니다. 당태종 즉위 두 달째, 위징과 봉덕이를 부른 당태종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현재의 세상이 아직 어지롭다는것에 의견 일치를 모았습니다. 문제는 이 어지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는것이냐 였죠.


엄격한 법률을 이용한 강력한 법가 통치의 패도냐?
 
아니면 회유와 인정을 통한 유가 통치에 의한 왕도냐?


강하게 나가야 한다, 이것이 봉덕이의 주장이었고 부드럽게 나가야 한다는것이 위징의 주장이었습니다. 깊게 들어가자면 당대 기득권인 관롱집단과 신진 계층, 그 외 뭐 여러 서로의 입장 등등...그런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굳이 그렇게 복잡하게 여기서 볼 필요는 없을테구요. 간략하게 대부분의 신하들은 봉덕이 쪽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당태종 하면 떠오르는 재상은 위징이죠. 위징의 주장이란 이런것이었습니다. 꽤 유명한 말이죠.


"세상이 어지로우면 다스리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오히려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으면 금방 배부르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 쉽기도 하지요."


일단 정책이 이렇게 결정되자 그에 따라서 많은 일들이 처리되었습니다. 우선 너무 많은 관리들을 툭툭 정리하고 조직을 간소화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현과 주를 간략하게 합쳤구요. 너무 세부적으로 분할되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 많아진다 이거죠. 그리고 의창 제도를 실시해 식량을 비축해두고 빈민 구제에 사용했습니다. 흉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한 사형을 극단적으로 줄였습니다. 오부주(五復奏)와 삼부주(三復奏) 제도를 실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소를 5번 혹은 지역에 따라 3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으로 사형 당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는데, 동시에 사형 집행을 할 수 있는 날짜도 극단적으로 줄여버렸습니다. 보통 2월 4일인 입춘부터 대략 9월 23일인 추분까지 사형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다른 날도 제사가 있다, 초하루다, 상하현이다, 휴일이다, 밤이다, 해서 사형을 금지시키니 사형 집행 할 수 있는 날짜는 엄청나게 줄어들어버렸죠.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 보면 다시 대사면이다 해서 사형수가 형이 감형되거나 풀려나기도 하구요.

정관 4년, 중국 전역에서 사형당한 사람이 29명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곤장을 때릴때도 등 대신 허벅지를 떄리도록 조치하는가 하면, 사형 대신 오른발을 잘라버리는 제도도 귀양을 보내는것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신하들이 자신에게 직언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거의 괴롭힘 수준으로 당태종에게 간언했고, 물론 그 중 제일 심했던 사람이 위징이었죠.

"감히 간언헀고 능히 간언했으며 훌륭히 간언했다."

위징을 바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위징은 당태종 앞에서 목이 달아날 법한 소리를 하고도 얼굴색 한번 바꾸지도 않았고, 무슨 정책을 내려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세번이고 네번이고 통과 시키지 않고 저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태종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항상 대신들인 수나라를 예로 들어 말하며 말렸습니다. 참다 못한 당태종이 폭발한적도 여러 번입니다.


"내가 수양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래. 하나라 걸왕이나 상나라 주왕하고 비교하면 어떤가?"

"국가에서 단 한사람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고 단 한푼의 세금도 거둬들이지 않아야 만족을 하겠군!"


가끔 참다 참다 못해 꼭지가 완전히 돌아서 맛이 갈때도 있었는데, 이럴때마다 당태종을 제어한것이 장손황후(長孫皇后) 였습니다. 태종의 부인인 장손황후는 후궁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특별히 악랄하고 질투심 넘치는 방법이 아니라 감싸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비빈들이 아프면 약을 주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자기 아이처럼 이뻐하면서 길렀습니다. 이렇게 후궁이 조용하고, 치열한 궁중암투가 사라지자 당태종은 비교적 정치업무에 주력할수도 있었죠.


그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당태종을 제어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위징과 대화하다 엄청나게 화가 난 당태종은 아예 그 자리를 빠져나와서 돌아가버렸습니다. 돌아와서도 씩씩거리는 태종을 보고 장손황후가 묻자 당태종은 매우 화를 내며 말했죠.


"그 시골뜨기 촌놈 위징 말이오.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해대니, 언젠가 죽여버려야지!"

그러자 장손황후는 축하하는 일이 있을때 입는 옷을 입고 나와 태종에게 절을 했습니다.

"아니, 왜 그러시오?"

"전부터 위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충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폐하와 나라를 위해 너무나도 기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당태종은 껄껄 웃으면서 화를 풀었고, 황후는 위징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유명한 이야기죠.


또한 실제적으로 장손황후는 외척 개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장손무기는 당태종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장손황후가 외척이 정치에 개입을 하는것을 거의 차단해버림으로서 뭔가 수를 쓸 수가 없었죠. 장손황후가 죽고 나서야 실권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장손황후는 당태종이 화를 내면 덩달아서 "그렇군요.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같은 식으로 태종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조금 화가 가라앉는듯 하면 천천히 변호하면서 지적하는것이었죠.  이 장손 황후는 40세가 되기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유언은 이러했습니다.


""방현령은 뛰어난 신하입니다. 중용하시지요. 그리고 외척을 중용하지 마세요. 제 장례는 간소하게 치뤄주십시오."


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당태종도 어이가 없어 애석해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궁녀들이 하나의 책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무엇이냐?"

"평소에 황후께서 아녀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하지 않는일에 관한 득과 실을 모아 책을 쓰셨습니다. 글 재주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어 보여드리지 못했지요."

형제를 죽인 냉혹한 당태종도 그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는 울먹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합니다.

결국 당태종은 궁궐내에 탑을 하나 짓고는, 틈만 나면 그 자리에 올라가 황후의 무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위징이 말했습니다.

"어느 쪽을 바라보십니까?"

당태종은 황후의 무덤인 소릉을 가르켰습니다.

"저기외다."

"아, 그러십니까? 전 폐하께서 선왕의 무덤인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지요."

이 와중에도 위징은 '황제가 아버지를 그리워 하지 않고 죽은 여인만을 그리워한다' 고 비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당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한바탕 대성통곡 하고는 눈물이 멈추자 마자 탑을 때려 부셔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위징은 간언하고, 장손황후는 태종의 심기를 헤아릴때, 실무에서는 방현령과 두여회가 맹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관료들을 줄이는 어려운 일을 맡아 완벽하게 해내었고 국고를 풍족하게 하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대외전쟁에서도 순조롭게 일이 풀려갔습니다. 당태종의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이정은 어린 시절부터 병법에 밝았고, 수나라의 장수 한금호도 그를 칭찬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돌궐의 힐리가한을 격파하였고 토욕혼을 무찔렀습니다. 이위공문대를 남긴 그는 당나라 군대의 전법과 전술에 있어서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후군집은 반기를 든 고창국을 점령, 이곳을 당나라의 주현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렇듯 당태종의 정관의 치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먹구름이 오기 시작하는데 자신 있게 나선 고구려 정벌, 안시성 전투에서의 패배와 후계자 문제에서의 다툼이 바로 그것이었죠.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 그렇지만 절대적인 힘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태종 당시 당은 생산력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인구가

수문제 번영의 3분의 1 비스무리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는데, 심지어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켰을때도 그러했습니다.

 

당연히 사치는 꿈도 못 꾸고, 고창국의 사신은 당나라를 다녀오더니 "수나라는 삐까 뻔쩍 하는데, 당나라는 별거 아닌걸?" 하고 방심하다 당하기도 하구요.

 

당나라가 수문제 당시의 인구를 넘은건 건국 후 무려 120년 쯤 지나 당현종 무렵이니, 얼마나 수양제가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법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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